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정체성이란 고유하고 일관된 나의 모습이며 총체적인 자아개념이다. 나의 외모나 신체적 특징, 정신, 기억, 성격, 가치관 등을 아우르며, 개인의 경험과 사회적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 자신에 대한 이해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지속성을 유지하고 사회적 역할을 통해 사회와 상호작용하면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정체성의 주요 구성 요소는 자기 이해, 경험의 통합, 사회적 관계, 변화와 적용이다. 인간의 정체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일관성을 지닌 채 변화하고 성장해 가는 자아의 통합적 개념이다.
웹사이트 CanaVox.com가 소개하는 <자녀와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팁(Tips for Talking to Your Kids About Sex)>이라는 책은 인간의 정체성 요소들을 설명하고자 이른바 ‘정체성 6단 케이크(Identity Cake)’를 제안한다. 저자들은 「개인의 정체성이 우리의 인간 본성에 근거하지만, 또한 우리의 개인적인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이라고 이를 설명한다. 그들은 정체성이 하나의 요소(예: 성적 지향)에 의해 정의되는 것으로 이해되기보다는, “개인적 전체로 통합되어야 할 상호 연관된 많은 요소들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가장 아래 세 층인 인간 정체성(human identity), 성별 정체성(biological sex identity), 그리고 가족 정체성(familial identity)은 모두 같은 크기이다. 이것들은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우리는 인간인지 아닌지를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생물학적으로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것은 태생으로 주어진 객관적 사실이다.(*의학 연구의 일부 통계에 따르면 인구의 0.02~1% 정도 아주 소수의 예외가 있다고 한다) 가족 정체성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의미 있게 기여하는 가족 연결망 속에 깊이 뿌리내린 채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다”는 현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위의 층들인 종교적 정체성(religious identity), 관계적 정체성(relational identity), 그리고 직업적 정체성(professional identity)은 아래층 세 단의 케이크들보다 더 작다. 이것들은 우리의 선택으로 우리가 “만들어내는” 요소들이다. 이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따라서 각자가 처한 배경과 문화, 관계 안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갈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선한 것, 아름다운 것, 진실한 것을 향해 끊임없이 선택하고 성장해 나가야 한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든, 진정한 나는 내가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 또한 인간 안에서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유의 신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의 정체성은 단지 사회적・심리적 형성과정의 산물이 아니라, 그 근원에 하느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창조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를 만들어낸 자기 완결적 실체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불림받은 존재’, 곧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존재하는 피조물’이다. 성경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7)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정체성이 창조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근원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은 외적 능력이나 사회적 위치, 성별이나 역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흘러나온다.
「만민을 아버지로서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을 이루고 서로 형제애로 대접하기를 바라셨다.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신”(사도 17,26)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은 똑같은 하나의 목적, 바로 하느님께로 부름 받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첫째가는 가장 큰 계명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을 이웃 사랑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로마 13,9-10; 1요한 4,20 참조). 날로 더욱 서로 의존해 가는 사람들에게 또 날로 더욱 하나로 합쳐지는 세상에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지 않으면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제24항)」
인간의 정체성은 자아의 폐쇄된 자기규정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완성되는 개방적 정체성이다. 이 관계는 인간 사이의 관계일 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곧 자기 자신을 부르시는 분께 응답하는 관계이다. 이러한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정체성의 첫 층인 “인간 정체성”은 창조된 존재로서의 보편적 존엄을, “성별 정체성”은 창조 질서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도록 부름 받았음을, “가족 정체성”은 공동체적 사랑과 생명의 관계 안에서 인간이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한다는 소명을 드러낸다.
그 위의 “종교적 정체성”은 인간이 신앙 안에서 자신의 궁극적 근원을 자각하고, “관계적 정체성”과 “직업적 정체성”은 그 신앙이 세상 속에서 구체적 사랑의 행위로 확장되는 영역이다. 결국 모든 정체성은 하느님께로부터 시작되어, 하느님께 나아가는 이른바 ‘은총 안의 여정’(itinerarium in Deum)으로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은 단순히 “내가 누구인가?”라는 자아 탐구의 질문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 나는 누구로 부름 받았는가?”라는 소명(vocatio)의 차원으로 깊어진다. 이 부르심 안에서 인간은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이며, 그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도록 파견된 존재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