인류의 역사 안에서 우주의 원리들과 인간의 삶에 관한 개념들이 인간의 언어를 빌려 철학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했을 무렵, 동양에 공자님(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년)이 계셨다면, 서양에는 아리스토텔레스(Ἀριστοτέλης, Aristotle, 기원전 384~322년)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형이상학이라는 내용을 정리하면서 존재하는 것들이 가능태(可能態, potentia, potentiality)와 현실태(現實態, actus, actuality)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흐른 뒤, 모든 개념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재정리하려고 했던 토마스 아퀴나스(Tommaso d’Aquino, 1224년/1225?~1274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들을 발전시켜 하느님의 피조물인 모든 존재가 하느님의 선하심이라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선하심을 닮고 실현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역동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어진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 큰 나무가 되어가듯 하느님의 모습을 담은 잠재력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향하여 신성한 실재를 꿈꾸며 완성으로 나아간다. 그러기 위해 인간은 씨앗의 비밀을 지닌 존재로서 나무가 되기 위해 땅속에 묻혀 지내는 씨앗의 아픔을 산다.
그리스도교의 인간은 이처럼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가능태요 잠재성을 지니고 성장통을 겪으며 현실태 사이에서 완성과 꿈을 향해 영적인 여정을 산다. 이를 두고 바오로 사도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뿐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2-23) 한다.
사람은 누구나 아직 완성되지 못한 현재의 내 모습인 현실태, 그리고 되어가기를 꿈꾸는 가능태 사이의 긴장을 살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현실적인 내 모습과 내가 그리는 모습이 다를 때, 많은 경우 아픔과 진통을 겪는다. 속으로 아파 신음하기도 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병증病症에 시달리기도 하며, 이를 피하기 위해 다른 돌파구를 찾아 거기에 의존하기도 하고, 혼자만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나누어지자면서 주변을 괴롭히기도 한다. 이럴 때 그 주변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함께 얽힌 인연들을 감당하며 인내하고 살지만, 어떨 때는 너무 힘들거나 귀찮다면서 모질게 ‘이해 불가’나 적당한 자기합리화의 명칭과 딱지를 붙여 아예 인연과 삶의 굴레에서 제거하거나 삭제를 해버리기도 한다.
모든 인생이 이런 아픔 속에 살아가지만, 부모와 자녀 사이에 살아야 하는 아픔은 좀 특별하다. 인생을 살면서 극명하게 성장통의 징후를 보이며 소위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어린 자녀들과 함께 살아야만 하는 부모는 큰 아픔을 겪는다. 아이들이 자기만의 잠재력으로 자기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현실을 향해 좌충우돌 노력할 때, 부모는 한편에서 안타까워하면서 시름을 짓는다. 부모들이 곧잘 ‘반항’이나 ‘일탈’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자녀들의 노력은 떡갈나무가 되려는 도토리의 꿈이고 필수적인 과정이며 왕성한 생명력이 내뿜는 힘이다. 악의가 아니고 실현과 성취를 추구하는 표현이며 에너지이다. 이를 동반해야만 하는 어른들은 속으로 아프면서 자녀들이 아름답고 튼실한 나무가 되도록 정원사의 지혜를 발휘하며 은총을 기도해야만 한다.(*이미지-구글)
제가 그 성장통을 되게 겪고 있어요.
그 도토리들이
떡갈나무로 바르게 성장하게
하는 첫 관문은 참 어렵네요.
무한 인내와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얼마나 힘을 쏟아냈는지.
거의 3월은 초죽음이었어요.
새벽
오늘도 무사히를 묵상하곤 합니다.
주말 거듭나기 위해
오늘 보내주신 귀한 말씀
거듭거듭 느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