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충蟲’이라는 글자는 ‘벌레 충/훼虫’가 여러 마리가 모여 있는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이다. 벌레들이 대개 군집하여 사는 까닭이다. ‘충蟲’이라는 글자를 쉽게 쓰거나 간단하게 쓸 때에 ‘벌레 충/훼虫’라는 글자 하나만 쓰기도 한다. 벌레를 뜻하는 ‘虫’이라는 글자는 공교롭게도 몸 굵기에 비해 머리가 큰 뱀의 형상에서 따왔다. 아직 정교하게 분류체계를 갖지 못했던 고대 중국에서 짐승이나 물고기, 새를 제외한 모든 동물을 벌레라고 칭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만들어진 뱀을 뜻하는 ‘뱀 사蛇’라는 글자에도 ‘벌레 충虫’이 붙어있다.
옛날 중국에서는 땅 위의 것들을 아예 다섯 가지 벌레로 분류했다는 기록도 있다. 포유류 짐승처럼 털이 있는 모충(毛蟲), 새처럼 깃이 있는 우충(羽蟲), 거북이처럼 딱지가 있는 개충(介蟲=갑충甲蟲), 물고기처럼 비늘이 있는 인충(鱗蟲), 그리고 사람처럼 맨몸이 드러나는 나충(裸蟲)이다. 인간은 벌거벗은 벌레 ‘나충’에 속한다.
무릇 ‘虫’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모든 글자가 위에서 말한 넓은 의미의 벌레와 관련된다. 별 상관이 없을 듯이 보이는 ‘바람 풍風’조차도 벌레(虫)가 바람에 날려 다니며, 돛(凡)도 바람을 받아 움직인다는 말에서 형성되었다 한다. 혹자는 태풍 같은 큰바람이 지나간 다음에 병충(蟲)이 많이 번식한다는 뜻을 더하여 ‘바람’을 뜻하는 ‘바람 풍風’이라는 글자가 되었다고 풀기도 한다. 심지어 ‘무지개 홍虹’조차도 무지개를 거대한 뱀이나 용으로 보아서 그렇게 ‘벌레 충虫’을 붙여 썼다 한다. 그래서 어떤 이가 하느님의 네일 아트(손톱 장식)라고 표현한 낭만적인 무지개다리도 ‘홍교虹橋’라고 쓴다.
내가 거주하는 이곳(*글을 쓰던 당시는 미국이었고, 이제는 한국에 돌아와 나름 쾌적한 교외의 주택에 살지만 바로 어제 그제 연이은 이틀 동안 욕실 바닥에서 하나는 크고 다른 하나는 작은 바퀴벌레 두 마리를 만나 살상을 해야만 했다. 이미지 출처-영문 구글) 건물은 1938년도 건물이다. 오래된 건물인 까닭인지는 몰라도 바퀴벌레와 개미, 특별히 설탕 개미라 부르는 아주 조그만 개미들이 어디든지 있다. 그 녀석들은 약을 뿌리고 전문가를 부르며 별짓을 다 해도 며칠만 지나면 어김없이 다시 등장한다. 핵전쟁이 훑고 지나더라도 틀림없이 살아남을 녀석들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바퀴벌레는 한자로 ‘바퀴벌레 장蟑’과 ‘메뚜기 마螞’를 써서 ‘장마蟑螞’라 한다. 그리고 개미는 ‘사마귀 랑/낭螂’과 ‘개미 의蟻’를 써서 ‘낭의螂蟻’라 한다. 하나같이 4글자 모두 ‘벌레 충虫’을 달고 있는 벌레들이다.
자는 동안에 베개나 얼굴 위에 뭔가가 기어 다니고 있다든가, 괜히 몸 어느 곳에 무엇인가가 살금살금 거린다는 착각을 하거나, 괜스레 귓속이 간지러운 것은 왜일까 하는 생각을 달고 살아야 한다든가, 어느 순간 내가 마신 컵의 입이 닿는 가장자리를 어떤 녀석이 기어 다니고 있다든가, 바닥에 엎어져 버둥거리고 있는 메뚜기 같은 녀석을 맨발로 밟는 상상을 하는 것 등등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동생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 사도마저 죽이려던 헤로데가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었다.”(사도 12,23) 하는 것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벌레는 무섭다. 어느 나라에서는 바퀴벌레 튀김을 먹는다고도 하지만, “네 발로 걸으며 날개가 달린 모든 벌레 가운데, 발 위로 다리가 있어 땅에서 뛸 수 있는 것은 먹어도 된다.”(레위기 11,21)라는 말씀에 따라 메뚜기와는 달리 분명히 납작하게 생긴 바퀴벌레는 성서적으로 보아 결코 먹을 음식이 아니다.
“벌레 같은 사람 구더기 같은 인생”(욥기 25,6)이라는 욥의 한탄을 떠올려 보고, “인간이 죽으면 길짐승과 들짐승과 벌레들 차지가 된다.”(집회 10,11)라는 말씀을 떠올려본다 하더라도, 우선 여기 이곳에서 어찌 이들과 공존 공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진정 크나큰 고민이다.(2017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