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의 칠죄종이 지옥에는 없다?

13세기 단테의 <신곡> 3부작(지옥·연옥·천국) 중 연옥편에서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식탐, 색욕이라고 하는 7가지 죄(칠죄종七罪宗)는 정화의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이 일곱 가지 죄가 연옥과 지옥에서 동일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듯이 보인다. 연옥에서는 이 죄들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지옥에서는 일부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1. 연옥: 죄를 정화하며 변화되는 자리
“죄는 단순한 법의 위반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화해와 참회 Reconciliatio et Paenitentia)라는 말씀에 따를 때, 연옥은 하느님과 이웃과 관계를 회복하는 자리이다. 반면 지옥은 그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이다. 연옥은 아직 ‘죄를 인식할 수 있는 상태’이다.
연옥은 ‘정화의 장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정확히 인식하고 바로잡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연옥의 일곱 층 산은 칠죄종을 정화한다. 단테가 서술한 칠죄종의 순서와 내용은 1층부터 다음과 같다: 교만 → 타인을 존중하지 않음, 자신을 낮추는 훈련(돌을 짊어짐) / 시기 → 타인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함(눈이 꿰매짐) / 분노 →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타인을 해침(매캐한 연기 속 방황) / 나태 → 더 사랑하지 못함(끊임없는 뛰고 달리기) / 탐욕 → 베풂과 나눔이 없음(엎어져 있음) / 식탐 → 절제와 자제 없이 배(腹)를 섬김(기갈과 굶주림) / 색욕 → 정결하지 못함(뜨거운 불에 휩싸임)
단테는 이러한 순서를 따른 이유를 연옥편 제17곡에서 밝힌다. 단테는 모든 죄가 ‘사랑’의 왜곡에서 비롯된다는 전제 아래 1~3층에 가장 무거운 죄들, 곧 타인을 해치는 잘못된 사랑인 교만 → 시기 → 분노의 순서로 배열한다. 위도 아래도 아닌 중간층인 4층에는 사랑의 결핍인 나태를 놓았고, 이어서 과도하거나 잘못된 방향을 가진 사랑인 탐욕 → 식탐 → 색욕 순으로 배치하였다.
이때 교만이 맨 아래인 이유는 단테에게 교만이 단순한 성격 결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만은 하느님 없이도 스스로 완전하다고 여기면서 타인을 짓밟고 자신을 높이려는 태도로 모든 죄의 뿌리가 된다. “교만은 모든 죄의 시작이다.(성 토마스 아퀴나스, Summa Theologiae, II-II, q.162)”는 말처럼 교만은 가장 먼저, 가장 깊이 정화해야 할 죄이다. 색욕이 가장 가벼운 죄인 듯 맨 위인 까닭은 단테가 단지 이성의 통제를 잃었을 뿐 사랑 자체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하였고, 왜곡되었으나 ‘사랑의 방향’은 남아 있는 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 안에서 가장 가벼운 듯 보이고 정화도 쉽다고 여기는 바로 그 부분을 악마가 집요하게 파고든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단테의 연옥에 그려진 칠층산은 처벌이 아니라 치유의 과정이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을 벌하기보다 변화하기를 바라신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모두가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신다.”(2베드 3,9)는 말씀처럼 연옥은 ‘회개의 가능성’이 아직 살아 있는 자리이다.
2. 지옥: 죄가 굳어버린 상태
관계의 단절이다. 교회는 지옥을 “하느님과의 영원한 분리”라고 가르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35항) 연옥이 사랑의 방향을 바로잡는 과정이라면, 지옥은 사랑이 완전히 왜곡되거나 소멸된 상태이다. 지옥은 ‘죄와 동일해진 상태’이다.
지옥은 연옥과 전혀 다르다. 지옥에도 욕망 통제의 실패인 색욕(제2원), 식탐(제3원), 탐욕(제4원), 분노(제5원)가 지옥의 상층부에 등장한다. 그러나 교만, 시기, 나태는 독립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죄들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더 깊어져 다른 죄들 안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이다. 단테에게 교만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단과 배신으로 이어지고, 시기는 타인을 파괴하는 폭력과 사기로 구체화 되며, 나태는 ‘선에 대한 무기력’으로 이해되며, 이는 제5원의 ‘우울한 이들’ 안에서 부분적으로 형상화된다. 지옥에서는 죄가 더 이상 어떤 ‘성향’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지배하는 상태가 된다. 변화는 없고 회개의 가능성도 사라진다.
진리에 대한 교만인 이단은 제6원에 자리하고, 신적 질서에 대한 궁극적 반역인 배신은 제9원에 자리한다. 이렇게 교만은 단순한 죄가 아니라 지옥 전체의 최심부를 지배하는 원리가 되어있다. 시기는 독립적으로 다뤄지지는 않으나 제7원에 자리 잡은 폭력, 제8원에 자리 잡은 사기(특히 이간질)의 행위 안에서 더욱 급진적인 형태로 사회적 파괴 형태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나태는 제5원에 그려지는 스틱스 늪의 ‘우울한 자’로서 행동의 부재가 아니라 선에 대한 의지의 마비 상태가 된다.
참고로, 색욕은 지옥에서 감정에 휩쓸린 삶을 상징하듯 끝없이 휘몰아치는 폭풍우에 영혼이 시달리는 상태이고, 식탐은 더럽고도 차가운 비가 계속 내리는 중에 진흙 속에 뒹구는 짐승과도 같은 삶으로 묘사되며, 탐욕은 축적과 낭비라는 양극단이 왜 쌓았는가, 왜 탕진했는가를 외치며 무거운 돌을 서로 무의미하게 밀어대며 충돌하는 모습으로, 분노는 격렬한 분노가 서로를 물어뜯고, 억눌린 분노가 물속에 잠겨서 스틱스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형상으로 갈리어 각각 드러난다.
영혼의 불멸을 부정한 이단(제6원)은 불타는 무덤 속에 갇힌 영원한 죽음의 상태이고, 생명과 질서를 파괴한 폭력(제7원)은 세 구역으로 나뉘는데, 타인에 대한 폭력을 일삼은 자들은 피의 강에 잠기고, 자신에 대해 폭력을 행사한 이들(특히 자살자)은 나무로 변하며, 하느님과 자연에 폭력을 가한 이들은 불비가 내리는 사막에 있는 모습이 된다. 복잡하고 다양하게 이성을 악용한 사기詐欺(제8원)꾼들은 10개의 도랑에서 각기 다른 형별(예. 아첨꾼들은 오물 속에서, 점쟁이들은 머리가 돌아간 모습으로, 도둑들은 뱀과 몸을 공유하며 … )을 받는다. 사랑이 완전히 식어버려 고립된 배신(제9원)은 얼음 속에 갇히고, 루치페르는 세 개의 입으로 배신자들을 씹어댄다.
3. 우리의 자리
나는 지금 연옥의 상태에 있는가 아니면 지옥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죄를 인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정당화하고 있는가, 변화하려 하는가 아니면 굳어지고 있는가?
단테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죄를 대하는 태도이다. 아직 우리는 살아 있다. 아직은 연옥의 시간이다. 아직 돌이킬 수 있다.
연옥은 “지금이라도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하는데, 지옥은 “이미 선택은 끝났다.”라고 소리 지른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두 소리 사이에 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