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8,1-19,42(주님 수난 성금요일 ‘가’해)

이미 기원전 몇백 년 전에 예언자 즈카르야는 “그들은 나를, 곧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외아들을 잃고 곡하듯이 그를 위하여 곡하고, 맏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그를 위하여 슬피 울 것이다.”(즈카 12,10)라면서 유다의 구원을 예고한다. 오늘 우리들의 묵상과 관상은 즈카르야의 예언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심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과 영광을 드러내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행위이며 생명을 건네는 것이고, 성령을 넘겨주시는 주님의 사랑임을 목격한다. 수치와 모욕의 십자가가 영광과 빛의 십자가가 된다. 이러한 전환은 오늘 우리가 만나는 제4복음서의 수난기에서 아가페요 사랑이기에 가능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사랑은 죽기까지, “끝까지”(요한 13,1) 사랑하여 생명을 건네는 바로 그 사랑이다. 어제의 전례를 통해 우리의 발을 씻겨 주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은 오늘 급기야 당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의 사랑이 된다. 그 어떤 사랑이 되었든 사랑이라는 고귀한 행위 안에는 사랑하는 이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를 잃는 역동성이 담기며, 사랑의 신비가 담긴다. 사랑에는 이처럼 기꺼운 상실과 얻음, 죽음과 부활이 담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실로 사랑이신 하느님(1요한 4,8.16)의 인간 사랑에 대한 봉인이요 인장印章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오늘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도저히 헤아릴 길 없고 표현할 수가 없어서 수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에 비추어 기껏해야 하느님 사랑의 몇몇 조각을 묵상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의식과 태도, 인간의 사고와 언어로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인 하느님을 향한 그분의 믿음과 사랑 안에서 인식되어야만 한다.

1. “모든 일을 아시고…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

오늘 수난기의 장면은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정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 번 모이셨던 곳에서 “예수님께서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는” 상황에서 시작하고(참조. 요한 18, 1-4),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요한 19,28)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상황으로 끝난다. “모든 일”을 “아신” 예수님의 이 앎에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믿음, 고뇌와 식별, 자신과 아버지를 가장 밑바닥에서 만나는 고독의 기도가 담겼다. 소위 ‘예수님의 고별사’라고 알려지는 말씀과 기나긴 기도(요한 13-17장)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루카가 “예수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올리브 산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나가 묵곤 하셨다.”(루카 21,37)라고 알려주는 대로 늘 묵으시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신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함께 온 “군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의 무리를 담대하게 맞으신다. 이제 모든 것을 아신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맞을 준비를 하신 듯이 더는 배반자도, 군인도, 적대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산만함이나 망설임, 슬픔이나 두려움이 없이 거침없이 나아가신다. 예수님 안에는 오로지 아버지의 시선과 뜻만이 충만하며 온전한 자유로 가득하다.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이들에게 “앞으로 나서시며” “누구를 찾느냐?” 물으시고 “나다.”(참조. 탈출 3,14) 하고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며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0) 하신 그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 예수님의 “나”가 곧 하느님의 “나”이다.

하느님 앞에 선 못된 인간들이 늘 그러듯이 “예수님께서 ‘나다.’ 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지고 비틀거리며 엎어)졌다.”(요한 18,6)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피하시거나 물러서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망이나 저항, 다툼도 없이, 오히려 저항하려는 제자를 만류까지 하시면서 거의 스스로 체포를 당하시듯이 자신을 내어주신다. 이 와중에 흥분한 “시몬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상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폭력을 거부하시면서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요한 18,11) 하고 명령하신다. 예수님께서 살아내시는 사랑의 실행에 폭력은 용납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무장해제 하신다. 폭력이 사랑을 고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제자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요한 18,8) 하시는 말씀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제자들에게는 해가 없도록 제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시려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급박한 상황에서조차 당신의 작은 양 떼 중 하나라도 다칠세라 염려하시고 끝까지 책임을 지시는 주님이시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아시고 끝까지 보살피시는 착한 목자이시다.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요한 17,12) 하시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하신 그대로이다. 복음사가 요한은 이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보살피시려고 했다는 사실을 전하려 한다.

2. “나는…드러내놓고 이야기하였다”

“그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장인”인 “한나스”가 “예수님께 그분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요한 18,19) 이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παρρησίᾳ, parresía, 영어로 freedom, openness, especially in speech; boldness, confidence) 이야기하였다.…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요한 18,20-21) 하신다. 솔직하고 담대하게, 파레시아, 어떤 위험이 오더라도 해야 할 말과 진실을 당당히, 공공연하게 사람들 모인 곳에서 말씀하셨다고 하신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는” 폭력을 유발한다. 예수님의 ‘파레시아’는 진실이며, 거짓의 거부이고, 가짜 뉴스와 현실의 왜곡이나 위조를 허락하지 않는다. 사는 대로 말하며 말하는 대로 사는 것이어서 그렇지 못한 이들을 분노하게 한다. 바로 그 예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위험에 빠트리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래서 권위를 지니고, 힘 있는 말씀이 된다. 파레시아는 악을 보고 이를 용납하지 않는 예언자들의 말과 같이 날 선 말이다. 그래서 “너희는…너희 백성의 수장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탈출 22,27) 하는 말처럼 경비병은 예수님의 파레시아를 한나스에 대한 저주로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뺨을 맞으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5) 하시면서 경비병에게 직접적이고도 개인적이며 단순한 말씀으로 “증거를 대 보아라” 하고 대화를 제의하시고 물음을 제기하시면서 여전히 열린 대화와 파레시아를 드러내신다. 사랑은 용감하고 지적知的이며 자유롭고 힘이 있으며 열려있는 말이 된다. 예수님과 경비병의 대화는 우리 삶 안에서 우리가 분노하는 지점을 가리키고, 힘 있는 사랑의 대화를 깊이 있게 전해준다.

3. “목마르다”

십자가 위에서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9,28 시편 69,22;22,16)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셨음에도 그 사실이 예수님의 목마름과 갈증을 없애지는 못하고 있다.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셨음에도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무엇인가가 더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신다. 모든 일이 이루어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더 원하신 것일까?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이를 위해서는 앞서 예수님께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와 계시지 않았던 것이다.”(요한 7,37ㄴ-39) 하신 말씀을 되새겨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하고 베드로를 꾸짖으며 말씀하신 것처럼 십자가 위에서 겪으시는 육신적인 갈증을 넘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셔야만 하는 궁극의 갈증과 순명의 갈증이 예수님께는 아직 남아있다.

예수님의 갈증과 원하심은 당신의 생명을 온전히 내어주시고, 그래서 당신 몸소 당신께 다가오는 세상 모든 이의 갈증을 씻어주는 “생수의 (원천이요) 강”이 되고자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사랑, 모든 이를 위한 사랑이어야만 완수될 사명이고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기에 아직 “목마르다.” 하신다. 기나긴 여정에서 힘들고 지쳐 목이 마른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 하고 청하셨고,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0.14) 하신다. 먼저 마실 물을 청하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물이 솟는 샘”을 약속하시며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갈증을 갖게 하신다.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주님께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게 하시고,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하신 분께서 “옆구리”를 열어 “피와 물이 흘러나오게”(요한 19,34) 하시고, 당신 몸소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되신다.

예수님의 목마름으로 예수님 몸소 “다 이루시고”, 당신을 완전히 봉헌하시어 목마름이 완전히 사라지게 하신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요한 2,17 시편 69,10) 하는 말씀대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열정에 집어삼킴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을 위한 집이 되시고,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요한 4,32.34)이라 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모든 이의 양식이 되시며,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하신 분께서 하느님의 양식이 되시고 세상 생명의 양식이 되시며 우리 생명의 양식이 되신다. 하느님의 인간 사랑은 참으로 하느님의 신비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의 뜻이다. “다 이루시어” “숨을 거두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 “숨을 불어넣으며…‘성령을 받아라.’”(요한 20,23) 하시어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으로 인간이 살게 하시고 세상이 살게 하신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 자체의 표징이며, 사랑으로의 초대이며, 사랑에 관한 계시이다. 아멘!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신구약의 한 분 하느님이신 성삼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제사에서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이 제사들은 하느님의 가장 마음에 드는 선물인 하느님의 외아들께서 자비로이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 제사의 예표였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2) 그리스도는 참된 하느님이시요 참된 사제로서 황소나 염소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를 가지시고 우리를 위해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과거에 해마다 희생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던 그 대사제는 이것을 예시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당신 자신 안에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사제이신 동시에 희생물이시고 하느님이신 동시에 성전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통하여 우리가 화해하게 되는 사제이시고, 우리를 화해시키시는 희생 제물이시며, 우리 화해의 대상이신 하느님이시고, 우리가 그 안에서 회개하게 되는 성전이십니다. 이런 것을 행하신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그것은 종의 신분으로서 하셨기에 그분 홀로 한 사람으로 사제와 희생 제물 그리고 성전 구실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습으로 즉 하느님으로서 행하시는 것은 성부와 성령과 함께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되신 말씀, 곧 하느님이신 외아들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이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 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결코 의심 없이 확고하게 믿어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 성조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사제들은 바로 그분께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희생 제물로서 짐승들을 바쳤습니다. 이제 신약 시대에 와서 거룩한 가톨릭교회는 전 세계를 통하여 신앙과 사랑으로 끊임없이 빵과 포도주의 제물을 바칠 때에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함께 하나이시고 유일한 하느님이신 그분께 바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에서는 우리가 받을 것이 상징적으로 암시되었지만 이제 신약의 제사에서는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이 명확히 나타납니다. 구약의 제사는 경건치 못한 자들을 위해 죽임을 당하실 하느님의 외아들을 예시했고, 이젠 신약의 제사는 사도가 증언한 바와 같이 경건치 못한 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그분을 선포합니다.…(주님 수난 성 금요일 성무일도 독서기도, 제2독서-루스페의 성 풀젠시우스 주교의 글 ‘신앙에 대하여 베드로에게’에서-Cap. 22. 62: CCL 91A,726. 750-751)(*이미지 출처-ilblogdienzobianchi.it)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