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함

무례함은 말투와 몸짓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뿔을 쳐들고 고개를 치켜들며(시편 75,6 참조), 때에 맞지 않는 말을 끝없이 지껄이는 무지입니다(집회 20,19 참조). 식탁 위 빵 위에 팔꿈치를 올리듯 선을 넘고(집회 41,19 참조), 제 이익만 추구하며 성을 내고 앙심을 품습니다(1코린 13,5 참조).
무례함은 퉁명스럽고 빈정거리며 냉소적입니다. 말없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불쾌하고 불편하게 만듭니다. 나를 순식간에 압도하여 휩싸이게 하고, 타인을 무시하며 깎아내리고 비웃습니다. 때로는 웃자고 한 말이라며 농담의 탈을 쓰고 다가오지만, 그 본질은 잘난 체하는 우쭐거림과 공격성입니다. 남의 말을 엿듣고 비판만 뱉어내며, 모두를 가르치려 듭니다.
무례함은 양보와 배려의 반대말입니다. 무례함은 돌아서서 가슴을 치는 자책이 되며, 자기 발밑을 굴삭기로 파내어 스스로 거꾸러지게 만듭니다. 결국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을 짓고, 또 다른 무례함을 낳을 뿐입니다.
그러나 무례함의 뿌리는 의외로 약함에 있습니다. 결여된 자신감의 다른 얼굴이며, 열등감과 불안이 두른 상처 입은 자아의 갑옷입니다. 공감 능력이 결핍된 까닭에 자신의 불안을 타인에게 떠넘기고, 자신보다 약한 이를 통제하고 지배하려 듭니다. “저 사람은 당해도 싸다”는 정당화 속에서 권력의 역학 관계를 이용해 타인을 무상으로 점유하고, 그 마음을 몇 번이고 곱씹게 만들며 상처를 줍니다. 존중받고 공정하게 대우받으려는 인간의 원초적 욕구를 흔듭니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피로, 또는 오랜 나쁜 습관 때문에 스스로 무례하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무례함 앞에는 온유함과 배려로 맞서야 합니다. 망신을 주거나 이기려 들지 않고, 조용히 자비를 베풀며 논쟁을 더디게 하는 절제와 겸손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입니다.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이 《대학의 개념》에서 제시한 ‘신사(Gentleman)’의 모습처럼, 참으로 품위 있는 사람은 결코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며 망신 주는 일을 피합니다. 오히려 무례한 사람조차 그 앞에서 편안함과 의연함을 느끼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무례함에 친절로 답하면서도 내면의 품위를 지키는 길입니다.
무례함에 친절로 대하는 이는 삶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상대가 친절해야 나도 친절하겠다거나 받은 대로 되돌려주겠다는 태도는, 타인에게 내 마음의 주인 자리를 내어주는 어리석음입니다.
나는 반응하는 자가 아니라, 은총 안에서 주도하는 사람입니다. 매일 한결같이 친절하고 예의 바르며 인내하기를 훈련합니다. 반응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감정을 가다듬습니다. 그리고 타인과 타인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로서의 사명을 떠올리며 뉴먼 추기경의 기도를 되뇝니다.
“저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저는 사슬의 한 고리이며,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쓸모없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선을 행할 것이며, 그분의 일을 할 것입니다.”
무례함은 나를 시험하지만, 친절은 나를 자유롭게 합니다. 무례함은 상처를 남기지만, 용서는 그 상처를 은총으로 바꿉니다. 무례함은 또 다른 무례함을 낳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악순환을 끊어냅니다. 그러므로 무례함을 만나는 일은 불행이 아니라 은총을 연습하는 시간이며, 용서를 배우는 자리이자,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또 하나의 거룩한 기회입니다.



첼레스티노
오늘 하루 제 자신을 가다듬게 하는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