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2,1-14(연중 제28주일 ‘가’해)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마태 22,8) *이미지-ilblogdienzobianchi.it

오늘은 ‘두 아들의 비유’,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 이어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참조. 마태 21,23-27)을 향하여 말씀하신 세 번째 비유이다. 이 비유는 바로 앞에 수록된 지난주 복음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3)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니 주제가 같기 때문이다. 즉, 지난주 복음의 포도밭 주인이 오늘 복음에서는 혼인 잔치를 열었으나 거절과 무시를 당한 임금에 해당한다. 오늘 복음은 전통적으로 교회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였고, 이에 따라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의 파멸과 함께 단죄를 받는다는 식으로 오랫동안 읽혀왔다.

마태오복음이 기록되던 시점에서 보자면 예루살렘은 이미 로마인들에 의해 기원후 70년에 파괴된 상태였고, 이 사건은 하느님을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 마침내 마땅히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렇지만 이 복음의 대목이 오늘날 우리,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교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혼인 잔치에 초대된 우리 모든 사람 하나하나를 두고 기록되었다는 사실도 슬기롭게 깨우쳐야만 한다.

혼인 잔치를 열어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는 그 잔치에 망설임 없이 참석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아니면 그 잔치의 초대를 받고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꾸물대는 것은 아닌지, 부르심을 받고 바로 그 잔치에 참석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행실의 예복, 곧 참된 회개의 예복을 준비하였는지, 아니면 우리가 사는 모습에 실질적인 변화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위선적인 거짓말로 주님 앞에서 두리뭉실 넘어가려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러한 질문들은 절대적으로 우리 자신 하나하나를 위한 질문들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이런 질문들이 행여 다른 이들의 행실을 감시하고 판단하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우리가 다른 이들을 손가락질하기 위한 질문들이 된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1.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

하늘 나라의 도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계시하시며 풀어주신 이 비유를 겸손하게 잘 들어야만 한다. 비유는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마태 22,2-3)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임금 아들의 혼인 잔치라면 왕자의 잔치였고 그 잔치에 초대받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명예롭고 감사한 일일 텐데도 사람들이 감히 오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임금은 “다시 종들을 보내며…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고.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게”(마태 22,4) 한다. 임금은 한 번도 아니고 거듭 초대를 반복하며 모든 것이 준비되었고 잔치가 연기될 수 없음을 밝힌다.

비유를 여기까지만 들어도 비유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로 시작되는 구약의 예언자가 기록했던 ‘모든 민족들을 위한 하느님의 잔치’라는 대목(이사 25,6-10)을 잘 알고 있던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의 비유’를 시작하시자마자 그들은 금방 예수님께서 신랑이신 메시아와 신부인 당신 백성 간의 잔치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려는 것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혼인날이 다가왔다는 것과 그 혼인 잔치에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에 관한 말씀(마태 9,15)을 밝혀주신 적도 있었다.

오늘의 비유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읽어볼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은 인생 안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적어도 3번, 하느님과의 일치, 내적인 완성,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된다. 교회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똑같이 드리는 매일미사인 성체성사를 통하여 세상을 초대한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초대하신다.

2.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임금의 초대와 혼인 잔치가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한다. 하느님의 선물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잔치가 거부된다.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마태 22,5-7)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예언자가 파견되어 하느님의 초대를 전했으나 사람들은 가꾸어야 할 밭이 있고, 이윤을 남겨 생계를 꾸려야 한다는 핑계로 이를 거절했고 살해하기까지 했다. 관대한 초대와 선물이 계속되는데도 받은 선물과 초대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피상성, 태만, 그리고 식별력 부족공격성과 폭력, 살인을 부르고 결국 자신들도 망하게 만든다.

이 대목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 오랫동안 제시되었던 하느님의 표징과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무시했던 과정을 암시한다고 할 수도 있다. 또한 “밭”은 부동산으로서 재산의 상징이고 “장사”는 말 그대로 business이며 사업의 상징이다. 내가 가진 것과 나의 능력을 과신하는 것이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단순히 초대를 거절하는 것만이 아니라 살인자가 되기까지 한다. 인류의 역사 안에 드러난 수많은 예언자와 표징을 “아랑곳하지 않았던” 이스라엘과 인류의 모습이다. 개인적으로는 ‘자기 자신’만을 맹신하는 젊은 날의 모습이기도 하다.

구세사를 떠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라면, 이는 인생살이 안에서 나의 자아 중심적 ‘에고’가 만만滿滿한 상황을 상징한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자기 인생 안에 주어진 하느님의 초대를 외면하고 ‘자기 계획’을 완성한답시고 다른 사람을 해치기까지 한다. 자기 자신의 ‘에고’를 죽여야만 살 수 있음에도 너무 늦게 이를 깨닫는다. 우리 인생 안에 다가오는 하느님의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특별히 어린 시절, 작은 움직임으로 어린 마음에 다가오는 초대, 이를 동반해주지 않는, 오히려 분위기를 거꾸로 몰아가는 부모와 같은 보호자들과 주변에 의해서 대부분이 첫 번째 초대를 간과한다. 두 번째 초대는 성장하여 인생살이에 나름대로 중요하고 바쁜 일이 있다고 하는 때에 다가오는 초대이다. 재산의 증식과 성공을 향한 추구, 그리고 일상의 일들 안에 다가오는 초대 앞에서 젊은이들은 내면의 움직임과 갈망을 간단히 죽인다. 그리고 “마을 어귀”와 “거리에서” 서성대며, 인생의 본 게임을 살아보지도 못한 채 망치기도 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신이 복음을 기록했던 당시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살아야 했던 1세기 말의 교회 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복음을 기술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사실 당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전한 주님의 말씀에 귀를 닫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멸망을 자초하게 되었다는 식의 필치로 기록한다. 이를 잘 해석하지 않으면 임금이 “진노”하여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성도 예루살렘)을 불살라버렸다”라는 구절은 다소 어렵고 엉뚱하게 들릴 수 있다. 인내로우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노하지 않는 분이시며, 모든 인간이 생명과 죽음의 길 앞에서 스스로 생명을 선택할 수 있도록 끝까지 충만한 자유를 선물하시는 분이시다.

비유는 계속된다. 마음이 넓고 참을성이 많았으며 자비가 넘쳤던 왕은 세 번째로 종들을 파견하며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마태 22,8) 하며 다시 한번 사람들을 초대한다. 이번에 임금이 종들에게 내린 명은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 22,9)이다.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10) 잔칫방은 거리를 오가는 사람으로 가득 찬다. 임금의 명으로 직접 선택되고 개인적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겠지만 혼인 잔치에 참석을 기대하지도 않았던 사람까지 모두 오게 된다. 의로운 이나 불의한 이,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들이 모두 임금의 자비로운 초대를 받는다. 임금의 식탁에 “밀과 가라지”,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들”(참조. 마태 13,24-30.47-50)이 모두 놓인다.

이러한 소집은 아브라함 시대로부터 때가 이르러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을 때까지 하느님께서 직접 부르시지도 않았고 선발하지도 않았던 대중 앞에서, 그리고 이방인들 앞에서까지 무작위로 복음을 전해야 했던 교회의 사명을 잘 반영해 준다. 같은 비유를 전하는 루카 복음사가는 잔치의 주인이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루카 14,21) 하였다 한다. 루카는 이렇게 소외된 인간들, 괄시받았던 인간들이 잔칫방의 첫 손님들이 되었다고 밝혀주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하셨던 말씀을 연상하게 한다.

3.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

그렇게 잔칫방이 손님들로 가득 차게 되었는데,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게 된다.”(마태 22,11) 임금이 몸소 순회하며 손님들에게 잔치에 참석하여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임금이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에게”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마태 22,12) 하고 태도를 돌변하여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마태 22,13) 하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당시 혼인 잔치의 관습을 이해하면 쉽다. 당시 혼인 잔치에서는 잔칫방에 입장할 때 이미 잔치에 참석한다는 표시와 잔치 손님에 대한 예우로 잔칫방 입구에서 일일이 어깨에 걸치는 숄과 같은 것을 선물로 받았다. 그러니까 잔치에 참석하는 이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도 차리라고 무상으로 제공된 그 숄마저 걸치지 않고 그것마저 거부한 사람을 임금이 만나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잔치에 초대를 받아 잔칫방에까지 들어왔으면서도 그곳에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행동 양식을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것을 무시했다는 말이다. 무상으로 제공된 그 숄은 손님에게 영예로운 것이고 기쁨과 감사로 받아야 할 것이었음에도 그러지 않았고, 잔치에 초대를 받아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그 잔치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겼으며, 기쁨의 선물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주변과 타인을 전혀 개의치 않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고 자기만족에 사는 사람이었다. 임금은 자기가 베푼 잔치에서 그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쫓아내는 것 말고는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안하무인 격인 그 사람의 태도가 스스로 쫓겨나게 한다. 임금의 선물과 호의, 그리고 자비와 관대함을 무시한 결과이다. 우리도 애초에 그런 영광스러운 잔치에 초대받을 자격이 없지만, 사고방식을 바꾸어 마땅히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의 선물을 기쁘게 받으려고 해야만 한다. “회개하여 어린이처럼”(마태 18,3) 그저 기쁘게 하늘 나라의 선물을 받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비유는 ‘은총과 그에 따른 책임’이라는 주제 아래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엄청난 은총을 받았음에도 그에 따른 충분한 책임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하느님의 은총은 선물 중의 선물이지만, 그것을 사는 값은 그저 사랑과 자유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잔칫방에 들어가기 위해 공짜로 제공된예복이 은총을 사는 값이다.

“혼인 예복”은 교회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관한 믿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 기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선행과 의로움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테르툴리아노는 성스러움, 성 예로니모는 인간의 선행, 성 아우구스티노는 사랑으로 이를 푼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10)라고 하면서 “새 인간”으로 풀었다.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세례 때에 ‘흰옷을 입히는 예식’에서 사제로부터 “여러분(당신)은 이제 새로이 창조되어 그리스도를 닮게 되었으니 이 흰옷(흰 가운)을 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 날까지 깨끗하게 보존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십시오.”라는 말을 들었고, 이에 “아멘!”이라고 응답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화려한 예복은 아닐지라도, 온갖 세속의 풍파 속에 닳아 해졌을지라도, 나름대로 정갈하게 손질한 깨끗한 내 생명과 영혼의 예복을 입어야 한다. 누구나 똑같이 입는 유니폼이 아니라 내 인생에서 나만이 입어야 하는 나만의 깨끗한 삶의 예복을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훗날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져” “울며 이를 갈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 이 비유를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매일매일 당신의 잔칫상에 나를 부르시는 분 앞에서, 내가 그런 초대를 받을 만한지, 또 나의 대답은 어떠한지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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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1906~1945년)는 ‘은총’을 두고 다음과 같이 쓴다. 『은총은 밭에 숨겨진 보물처럼 비싸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그 보물을 사랑하여 기쁨으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처분한다. 값비싼 보석을 발견한 상인도 (기꺼이) 자기 재산을 대가로 내놓는다.…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제자들도 그분을 따르기 위해 그물을 버린다. 복음은 항상 새롭게 찾아야 하고 항상 새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아주 비싼 은총이다.…복음은 우리를 따르라고 부르는 은총이고, 또 자기 생명이라는 값을 요구하는 은총이며, 그렇게 해서 생명을 다시 얻는 은총이고, 죄를 단죄하는 은총이며, 죄인을 의롭게 해주는 은총이어서 값이 아주 비싸다.』

One thought on “마태 22,1-14(연중 제28주일 ‘가’해)

  1. 그 옛날 처음 세례를 받을 때가 문득 떠오르며, 지금 생각해보면 솔직히 왜 세례를 받겠다고 결심했었는지 모르겠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수녀님이 천사처럼 열심히 지도해주셨던 기억과, 지금은 모두 내 의지로 되지 못할 것들이 맏들어지고 이루어 진 것들에 정말 놀랍고 감사하는 마음 뿐이다. 생명의 예복과 영혼을 입었던 날; 세례받은 날,축복받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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