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 시대의 신앙

Abstract brain hologram on blue background. Artificial intelligence and circuit concept. 3D Rendering

2025년 8월 말, 타임지(Time)가 <AI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100 Most Influential People in AI)>을 발표했을 때, 그 이름들은 예상 가능했다. OpenAI의 샘 알트만, NVIDIA의 젠슨 황, xAI의 일론 머스크. 이 목록은 알고리즘을 구축하고, 스타트업에 자금을 지원하며, 기술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CEO, 연구원, 기업가, 정책 입안자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이 익숙한 명단 한가운데에 놀라운 이름이 등장했다. 바로 교황 레오 14세였다. 그분의 권위가 특허나 자본이 아닌 기도와 도덕적 증언에서 나오는 분이 실리콘 밸리의 거장들 옆에 자리했다. 언뜻 보기에는 이 조합이 거의 부조리하게 보일 수 있다. 영혼의 목자가 신경망이나 기계 학습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러나 이 놀라움이 바로 핵심이다. 교황의 포함은 형식적인 제스처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적 이정표이다. 즉, 첨단 코드와 자본의 영역에서조차 세상은 더 깊은 무언가가 위태롭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AI 설계자들은 그들의 모든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기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고, 사랑하고, 사는 방식을 바꿀 현실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알고리즘을 프로그래밍하여 말을 흉내 내거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능력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What is all this power for?)”라는 가장 오래된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면상 아무리 특이하게 보일지라도, 교황은 기술자들 사이에 있어야 마땅하다. 그의 존재는 AI의 미래가 기술적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도덕적이고 영적인 문제임을 상기시켜 준다.

AI 100: 세속적인 권력의 시성諡聖?

교황의 포함이 왜 중요한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순간의 규모와 정도를 파악해야 한다. 인공지능은 단순한 또 다른 혁신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상 가장 빠르게 채택된 기술이다. 전기가 확산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고, 인터넷은 몇 년이 걸렸지만, 생성형 AI는 불과 몇 달 만에 수억 명의 사용자에게 도달했다. 이것이 다른 이유는 속도뿐 아니라 친밀성 때문이다. 기술이라는 것이 역사상 처음으로 섬뜩할 정도로 인간적인 방식으로 우리와 상호 작용할 수 있다. 대규모 언어 모델은 단순히 계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고, 예측하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며, 심지어 설득하기까지 한다. 그것들은 의식은 없지만, 방대한 데이터와 확률에 의존하여 불안할 정도로 유창하게 동료 관계를 시뮬레이션한다. 과거의 기술이 우리의 근육이나 기억력을 확장했다면, AI는 사고와 관계 자체의 구조 속으로 파고든다.

이것이 AI 100인 목록의 이름들이 중요한 이유이다. 목록에 오른 이들은 단순히 도구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경제, 정치, 문화, 심지어 전쟁까지 재편할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AI는 이미 진실이 인식되는 방식, 교육이 제공되는 방식, 공동체가 형성되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또 다른 혁신의 물결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 아래에서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판이다. 이것이 교황의 존재가 상징 이상인 이유이다. 이는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 단순히 기술적이거나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문명적인 문제임을 시사한다. 우리의 눈앞에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고 있으며, 질문은 더 이상 누가 그것을 만들 것인가에 국한되지 않고 누가 그것을 인도할 것인가로 바뀐다.

교황이 왜? AI 분야에 뛰어든 바티칸

언뜻 보기에 교황은 AI의 가장 강력한 인물 목록에 등장할 마지막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연구소를 운영하거나 벤처 캐피털을 지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우연이 아니다. 이는 교회와 인공지능의 떠오르는 세계 사이의 수년간의 의도적인 관여를 반영한다.

2019년, 바티칸은 IBM과 마이크로소프트가 서명한 <로마 AI 윤리 촉구(Rome Call for AI Ethics)>를 발표했다. 이는 AI가 투명하고, 포용적이며, 항상 인간 존엄성의 이익에 봉사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도덕적 틀이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모든 코드 한 줄이 도덕적 무게를 지닌다는 것을 엔지니어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알고리즘’과 ‘윤리’를 결합한 용어인 <알고리듬 윤리(algorethics)>의 사용을 받아들였다. 그 이후로 바티칸은 과학자, 철학자, 기업 리더들을 모아 AI에 관한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교황 레오는 반복해서 경고했다. 알고리즘이 감시의 도구, 편향의 엔진, 또는 인간됨의 대용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이것이 엔지니어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조차도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깊이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는 모델을 최적화할 수는 있지만, 가장 직접적인 도덕적 질문인 “이 모든 능력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기술자들이 설교를 작성하고, 학생들에게 등급을 매기거나, 무기를 유도하는 시스템을 설계할 수는 있지만, 그 시스템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알려줄 수는 없다. 화려한 시연 아래에는 불안감이 있다. AI의 결과가 그 누구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힘이라는 인식이다.

이것이 교황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이다. 그의 존재는 구색 맞추기나 향수(nostalgia)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성의 문제이다. 세상을 재편할 수 있는 분야에서, 가장 세속적인 행위자들조차도 양심이 코드 옆에 자리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AI와 인간 존재에 대한 싸움

인공지능은 종종 매개변수, 훈련 데이터, 신경망과 같은 기술적인 용어로 설명된다. 그러나 그 전문 용어 아래에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What does it mean to be human?)”라는 더 심오한 질문이 놓여 있다. 이것이 교황이 AI 권위자 목록에 포함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교황은 실리콘의 빛 속에서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 진리, 즉 인간은 기계가 아니며, 기계는 아무리 강력해도 인격체가 아니라는 진리를 증언하는 존재로 서 있다.

오늘날 AI를 독특하게 만드는 것들을 되새겨본다. 대규모 언어 모델로 알려진 가장 진보된 시스템들은 수조 개의 단어로 훈련되어, 문장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다음 단어를 예측하기 위해 텍스트 라이브러리를 흡수한다. 확률을 쌓고 쌓아, 그들은 자연스럽고 심지어 대화처럼 느껴지는 말을 생성한다. 이를 이미지, 음악, 비디오를 생성하는 다른 모델들과 결합하면 갑자기 기계가 놀랍도록 인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식이 없다. 의도도 없다. 내면의 삶도 없다. 신경망은 대화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지만, 사랑할 수는 없다. 의료 스캔을 분석할 수는 있지만, 고통을 겪을 수는 없다. 소나타(sonnet)를 작곡할 수는 있지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위험은 기계가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데이터 패턴으로 환원될 수 있고, 최적화될 수 있는 한에서만 가치 있는 기계처럼 취급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공상 과학이 아니다. 이미 AI 시스템은 채용, 치안, 심지어 전쟁에 통합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코드 한 줄은 정의와 소외, 평화와 폭력 사이의 차이를 의미할 수 있다. 교회는 주장한다.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알고리즘이 정의正義를 결정하거나, 누가 온전히 인간으로 간주되는지를 결정하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말이다.

여기에 싸움이 있다. 실리콘 밸리는 종종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나 정신 업로드를 꿈꾸며, 살과 코드를 융합하고, 디지털 불멸을 약속한다. 그것은 하느님 없는 구원, 은총 없는 영원에 대한 비전이다. 그러므로 AI 리더들 사이에서 교황의 존재는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예언적이다. 교황은 AI가 우리의 능력을 확장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본질을 재정의할 수는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인간은 코드의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AI를 둘러싼 더 깊은 투쟁은 시장 점유율이나 기술적 우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학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사랑 안에서 창조된 신비로 볼 것인가, 아니면 최적화되고, 수익화되며, 결국 폐기될 수 있는 기계로 전락시킬 것인가?

디지털 아레오파고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는 아테네로 가서 아이디어의 거대한 시장인 아레오파고스 앞에 선다. 철학자, 시인, 시민 지도자들에게 둘러싸여, 그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청중의 가장 깊은 열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그들의 “알지 못하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문화적 논쟁의 바로 그 심장부에서 복음을 선포한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인공지능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아레오파고스가 되었고, 인류가 자신의 운명을 논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곳은 대리석 기둥이 있는 경기장이 아니라 빛나는 화면으로 가득하며, 스토아 철학자나 에피쿠로스 학파 대신 연구원, CEO, 정책 입안자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질문은 똑같이 울려 퍼진다: 진리는 무엇인가? 자유는 무엇인가? 인간 존재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What is truth? What is freedom? What is the human person for?)

이것이 교황의 AI 권위자 목록에 대한 존재가 그토록 인상적인 이유이다. 이는 교회가 이 영역에 진입했음을 상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효율성, 규모, 이익에 대해 말할 때, 교회는 존엄성, 정의, 그리고 사랑을 주장한다. 그리고 교황은 코딩을 하지는 않지만, 그의 목소리는 디지털 아레오파고스를 가로질러 외친다. 영리함을 지혜로, 권력을 목적으로 착각하지 말라고 말이다.

이 도전은 시급하다. 만약 교회가 이 새로운 시장에서 말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이 기꺼이 그 침묵을 채울 것이다. 실리콘 밸리에는 자체적인 복음 전도자와 복음이 있다. 데이터에 의한 구원, 기계에 의한 불멸, 알고리즘에 의한 유토피아이다. 이러한 비전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수백만 명이 삶의 의미를 상상하는 방식을 형성하는 교리문답이다.

아테네에서 바오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문화적 논쟁의 바로 그 중심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오늘날 아레오파고스는 디지털이며, AI는 그 제단이다. 교황의 포함은 교회가 이 대화에서 빠져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제 질문은 우리, 즉 신자들이 그 대화에 참여할 것인가 이다.

울림과 의미: 이상한 위안

역사는 모든 기술 혁명이 인류에게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묻게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인쇄술은 교회를 동요시켰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해방시키기도 했다. 산업혁명은 경제를 불안정하게 했지만, 가톨릭 사회 교리와 노동자 존엄성 수호를 낳았다. 핵 시대는 인류에게 스스로를 파괴할 힘에 직면하게 했고, 교황의 목소리는 절제와 평화에 대한 전 세계적인 요청이 되었다.

인공지능은 이제 이러한 격변의 계보에 합류하고 있으며, 이전보다 더 빠르게 확산되고 더 많은 삶의 차원에 동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텍스트를 인쇄하거나, 상품을 운송하거나, 원자를 분열시키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 정신의 내면 공간으로 침투하여 해답, 동료 관계, 심지어 지혜의 위조품까지 제공한다.

신자들에게 이 순간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소명으로 다뤄져야 한다. 우리는 AI를 연구실과 이사회실에 봉인된 다른 누군가의 문제로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교실, 직장, 병원, 가정을 재편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든 못하든, 모든 알고리즘은 인간 존재에 대한 비전, 무엇이 가치 있고, 무엇이 소모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 선교 영역에 복음을 가져가지 않는다면, 다른 교리들이 기꺼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효율성, 이익, 트랜스휴머니즘. 이 교리문답들은 하느님 없는 초월, 은총 없는 영원을 약속한다.(*번역글, Sebastian Barros의 <알고리즘 시대의 신앙(Faith in the Age of Algorithms)> 원문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wordonfire.org/articles/the-odd-man-out-the-pope-in-the-ai-100/)

2 thoughts on “알고리즘 시대의 신앙

  1. 시대는 변하고
    Ai라는 거대 공룡의
    지배시대.
    어떻게 살아야할지 화두를 던져주셨네요.
    자꾸
    뒷걸음질치는 저를 봅니다.

  2. 항상 중요한 질문은 놓치기 쉽고, 설령 생각한다고 해도 해답을 찾기 힘듭니다. 교회가 이 점에서 오늘날의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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