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ID-19라는 것이 온 세상을 내려치며 두렵게 한다. 하늘의 경고이자 숨 고르기이고, 땅의 쉼이며, 사람들이 기도하는 시간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일상과 서로의 소중함을 발견하기 시작하고, 손으로는 닿지 못해도 마음으로 닿아야 하는 것들과 만지지는 못해도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를 새기며, 숨 가쁘게 급하기만 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우리가 그렇게 위대하다고 자부했었으나 그렇게도 작은 것 앞에서 속수무책일 만큼 연약함을 절감하며, ‘위기는 기회다’라는 흔한 말처럼 오랜 세월이 걸려야만 사회적 합의와 시스템이 가능할 국민적 기초생활비 지급, 원격 진료, 화상 수업…등이 가능해지는 일도 보고,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황갈색 이산화탄소로 뒤덮인 하늘이 푸른 빛을 되찾았다는 사실도 목격한다.[1]
한국 사회에서 미래 세대인 젊은이들의 교육을 이야기할 때면 으레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이라는 세 주체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핵가족으로 분화된 지 오래된 가정은 먹고 살기에 바쁜 나머지 가정교육을 학교에 미루는 것으로 사회와 함께 묵시적인 합의를 해 주었고, 물질주의와 개인주의, 자본주의로 팽대해진 사회는 이미 그 교육적 기능을 상실하였거나 감히 교육을 언급할 수 있는 권위를 상실한 지 오래다. 그리고 학교는 누가 설정했는지도 모를 입시라는 교육 목표를 향해 각자도생하면서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거대 공룡이 되었고 산업이 되었다. 그 누구도 내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 모두의 무의식 안에서 우리는 학교 교육이 12년에서 20년 동안 무감각한 암기 훈련으로 대량 생산을 통하여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종사하는 인적 자원을 양산하거나 추출하는 깔때기 기관으로 전락하지는 않았는지를 묻고 있다. 그리고 뭔가 ‘문제’를 얘기하기 시작하려 하면 그저 암울하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암담하여 오늘은 말고 언젠가, 그리고 내가 아닌 누군가가 다시 생각하리라는 막연한 희망 아닌 희망으로 자포자기한다.
이것이 부정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학교라면, 그 학교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흔히 생각하듯이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면, 무엇이든지 즉각적으로 조회가 가능한 스마트 기기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고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정보를 검색하는 방법,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곳, 정보의 분류 체계, 정보의 생산 기술, 정보의 관리자요 생산자들을 관리하는 법…등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일까? 그렇다면 가르친다는 것은 정보를 에워싼 기능과 관리 체계에 불과한 것일까? 교육의 목표는 교육 기관의 목표와는 달라야 하고 다른 것일까? COVID-19로 이미 실체가 드러나고 있듯이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많은 대학이 그 기능을 상실하거나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은 정말 맞는 말일까?
어쩌면 질주하는 고장 난 자동차 위에서 그 자동차를 수리해야 하는 것과도 같다는(우치타 타츠루)[2] 오늘날의 교육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아무도 묻지 않고 요구하지 않았던 답을 제시하려는 데에 있다. 우리는 교육을 한다면서 결코 배움이 없는 학습을 연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능과 스펙을 위한 기관으로 전락하여 산업이 되면서 스스로 도덕적이지 않은 학교에서 도덕 교육을 시도하는 것은 가능할까? 온 우주가 아이들을 위한 학교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학교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각박한 사회의 굴레를 답습하고, 4대 강을 막았다고 고함을 지르던 우리이면서도 나름대로 자기 이야기와 줄기, 흐름을 안고 흘러야 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는 정작 콘크리트 수로를 지은 것이 아닐까?
그래도 그 학교를 통해서 우리는 모두 인간이 되었고 이 사회의 건실한 구성원이 되지 않았느냐고 되묻는 것만으로 학교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하여 우리가 이룬 사회가 유사 이래 가장 거칠고 잔인한 교육받은 자들의 야만인 사회가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그 답은 어떻게 할 것인가?
선량한 사람을 만들고, 선량한 시민을 만들며, 개인이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한다는 의무 교육의 목표가 여전히 학교 교육의 지향점이라는 데에 공감한다. 그러나 칠판을 가득 메우는 내용과 현란한 영상, 어쭙잖은 억지 조합을 통한 끝없는 기억 훈련, 지속적인 시험, 보상과 처벌을 통한 조건화, 승자와 패자의 게임, 가당치도 않은 스승 아닌 스타 강사 등을 통하여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똑같은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현장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미래의 시민을 규격에 따라 기르고 훈련하며, 별 볼 일 없는 식자층을 양산하고, 내면의 삶을 불구로 만들며, 고분고분하고 무능력한 시민이 되도록 하여 대중을 ‘관리하기 쉽게’ 만들기 위한 계획의 산물이 공교육이 아니냐고 한다면 이는 어떻게 대답할 것이며, 학교가 어리석은 소비자나 피고용인으로 미래 세대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면 그 대답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들 스스로 배우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고 스스로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가르치지 않는 가르침은 과연 가르침일까? 휴식 시간을 알리는 디지털 신호음과 커리큘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규격화된 학습, 이를 점검하는 사지선다형이나 단답형 시험, 어느 학교에 가더라도 별다른 것 없는 시간표와 과목, 나이 구분, 규격화 같은 도구들로 아이들의 머릿속을 인생과는 별 상관없는 정보들로 꾸역꾸역 채우면서, 면허증이나 자격증이 교육의 관건은 아님에도 이를 보증하는 교육이 되어버린 공장식 교육은 과연 언제까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살레시오회는 우리 자녀를 자기 삶의 주체가 되게, 모험을 하게 가르쳐야 하고, 자기 주도로 스스로 방향을 찾아가도록 가르쳐야 하며, 실패를 통해 스스로 배우는 방법을 찾도록 가르쳐야 하고, 비판적이며 자주적으로 사고하게끔 가르쳐야 하며, 내면의 삶을 계발하여 인생을 지루해하는 일이 없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교육한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교육한다는 것은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자신을 신뢰하고, 가치를 회복하는 여정을 인내로써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긍정적인 삶의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면서 살 수 있도록 이성을 재정립합니다. 또한, 교육한다는 것은 쇄신된 대화의 능력이고, 흥미 가득한 제안이며, 더 나은 삶을 위한 본질적인 것에 단단히 닻을 내린 것입니다. 일상의 노력에 대한 가치들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경험에도 젊은이들을 참여시키는 것입니다.”』[3]
『교육자의 대부분, 적어도 세상에서 살레시오 가족으로 현존하는 교육자들이, 학교란 어린이들에게 읽고 쓰는 것, 수학 문제를 푸는 법, 과학과 역사를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넘어서, 세상이 지닌 비전에 놀라운 영향력을 행사하고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도록 형태를 부여하는 중요하고 효력 있는 수단이라고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에게 큰 기쁨이 됩니다. 젊은이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스스로에 대해 질문을 던지도록, 나아가 삶의 이상으로 제시되는 바에 대해 토론하도록 가르치십시오. 자신의 관점과 견해를 표현하고, 자신의 환경과 삶의 특수한 상황,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위한 꿈에 대해 고려하도록 가르치십시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공동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잘 준비되고 활기차며 관대하고 유능하며 비판 의식을 지닌 시민으로 인식하도록 가르치십시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4]
애초에 이런 물음 자체가 학교교육schooling과 교육education이라는 개념의 혼돈에서 이루어졌거나, education이 결합할 수 없는 schooling에 education이 결합하면서 생겨난 문제일지 모른다. 아니면 넘나들기가 대단히 어려운 실용교육과 인성교육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역사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람이 되어가고 인격적 존재가 되어가는지를 고민했던 인류는 자라나는 세대의 교육을 생각하면서 결국 인문과 실용의 두 축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아주 소박한 말로,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인간이 될 것인가와 실제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숙고했다. 물론 이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임은 분명하다. 새가 두 날개로 날아야만 날 수 있는 것처럼 인간다운 인간의 품성과 실생활의 요령은 그 어느 한쪽만을 강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굳이 구분하여 말한다면, 인간다운 인간이 인간의 천상적, 초월적, 영적, 종교적, 도덕적, 정신적, 인성, 가치, 하늘을 향한 인간의 영역이라면, 이전 세대로부터 전수되는 실제 생활의 경험적 축적은 지상적, 육적, 사회적, 이성적, 학습, 정보, 기술, 땅에 발을 디딘 인간의 영역이라 할 것이다. 두 영역이 균형을 잡아야 했음에도 시대와 역사의 흐름을 따라 때로는 그 어느 한 편이 무게를 지니게 되었고, 어쩌면 현세 사회 안에서 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공교육이라고 하는 집단 학교 교육 시스템을 통하여 후자의 영역만이 강조되는 것을 우려한다.
살레시오회의 교육 목표
이와 같은 교육에 관한 인류의 오랜 고민을 함께 고민하고 청소년들과 함께 자신의 삶으로 그 고민을 살아내면서 교육 이론가가 아닌 행동가로서 사제요, 청소년의 친구이며 아버지가 된 성인 돈 보스코만의 독창성과 고유명사가 된 살레시안들의 교육 목표는 ‘착한 신자(good Christian)’와 ‘올바른(정직한, 착한) 시민(upright/good citizen)’, 혹은 ‘천상 시민(heavenly citizen)’과 ‘지상 시민(earthly citizen)’이라고 요약된다. 이는 주로 살레시오회의 문헌에서 ‘사명’과 ‘영성’이라는 영역으로 논의된다.
이 두 가지의 교육 목표를 현대적 의미로 오늘 우리가 비 그리스도교적이고 탈 그리스도교적인 현실, 다종교와 다문화의 우리나라 현실에서 해석하는 데에는 돈 보스코가 만났던 대다수 아이가 가톨릭 신자들이었던 상황을 별도로 논의해야 하는 것 말고도 몇 가지의 오류를 미리 정리해야만 한다. 『돈 보스코의 교육 목표가 신학적인 것과 인간학적인 것, 신앙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 교회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그리스도교와 인본주의, 영적인 것과 현세적인 것,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초월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그리스도교의 구원에서 오는 기쁨과 지상 생활에서 오는 일상의 기쁨…등의 조화와 통합이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의견들이 많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인간적인 가치 위에 비로소 신앙적인 가치가 가능하다는 식으로 이해한다든가, 또는 두 차원을 동떨어진 것으로 분리하여 생각하려는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돈 보스코의 ‘천상 시민’과 ‘지상 시민’은 실제로 먼저도 없고 나중도 없으며, 직선적인 연속성도 없고, 분리 또한 전혀 없다. 돈 보스코 안에서 인간과 신앙인은 근본적인 일체로 존재한다.』[5] 이를 나무에 비유하여 이야기하자면, 한편은 밑으로 자라 뿌리가 되고 또 다른 한편은 위로 자라 줄기가 되는 이치와 같다.(2020년 5월 <살레시오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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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s://www.youtube.com/watch?v=9654d4dwVmw [2] 內田樹, 1950년 일본 도쿄 태생, 50여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문학, 철학, 정치, 문화, 교육 등 분야를 넘나드는 사상가, 교육가, 문화평론가이다. 국내에 출간된 저서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하류지향》, 《스승은 있다》, 《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교사를 춤추게 하라》,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등이 있다. [3] 살레시오 청소년 사목 위원회, 이탈리아어판 「살레시오 청소년 사목」, p.85 – 2020 살레시오 가족 생활지표, 68쪽에서 재인용 [4] 앙헬 페르난데즈, 2020 살레시오 가족 생활지표, 67쪽 [5] 참조. 삐에라 까발리아, ‘돈 보스코의 예방교육’, p.95-96, 2007, 한국천주교살레시오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