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는 오늘 전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산상설교’(마태 5,1-7,27) 중 첫 부분 ‘참행복’에 관한 묵상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오늘 복음은 연중 제4주일 ‘가’해나 ‘모든 성인 대축일’ 미사에서도 같은 대목을 취한다.
※참조. 엔조 비앙키, 모든 성인 대축일(마태 5,1-12ㄴ): http://benjikim.com/?p=15885 / 교황 프란치스코, 모든 성인 대축일(11월 1일): http://benjikim.com/?p=6731 *오늘 강해의 뒷부분에 이완희 신부의 <위령의 날>에 관한 유래와 해설이 있음
1. “산으로 오르셨다…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마태 5,1-2)라는 구절로 복음은 시작한다. “산”은 하느님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정체를 밝히실 때 산 위에서 하시고(참조. 마태 17,1),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전도 사명을 주실 때에도(참조. 마태 28,16) 산 위에서 하신다. 마태오의 산상설교와 같은 내용은 루카 6,20-49에도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루카 6,17)라는 도입구로 시작하므로 산상설교와 대비하여 ‘평지설교’라 한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한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서 이 ‘참행복’은 어떤 면에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회자하는 것처럼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무성한 사회, 힘 있고 가진 자들을 위한 소위 법치 아닌 법치 사회, 부富를 중시하는 사회, 폭력과 권력이 결탁하는 사회와 같은 사회적·문화적 배경을 안고 말씀하셨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행복들”이 어떤 면에서는 스캔들(물의를 빚는 사실이나 내용)이라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선언하신 그 내용을 오롯이 몸으로 살아내셨다는 점에서, 곧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하신 분이라는 점에서, ‘참행복’은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 선포이자 “십자가라는 걸림돌”(갈라 5,11)에 관한 말씀이다. 그런 면에서 이 ‘참행복’을 두고 혹자는 ‘예수님의 초상화’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예수님께서는 과연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가난하신 분, 슬퍼하시는 분, 온유하신 분. 주리고 목마르신 분, 자비로우신 분, 깨끗하신 분, 평화를 이루시는 분, 박해를 받으시는 분, 모욕을 당하시는 분이시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결정적인 선택 앞에 설 수밖에 없게 된다.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하나의 이상향으로 여기든지, 아니면 이 복음 내용을 제대로 살아내야 한다고 여기든지 하는 두 선택 사이에서의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이 복음 앞에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을 따르면서 우리의 믿음은 어찌 되어야 할 것인가, 또 복음을 제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기쁨과 행복은 도대체 무엇인가, 실로 우리가 어떤 인간이고 어떤 존재인가를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이 내 삶의 의미, 정확한 방향성, 삶의 가치, 살아가는 이유, 생명을 내어놓는 것 등에서 온다는 것을 잘 안다. 참행복은 우리에게 이러한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면서 인간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2. “행복하여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온전한 통교를 향해 나아가는 태도, 그러한 지향을 마음에 지니고 삶의 양식을 온전하게 취하는 태도를 지닐 수 있을 때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몸소 그렇게 말하는 대로 사는 사람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는 대로 말하고 말하는 대로 사는 분으로서 그렇게 선언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행복하여라(마카리오이, μακάριοι, makarioi)”라는 말이 서두에 후렴처럼 여덟 번 되풀이 되고, 이어서 ‘(이러저러한) 사람들’이라는 내용이 이어지며, 그에 따른 예수님의 약속이라는 형식으로 일정하게 반복되는 구조적 틀을 갖춘다.
‘마카리오이’라는 말의 어근인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는 영어로 blessed, happy 등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본래 신들에게만 유보된 단어다. 복되다고 칭송되는 여덟 가지 태도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과 행복에 참여하고,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하게 된다. 하느님은 새로운 방식으로 살 줄 아는 인간에게서 드러난다. 인간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요,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임을 증명하는 여덟 가지 태도(안셀름 그륀, 예수-구원의 스승, 분도, 2008년 3쇄, 49쪽)』가 밝혀진다.
“마음(영)이 가난한 사람”(마태 5,3), 그리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마태 5,8)은 물질적인 재화와의 연관을 논하기 전에 현실에 급급한 처지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물질적인 재화나 풍요와 관련하여서만 이 구절을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영으로 가난하고 마음으로 순수하다는 것은 현실이 현실인 만큼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이고,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굴욕적인 상황마저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임을 뜻한다. 그런 이들은 겸손하여 쉽게 눈에 띄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있어 누구나 금방 알아볼 수 있다. 고통에 익숙해서 타인의 고통을 금방 이해하는 사람이며,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려 하지 않아도 자신이 도움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있겠지 하는 면에서 낙관주의자들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 일찍 일어나야 하는 사람, 꾸준히 인내하며 노력하는 사람이다.
믿을 곳이 그 어디에도 없고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가 너무도 커서 하느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 아버지만을 바라보고 그분이 도와주심을 믿어 희망이 헛되지 않음을 매일 발견하는 사람이다. 자기의 힘보다 더 큰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 때로 슬프고 막막해도 그런 상황이 자신을 더 나은 상황으로 이끌 수 있음을 배우는 사람이다. 하느님 없이 사는 이는 누구나 “가난”하다. 혼자이면 실패이지만 하느님과 함께이면 성공임을 믿는 사람, 때때로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도 그것이 성공임을 믿는 사람, 그저 ‘그분의 뜻’을 믿는 사람, 하느님의 지혜를 얻는 사람, 하느님께서 자기 편이시니 그 무엇도 잃을 것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평온한 마음으로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가난을 즐거워하는 것은 큰 지혜니, 가난하여 부족함을 즐기는 것은 하늘로 날아가는 날개다. 성경이 말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이미 하늘 나라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가난을 즐거워하는 것은 가난한 것이 아니다. 몸이 가난하고 마음 또한 가난해야 가난은 덕이 된다. 몸은 가난한데 마음은 욕심 사나우면 가난은 덕이 아니라 근심이 된다. 이렇게 가난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짜 가난한 것이 아니라, 단지 거짓으로 가난을 꾸몄으나 실상은 탐욕스럽고 인색하다.(판토하, 칠극-해탐 3-30, 정민 옮김, 김영사, 2021, 241-242쪽)』
“슬퍼하는 사람”(마태 5,4)은 울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심리적이나 감정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자신과 다른 이의 비참함과 가련함에 마음을 다쳐 눈물이 터져 나오는 사람이다. “온유한 사람”(마태 5,5)은 어떤 형태의 폭력이라도 포기하는 연습을 하는 사람이다. 사실 최악의 공격성과 치명적인 증오는 거짓된 온유와 가식적인 미소 뒤에 숨어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마태 5,6), 그리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마태 5,10)은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로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으려 하는 이들이다. “자비로운 사람”(마태 5,7), 그리고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9)은 행동과 태도에서 다른 이가 나에게 가해오는 악을 잊고 용서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예수님) 때문에 모욕받고 박해받으며 거짓으로 사악한 말을 듣는 이”(마태 5,11)는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요한 15,20)이라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우리 인생이 진정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밝혀주는 구체적 증거를 지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3.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ㄱ)라는 구절로 마감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러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 이러한 태도를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하느님다운 행동과 모습이 자신의 것이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며 진정으로 참행복을 체험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심오하고도 값진 기쁨, 주님과의 친교에서 솟구치는 기쁨, 절대 빼앗기지 않을 기쁨을 누린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하늘 나라를 차지한 사람, 하느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는 사람, 진정 흡족한 사람, 자비를 입은 사람, 하느님을 보는 사람,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는 사람,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큰 사람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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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일 복음은 이른바 ‘산상설교’라고 알려지는 대목에서 신약성경의 대헌장 격인 참행복에 관해 묵상하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끌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원의를 드러내십니다. 이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과 가까이 계시고 그들을 그렇게 대하는 자들에게서 구해내시리라고 말하는 예언자들의 설교에 이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설교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행복하여라” 하시는 말씀, “행복”으로 말씀을 시작하시고,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 행복의 조건들을 계속 가리키시며, 약속으로 끝맺으시는 형식을 취하십니다.
복, 곧 행복은, “마음이 가난”하고 “슬프고”, “의로움에 주리고”, “박해를 받고”… 하는 조건들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뒤이어 말씀하시는 약속, 하느님의 선물을 환영하는 그 안에 행복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에 자신을 열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세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어려움을 무릅쓰는 것에서 행복은 시작합니다. 이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저절로 행복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삶의 방식입니다. 고난과 역경의 현실을 새로운 전망으로 보게 되면서 뒤따르는 회심으로 체험하게 되는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선물과 은총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회심을 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늘 저는) “행복하여라, 마음(영)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하는 첫 번째 행복에 머무르겠습니다. 마음(영)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처한 처지에 반항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은총에 마음을 열어 겸손하고 온유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진정) 가난한 사람들의 감정이나 태도를 지닌 사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행복, 영으로 가난한 사람의 행복에는 부富와 하느님이라는 두 차원이 있습니다.
부富, 소유, 물질적 풍요를 두고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굳이 희생을 무릅써야 한다는 것은 아닐지라도, 본질적인 것에 충실하면서 나눌 수 있는가 없는가에 관한 능력의 문제입니다. 곧, 매일매일 새로운 상품들의 매력에 현혹되어 탐욕스러운 소비에 나도 모르게 짓눌리지 않으려는 능력 말입니다. 무엇인가를 더 가지게 되면서 더 원하게 되는 것이 탐욕스러운 소비입니다. 이는 영혼을 죽입니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 이런 식의 태도를 지니게 되면 행복하지 않으며 행복을 얻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이라는 차원을 생각하면 세상이 축복이며 그 기원이 아버지의 창조적인 사랑임을 인정하고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주권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위대하신 분이시며 주님이심을 알아 모시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누군가가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진정 위대하신 분은 온 인류를 위하여 세상을 원하시고 그 세상에서 인간 하나하나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이나 물질적 부富에 의존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의 말을) 존경으로 들어(경청) 기꺼이 다른 이의 결정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나 공동체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분열이나 불화, 그리고 적대감이 더 줄어들 것입니다. 겸손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복음적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은 소유보다는 나눔을 추구하는 형제적인 공동체의 씨앗으로서 하느님 나라라는 목표를 흘낏 이라도 보여 주면서 이를 계속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소유보다는 나눔이라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마음과 손은 닫혀 있지 않고 항상 열려있습니다. 마음(심장)이 닫히면 마음(심장)이 수축합니다. 그런 마음은 사랑할 줄 모릅니다. 마음이 열리면 사랑의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모델이시자 첫 열매이신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응하셨으니 우리가 풍요로운 자비의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은총으로, 특별히 그분의 용서로 가득하기를 빕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7년 1월 29일 삼종기도 훈화, 영문에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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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의 날(11월 2일) – 이완희 신부: 위령의 날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례력 안에서 모든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로 추사이망첨례(追思已亡瞻禮)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통상 11월 2일에 거행하며 만약 11월 2일이 주일이라면 11월 3일로 옮겨 거행하기도 한다. 이날은 무엇보다도 아직 연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영혼들이 빨리 정화되어 복된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한마음으로 기도하며 그들을 위한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날이다.
비잔틴 전례를 거행하는 동방교회에서는 성령강림 전 토요일과 칠순절 전 토요일을 각각 위령의 날로 지내며 아르메니아 전례는 부활절 다음 월요일을 위령의 날로 지낸다. 고대 로마의 관습에는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한 기념행사가 있었다. 특히 기일에 무덤에 모여 죽은 이를 추도하며 헌주를 하고 음복을 나누는 것은 대중적인 일이었다. 시이저 시대까지 일 년의 마지막 날로 여겨졌던 2월, 즉 2월 13일부터 22일 사이에 가족 중에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념하는 위령제(Parentalia)를 지냈으며 2월 마지막 날인 22일에는 죽은 이들의 가족들이 모여 함께 음식을 나누며 죽은 이를 추모하는 가족행사(Cara cognatio)를 거행하였다.
이러한 관습을 받아들여 로마교회는 4세기부터 베드로 좌에 모였고 베드로를 추모하였다. 이날이 오늘날까지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 남아있다. 초대 교회는 로마의 이러한 이교 관습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하여 수용하였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세례로 시작된 부활을 향한 파스카 여정의 완성으로 여겼으므로 찬미와 감사의 마음으로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미사도 봉헌하였다.
교회가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위령의 날이 공식 전례 축일로 선포된 것은 상당히 후대의 일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전래 이전에 이교도들의 위령의 날에 행해졌던 죽은 이들을 향한 미신적인 관습이 상당 기간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중세 초기에 수도원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수도자들을 기억하던 관습에서 시작되었고 이를 지역 교회가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위령의 날이 전례 안에 등장하게 된다.
세비야(Sevilla)의 이시도로(Isidorus +636) 시대에 스페인에서는 성령강림 후 월요일을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날로 지냈다. 그러나 998년에 이르러 클뤼니 수도원의 5대 원장이었던 오딜로(Odilo +1048)는 자기의 관할 밑에 있는 모든 수도자에게 모든 성인의 날(11월 1일) 다음 날인 11월 2일에 죽은 이를 위해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성무일도를 노래할 것을 명함으로써 위령의 날이 11월 2일로 정해지게 되었고 이것이 서방교회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1월 1일(모든 성인의 날)은 하느님 나라를 완성한 성인들을 기념하는 축제의 성격이 강하다면 그다음 날인 위령의 날(11월 2일)은 연옥영혼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모든 성인의 날과 위령의 날은 살아있는 이들에게 삶과 죽음을 묵상하게 하는 기회를 주며 특히 전례력으로 연중 마지막 시기인 11월에 자리잡음으로써 종말에 성취될 구원을 미리 묵상하게 하는 날이라 하겠다.
위령의 날에 모든 사제는 3대의 위령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이 특전은 15세기의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고 1748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에 의해 이 특전이 승인됨으로써 스페인, 포르투갈, 남미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많은 전사자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하여 모든 사제에게 이 특전을 주었다. 그러나 3대의 미사 중에서 첫째 미사 하나만 미사 예물을 받을 수 있으며, 둘째 미사는 모든 영혼을 위하여, 셋째 미사는 교황의 지향에 맞춰 봉헌하여야 한다.
중세를 거치면서 위령의 날과 관련된 많은 전설이 생겨났다. 위령의 날에 이미 죽은 이들이, 살아 있을 때 자기에게 나쁘게 대했던 사람들 앞에 도깨비불, 두꺼비, 마녀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전설이 대표적인 것이다. 또한 이 위령의 날에 연옥 영혼을 위한 미사가 많이 봉헌되었으며 특별한 음식을 먹거나 특별한 놀이를 하는 등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풍습이 전해진다. 오늘날까지 서구의 많은 본당이 묘지까지의 행진을 하고 친지들의 무덤을 방문하여 꽃과 초를 선물하는 등의 관습을 보존하고 있다.
*참고문헌: A.Cornides, All souls’ day 1, p.319 / P. Jounel, Le culte des saints pri re 4, Paris, 1983, pp.124-145/ D.Borobio(ed.), Ritmos y tiempos la Iglesia> 3, Salamanca, 1990 / F.Sottocornola, La celebrazione cristiana della morte 2, pp.420-428, Brescia 1984
미사를 마치며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합니다.
산상수훈.
기쁨과 참행복을 향하여
실천하는 하루 하루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한 복음 관련 설명에서
약간 좀 의아했던 부분이 풀렸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