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축일 중의 축일이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인 부활 대축일을 거행한다. 오늘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기쁘게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이는 우리 주님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고 끔찍한 죽음으로 죽임을 당하셨으며, 무덤에 묻히셨다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죽은 이들의 맏물”이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가 되신 분(참조. 1코린 15,20 콜로 1,18) 안에서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렇다. 예수님은 극단의 “끝까지” 사랑으로만 살았던 당신의 삶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키신 분으로서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죽음을 넘어선 하나의 “새로운 길”, 그 누구도 또 그 무엇도 결코 닫을 수 없는 그 길을 열어주신 분이시다.
부활 시기의 주일 동안 제1독서는 모두 사도행전이다. 초대교회의 삶을 통하여 부활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부활, 승천, 성령강림 대축일을 제외하고 제2독서들은 ‘가’해에 베드로1서, ‘나’해에 요한1서, ‘다’해에 요한묵시록에서 각각 선정된다.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듯이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예수님 부활 사건의 독보적인 목격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 후 40~70년 사이에 상당한 박해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 서간들을 썼다. 부활 제4주일은 일명 ‘착한 목자 주일’로서 어느 해에나 복음은 모두 요한복음 10장에서 취한다.
‘가’ ‘나’ ‘다’해 모두 해의 구별 없이 부활대축일과 하느님의 자비주일은 독서나 복음들이 같다. 부활대축일에는 언제나 요한 20,1-9, 부활 제2주일(부활 8부 주일-하느님의 자비주일)에는 언제나 요한 20,19-31을 낭독한다.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증언을 수록한다. 베드로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면서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분께서 죽었다가 실제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한다. 이어 이제 모든 예언자가 증언한 그분을 믿어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으라고 촉구한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 사도의 믿음의 시작은 오늘 복음에서 빈 무덤을 목격하면서 시작된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음을 상기하면서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자”라고 촉구한다.
1. “주간 첫날…아직도 어두울 때에…마리아 막달레나가”
이제 오늘 전례를 통하여 제4복음서가 전하는 또 다른 관점에서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내용을 듣는다. 오늘 복음은 “주간 첫날”(요한 20,1)이라는 약간 이상하다 싶은 표현으로 시작한다. 제4복음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만물의 창조를 시작하신 창세기의 “첫날”(창세 1,5)을 염두에 두듯이 그렇게 부활 이야기의 첫마디를 기록한다. 이로써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부활이 첫 번째 창조의 완결이자 완전히 새로운 다른 창조임을 밝히려 한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그 물 위를 감돌고 있던 하느님의 영(성령)”(창세 1,2)이 이제 절대 지지 않는 태양의 날, 모든 인간과 피조물에 열리는 영원한 생명의 날의 시작인 예수님의 부활을 주재하신다.
유다의 배반으로 시작된 밤(참조. 요한 13,30),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요한 20,1) 간다. 예수님의 죽음에서 일어난 성취를 알아듣지 못한 마리아의 마음은 아직 절망과 불신의 어둠에 싸여 있다. 마리아는 자기의 스승이 자기에게 일러준 대로 스승의 부활을 아직은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복음서들은 마리아가 스승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발라 드리려고 갔다고 묘사하지만 제4복음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이 마리아가 그렇게도 따랐으며 그렇게도 사랑했던 스승과 도저히 떨어질 수 없어서 무덤에 간 것처럼 그렇게 담담하게 묘사한다. 일찍이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루카 8,2)는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면서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피어난 인생이었다. 예수님께서 막달레나를 보살피셨고, 그녀 안에 담긴 회개의 가능성과 새로운 삶을 신뢰하셨으나, 이제 마리아 막달레나는 모두가 도망가고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예수님이 너무도 안쓰러워 이제 그분의 무덤으로 간다.
그런데 마리아가 무덤에 도착해서 보니 뜻밖에도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라는 사실을 만나게 된다. 너무나도 놀라고 당황한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20,2) 마리아는 당황하여 자기식대로 해석한 바를 사도들에게 그대로 전한다. 여기에서 오늘 복음 대목의 첫째 장면은 끝난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에 뒤이어 이어지는 대목에서 “무덤 밖에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 당신을 계시하실 것이었다.(참조. 요한 20,11-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도 어두울 때에”(요한 20,1) 무덤에 왔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시점이나 시각으로 이를 알아들을 것이 아니라 신비적(의미적)으로 알아들어야만 합니다. 마리아는 무덤에서 육체적으로는 죽은 것으로 여겨진 분, 모든 만물의 창조주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분의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치 주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 간 것으로 생각하기까지 하였습니다.(요한 20,11-15 참조) 진실로, 그녀가 무덤에 왔을 때는 과연 “아직도” 어두울 때였습니다.(성 大그레고리오, AC 540~604년)』
2. “두 사람이 함께 (무덤으로) 달렸는데…”
아무튼 장면이 바뀌어 마리아의 이야기에 이어 두 사도의 이야기가 시작한다. 마리아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요한 20,3-6) “다른 제자”는 먼저 도착하지만, 맏이 격인 형님 베드로가 무덤에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존중하는 뜻으로 기다린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다른 제자”는 애지중지 예수님의 각별한 총애와 사랑을 받았던 제자여서 사랑으로 먼저 도착하고, 또 다른 제자인 시몬 베드로는 사도 공동체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반석”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먼저 무덤에 들어간다.
“두 사람”을 두고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구성원 중에서 유다교에서 개종한 이들, 그리고 “다른 제자”는 이교도 중에서 개종한 이들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베드로는 교회의 사목적인 직무를, 요한은 예언적인 직무를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고, 또한 베드로는 교회의 공식적인 얼굴을 대변하며, 요한은 관상적인 삶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달려갑시다. 서둘러 주님의 무덤으로 뛰어갑시다. 누가 먼저 가는지 고상한 내기를 해 봅시다. 그렇다고 먼저 달리는 자가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덤에 먼저 다다른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고, 들여다본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며, 그 안으로 들어가 보고 믿어야만 이기는 것입니다.(나찌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AC 329/330~389년)』
3. “보고 믿었다”
무덤에 들어간 시몬 베드로가 보니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요한 20,7) 베드로는 그저 상황과 장면을 보았을 뿐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특별한 사건을 신앙 안에서 아직 믿지 못하고 잠시 어리둥절하여 불신의 어둠 속에 남아 있다. 그런데 베드로의 뒤를 따라 무덤에 들어간 “다른 제자”에게 상황은 달랐다. 복음은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기록한다. 금방 우리는 그 제자가 본 것이 무엇이길래 믿게 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렇지만 그 제자가 본 것을 어떤 사물이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계시지 않는다는 상황을 사랑으로 해석한 그 제자에게 그 상황은 이미 또 다른 예수님의 현존으로 계시되었던 것이다.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부재가 사랑의 현존이 되는 순간이다. 예수님과 결속된 사랑 안에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는 자신 안에 놀라운 복음의 공간을 마련한다. 물론 베드로 역시 조금 더 있다가 뒤이어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사도 2,24)라고 선언한다. 이처럼 부활 신앙은 사랑에서 나온다. 오직 예수님을 향한 사랑만이 성경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게 한다. 그리고 ‘빈 무덤’으로부터 출발하여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1코린 15,4)에 이르는 식별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고대 교회의 교부 중 한 분은 『부활의 신비를 아는 이는 하느님께서 태초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을 아는 이가 된다.』라는 말씀을 남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보았고 또 무엇을 믿었는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