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거처로 돌아가라!

보다 조용한 마음을 간직하기 위한 사막 교부들의 세 가지 원칙
현대 사회는 누군가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주의력을 유도하기 위해 투자하는 사회다. 현대 사회가 가히 주의력이 하나의 자산과 자본이 되는 ‘주의력 경제(attention economy)’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주의를 끌기 위해 요동하는 사회는 나를 잠시도 가만히 두지 않으며 요란하고 현란하다. 15세기나 앞서, 이집트의 사막에 살았던 수도자들 역시 오늘날 우리가 겪는 것과 정확히 같은 문제를 포착하였으며 그에 대한 지침을 남겼다.
압바 모세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체구가 크고 힘이 셌던 모세라는 사람은 본래 주인의 집에서 쫓겨난 뒤 도적 떼의 두목이 되어 나일강 일대에서 수많은 범죄와 폭력을 저질렀다. 그는 공권력의 추적을 피해 니트리아(Nitria)라는 사막의 수도원에 숨어들었다가 수도승들의 거룩하고 평화로운 삶에 깊은 감화를 받아 극적인 회심을 하고 수도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지독한 영적 투쟁과 엄격한 금식, 기도를 통해 과거의 사나운 성품을 복종시키며 성숙해졌고, 훗날 사제서품을 받은 뒤 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사막의 대표적인 영적 스승(Abba Moses the Black, AD 330–405년)이 되었다.
모세 교부의 대표적인 일화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진다. 어느 날 수도원에서 죄를 지은 한 형제를 처벌하기 위해 재판하는 모임이 열렸을 때, 모세는 참석을 거부하다가 계속된 요청에 못 이겨 뒤늦게 참석했다. 그는 구멍이 뚫려 모래가 새어 나오는 모래 바구니를 등에 지고 모임에 나타났다. 사람들이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묻자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 “내 허물과 죄가 등 뒤에서 이렇게 새어 나와 내 눈에 보이지 않는데, 내가 어찌 오늘 다른 형제의 죄를 심판하러 갈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수도자들은 깊이 부끄러워하며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었다고 전해진다.(김건중, 사막 교부들의 지혜와 삶, 부크크, 2026년, 193쪽 참조)
압바 모세는 405년경, 베르베르족 침략자들이 그가 머물던 수도원을 습격했을 때, 제자들을 피신시키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칼을 잡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이날을 기다려 왔습니다.” 압바 모세는 ‘완전한 회개’, ‘타인에 대한 비판 금지’, ‘겸손’의 상징적인 교부로서 오늘날 가톨릭, 동방정교회, 성공회 등에서 성인(St. Moses the Black)으로 추앙받고 있다.
너의 거처로 돌아가라
한 젊은 수도자가 압바 모세를 찾아간 이야기다: 「어떤 형제가 스케티스의 모세 원장님께 한 말씀을 해 주십사하고 찾아왔다. 원장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길 “너의 거처로 돌아가서 잠자코 앉아 있어라. 너의 거처가 너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게 될 것이니라.” 하셨다.(앞의 책, 130쪽)」
강도 출신에서 가장 지혜로운 인물 중 한 명이요 영적 스승이 된 압바 모세에게 젊은 수도자가 지혜의 ‘한 말씀’을 청한다. 사막 교부들의 전통에서 ‘말씀’이란 단순히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실천할 준비가 된 이에게 건네는, 수년간의 경험이 압축된 단 한 문장 혹은 단 한 구절을 의미했다.
압바 모세는 고민하는 젊은 수도자에게 “너의 거처로 돌아가서 잠자코 앉아 있어라. 너의 거처가 너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게 될 것이니라.” 하고 말한다. 이에 젊은 수도자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하지만 이 지침은 주의력 결핍 문제를 두고 제시된 가르침 중 가장 혁신적인 것 중 하나이며,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무려 1500년 전에 나온 이야기다.
사막 교부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
4세기와 5세기 이집트 사막의 수도자들이 사막에 정착한 것은 세상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 대부분이 막연하게만 인지하고 있는 인간 마음의 어떤 특성을 명확히 이해했기에 사막으로 갔다. 즉, 외부의 소음은 내부의 소음과 대응하며, 산만함은 주로 환경적 조건이 아니라 영혼의 상태라는 점, 그리고 위치나 관계, 환경을 바꾼다고 해서 영혼이 조용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영혼은 그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있을 때만 비로소 조용해질 수 있다.
사막 영성의 위대한 이론가였던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Evagrius of Pontus, 345~399년)는 방치된 인간의 마음에 찾아와 인간 영혼을 갉아먹는 여덟 가지 무질서한 생각, 즉 ‘로지스모이(logismoi)’의 목록을 정리했다. (*훗날 이는 가톨릭교회의 교리 중 하나인 ‘칠죄종七罪宗’의 모태가 된다) 그 목록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욕구의 영역인 탐식 · 음욕 · 탐욕(물욕), 감정의 영역인 슬픔 · 분노 · 태만(아케디아, acedia, *무기력, 영적 나태, 권태로도 번역), 이성理性의 영역인 허영 · 교만이 그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이것들이 우연히 어쩌다 발생하는 덕성의 결함이 아니라, 정돈되지 않은 마음이 가진 구조적 특성이라는 점을 이해했다. 즉, 예측 가능한 일정에 따라 찾아오는 반복적인 패턴이므로, 특정 실천을 통해 식별하고 이름을 붙여 다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제자인 요한 카시아누스(John Cassian, 360년경~435년경)는 이 전통을 서방 교회로 가져와 『수도 제도 집성(Institutes)』과 『담화집(Conferences)』에 기록했다. 이 문헌들은 누르시아의 베네딕토(Benedict of Nursia, 480~547년)가 수도 규칙을 작성할 때 참조한 자료이자, 그리스도교 영성사에서 가장 실용적이고 유용한 문헌으로 남아 있다. 이 전통에서 도출된 세 가지 원칙은 380년 니트리아 사막의 은수처에서만큼이나 2026년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도 유효하게 적용된다.
1. 지금 있는 곳에 머물라
사막 교부들의 첫 번째 지침이자 가장 직관에 반하는 지침은 압바 모세가 방문객에게 준 가르침, 즉 ‘너의 방에 머물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느끼는 불안감 –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다른 환경에서 다른 일을 하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 – 은 현재 당신이 처한 환경에 대한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에 대한 정보일 뿐이다. 태만(아케디아)의 공격을 받을 때 방에서 탈출하는 수도자는 영적 슬럼프라는 마귀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반면 그 자리에 머무는 이는 ‘한낮(정오正午)의 악령’이 침범하는 오후의 고비가 지나가고, 불안감이 사라지며, 그 너머에서 전혀 다른 무언가를 만날 수 있게 됨을 깨닫는다.
현대 생활에 대한 적용점은 명확하다.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싶고, 새 탭을 열고 싶고, 하던 일을 마치기 전에 다른 일로 전환하고 싶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책상을 정리하고 싶은 충동 – 이 모든 것은 자기 방을 벗어나려는 행위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는 불편함에 대한 반응으로서, 불편함을 해결하기보다는 그저 미루는 것에 불과하며 누적된 비용을 치르게 된다. 정착할 수 있을 만큼 오래 한곳에 머물지 못하는 마음은, 일단 정착했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결코 발견하지 못한다.
사막의 전통이 제안하는 실천법 역시 간단하다.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밀려올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이름을 붙이고, 조금만 더 머무르는 것이다. 무한정 머물라는 뜻이 아니다. 그저 충동이 원하는 것보다 조금만 더 오래 견디라는 의미다.
2. 필요 이상으로 말하지 말라
두 번째 원칙은 말에 관한 것, 특히 우리가 하는 말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사막 교부들은 영구적인 침묵을 옹호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의도적인 말, 즉 해야 할 필요가 있는 말만 하고 그 이상은 하지 않는 것을 지지했다. 사막 교부들의 어록집인 『사막 교부들의 언행록(Apophthegmata Patrum)』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인물 중 한 명인 압바 포이멘(Abba Poemen, 340년경~450년)은 이렇게 말한다. “겉으로는 침묵하는 것 같으나 마음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항상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 중 무엇이 더 낫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말하는 자도 잘하는 것이요, 하느님을 사랑하여 침묵하는 자 또한 그러하다.”(앞의 책, 178쪽)
말에 대한 사막 교부들의 이해는 도덕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주의력’에 관한 것이었다. 불필요한 말 – 험담, 불평, 자신의 경험에 대한 습관적인 중계, 모든 것에 대한 끝없는 평가 – 은 방을 벗어나는 행위가 주의력을 산만하게 만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주의력을 흩뜨린다. 그것은 내면의 것을 충분히 검토하고 이해하여 정돈된 상태로 성숙하기도 전에, 그저 소음에 불과한 상태로 외부에 쏟아내 버리는 행위다.
현대적 맥락에서 보자면, 2026년 9월 초에 발표된 피우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53%가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너무 길다고 느끼며, 그 시간을 소비하는 주된 활동은 불필요한 말의 현대적 형태인 소셜 미디어인 것으로 나타났다.
말을 하거나, 글을 올리거나, 메시지를 보내기 전에 그것이 정말 ‘필요한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해로운지 아닌지가 기준이 아니다. 애초에 ‘필요한가’를 따져보라는 뜻이다. 그 기준은 우리 대부분이 적용하는 기준보다 훨씬 높으며, 이를 적용한 결과는 자못 놀라울 것이다. 어쩌면 결국에는 소셜 미디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3. 서둘러 열매를 맺으려 하지 말라
세 번째 원칙은 측정 가능한 성과를 중심으로 조직된 현대 문화에 전달하기가 가장 어렵다. 사막 교부들은 내면의 변화라는 작업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그 자체의 일정대로 진행되고, 기술이나 노력으로 가속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아바 요한 콜로보스(Abba John the Dwarf, 작은 요한, 339년경~405년경 *‘Kolobos’는 그리스어로 ‘난쟁이’ 혹은 ‘작은 자’라는 뜻으로, 그의 왜소한 체구에서 유래한 별명이다)는 한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사람은 모든 것을 조금씩 가지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약간의 겸손, 약간의 단식, 약간의 침묵, 약간의 철야, 그리고 약간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바람이 모든 방향에서 한꺼번에 불면 나무에서 열매가 떨어지지만, 공기가 평온하고 정지해 있으면 열매는 가지에서 서서히 익어갑니다.”
열매를 강제로 익히려 한다고 해서 익는 것이 아니다. 열매를 익히는 것은 극적인 결단이나 집약적인 수도, 혹은 삶의 근본적인 개혁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규율을 시간을 두고 조용히 반복함으로써 쌓이는 평온함이다. 이는 수동성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적인 접근 방식이며, 오랜 경험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전통의 지혜이자 인내에 대한 조언이다.
베네딕토회 전통은 이러한 통찰을 ‘정주(定住, stabilitas)’ 개념으로 정형화했다. 정주란 한 공동체와 장소, 그리고 실천 안에 머물면서 그것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다리겠다는 서원이다. 공동체 사이를, 실천법 사이를, 영적 스승 사이를 끊임없이 옮겨 다니는 수도자는 열매가 익을 만큼 오래 머물지 못한다. 더 조용하고 더 집중된 내면의 삶을 구축하려는 모든 이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실천은 평범하고 매일 이루어져야 하며 지속되어야 한다. 그 결과는 완만하게 나타날 것이며, 어느 날 문득 그곳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D. R. Esparza라는 분이 2026년 9월 19일자로 aleteia.org에 <The desert fathers’ three rules for a quieter mind>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을 바탕으로 쓰게 되었으며 첨가한 내용이 있다. 사막 교부들의 말씀 인용은 역자의 저술에서 따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