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 ‘다’해(루카 14,1.7-14)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시다. 헤로데는 이미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세웠고, 일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이를 귀띔해주며 도망하라고 권고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도망가지 않으시고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실 때까지 그 길을 가신다고 하시면서,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1-33) 하신다.

1.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예수님께서 그렇게 길을 가시던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식사 초대를 받고)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이다.”(루카 14,1)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이다. 루카 복음에는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루카 7,36)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루카 11,37) 하면서 이미 어느 정도 위대한 스승으로 대접받으시면서 유명 인사가 되신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설교하신 후 바리사이들의 집에 초대를 받으셨다는 말이 오늘 복음 말고도 두 번이나 더 나온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한 바리사이 지도자 중 한 사람들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고생하시는 예수님을 모셔 그저 밥이나 한 그릇 대접하려는 것이었을까, 예수님 같은 분을 집에 모심으로써 자기 영향력이나 명예를 과시하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예수님과 이런저런 율법의 논란거리로 토론하거나 시비를 가려보자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예수님을 시험해보려는 의도(참조. 루카 10,25)였을까?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행동)지켜보고(예의주시하고) 있는데(루카 14,1ㄴ)라고 한다. 인간들이 감히 하느님을지켜본다’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인간들을 지켜보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호의를 보이는듯하지만, 한편으로 예수님을 “지켜보며” 그분의 파격적인 모습과 행보에 놀라며 “먹보요 술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루카 7,35)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2. “윗자리에 앉지 마라끝자리에

주변을 예의 주시하시고 관찰에 민감하신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식사 자리에 앉으신다. 예수님은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시면서 소외된 사람은 없는지를 배려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윗자리만을 찾느라 골몰한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루카 14,7) “윗자리”는 주인이 가장 주빈으로 모시고 싶은 분을 위해 예비해 둔 자리인데, 예수님과 함께 초대받은 다른 사람들이 예민하게 자리를 두고 신경전을 벌인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자리에 초대를 받으면 다른 사람이 앉는 자리와 초대자가 앉는 자리를 은근히 계산하며 조금이라도 더욱 명예스럽게 여겨질 만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보이지 않게 많은 신경을 쓰는 일이 허다하다. 그래서 아예 앉을 자리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이름표를 놓거나 원탁으로 배치하기를 선호하는 것이 오늘날의 추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루카 14,8-10) 하신다. 비유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내용은 자신이 더 중요한 사람으로 취급받아야 한다는 식의 슈퍼-에고 의식을 떠나 나보다 다른 이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겸손의 문제이다. 자존감과 겸손은 다른 이가 보기에 가당치 않게 스스로 자기 품위나 등급을 자기가 결정짓는 교만함과는 다르다. 나의 존엄과 가치는 나 스스로 그렇게 점수를 매겨서가 아니라 남들이 알아줘서 매겨진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겸손한 척하는 거짓 겸손도 경계하신다.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윗자리”나 “앞자리”, 그리고 “끝자리” 중 어느 자리에 앉아 계셨던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은 일부러 “끝자리”를 선택하거나 그런 척이라도 해서 “윗자리”로 초대받으라는 말씀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예수님의 의도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하는 다음 구절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겸손과 겸손의 가장假裝을 놀랍게 잘 식별한다. 하물며 하느님께서야 오죽하시겠는가! 겸손을 가장하는 사람에게는 설령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만간 화禍가 있을 것이다. 진정한 겸손은 억지로 꾸민다고 될 일이 아니다.

사람들 간의 ‘겸손’이 사회적 예의이고 처세라고 한다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는 인간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진실’의 자세이다. 하느님 앞의 인간창조주 앞의 피조물이며, 무한 앞의 유한이고, 영원 앞의 찰나이며, 절대 앞의 상대이고, 필연 앞의 우연이며, 채권자 앞의 채무자이고, 심판관 앞의 피고이며, 순수 앞의 불순이고, 성인 앞의 죄인이며, 은총 앞의 허무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겸손’일 수밖에 없다. 교만한 사람을 묘사하는 것이 겸손한 사람을 묘사하기보다 훨씬 더 쉽다. 교만한 사람은 스스로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고 자신을 숭배하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 앞의 자기 자신을 가늠할지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다.(집회 3,28-제1독서)” 한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인간의 첫 번째 죄는 ‘교만’으로부터 시작한다. 단테의 신곡 연옥편에서 7가지 죄 중 가장 중대한 교만의 죄를 씻기 위하여 가장 밑에서 첫 번째로 정죄의 산을 오르는 영혼들이 받는 정화의 수련은 목이 뻣뻣한 그들의 교만을 꺾기 위하여 목에 커다랗고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주님의 기도를 외우며 더딘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영혼들이 바라보는 겸손의 표상은 흰 대리석에 조각된 성모 마리아와 춤추는 다윗 등이다.(참고. 단테, 신곡-연옥편, 제10-11곡) 거짓 겸손은 위선이고 자기 경멸이나 자학 내지 자기 비하요 그 열매는 우울과 좌절, 그리고 실망일 뿐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겸손을 몸으로 사신 겸손 자체이신 분이다. 바오로 사도께서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하였고, 예수님 몸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셨다. 온유는 겸손을 토대로 하고 겸손은 진실을 토대로 한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에게는 진정한 겸손만이 희망이다. 겸손은 라틴어로 ‘humilitas’이다. 이는 ‘humus’ 곧, ‘흙’이요 ‘땅’이라는 말에서 기원한다. 자신이 흙으로 빚어진 존재, 즉 인간human임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진 자만이 겸손한 자요, 하느님께 오를 수 있는 자이다.

『인간은 겸손할 때만 하느님을 닮을 수 있다.(니싸의 성 그레고리오, 335~394년)』 『그렇다고 해서 그 겸손이 그릇된 자기 비하여서는 안 된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349~407년)』 등 교부들도 겸손에 관한 여러 금언을 남긴다. 신앙인들에게 ‘겸손’은 단순한 인간적 덕행이 아니라, 인간을 그리스도와 결합하는 신앙의 자세이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잠언 3,34)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1베드 5,5-6)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 6,8) 이 외에도 마태 18,4;23,12 로마 12,16 에페 4,2 필리 2,3 콜로 3,12 2코린 11,7 사도 20,19 야고 4,6.10 등을 더 읽을 수 있다. 겸손은 모든 일상사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캐려는 진지한 들음이다. 겸손이란 하느님께서 완전하시고 나는 별 볼일이 없다는 주제 파악으로 나아가는 순명이다. 겸손이란 언젠가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배짱 두둑하게 믿는 믿음이다.

단순하면서도 신중하며 자신을 개의치 않는 태도를 지닌 사람들, 겸손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잔칫상,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자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축제의 체험이 일어나는 기회가 된다. 그저 의례적인 식사 자리나 쇼가 아닌 말 그대로 진정한 잔치가 된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31)라고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대로 처세는 사라질 형체요 세상의 형체에 연연해하는 것이다. 잔치와 파티, 그리고 축제는 모두 자기 자리에 머물면서 다른 이의 자리를 탐하지 않는 곳에서만 진정 흥겹다. 이러한 원리는 여느 공동체에서나 마찬가지이다. 다른 이에게 유보된 자리를 훔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어려운 일일지라도 예수님의 생각에 따를 때 이것이 복음적이고 참된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다. “자신에 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저마다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건전하게 생각하십시오.…우리…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로마 12,3-6ㄱ)라고 한다.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이는 높은 곳에서 떨어질 것이며, 때로 자신과 다른 이에게 화禍를 미친다.

3.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이어서 루카 복음사가는 위에 언급한 대로 예수님께서 초대받은 이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루카 14,12) 하셨다고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한번 받았으니 한번 대접해서 되돌려주어야 한다’라는 슬픈 인간의 현실, 감사가 없이 그저 ‘give and take’라는 거래의 논리로서만 이루어지는 인간관계를 예리하게 지적하신다. 세상에 공짜가 없으니 당연히 갚음과 품앗이를 받고자 하는 세상 사람들, ‘내가 한번 했으면 너도 한 번 하라’고 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라 하신다. 우리가 누군가를 집에서도 아니고 어느 식당에 초대한 적이 있다면, 상대방도 나에게 그런 초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만약 그러지 않으면 ‘왜 안 하지?’ 하고 얼마나 많이 속으로 생각했던가? 이러한 현실은 과거보다 오늘날 더욱 심하다. 슬프게도 이런 논리가 우리를 사로잡게 되면 우리는 누군가를 내 집에 초대할 수 없게 되거나 초대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오늘날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누군가를 내 집에 초대하지 못하고 내가 상대방에게서 초대받은 식사의 가격이나 횟수를 계산하여 그에 걸맞은 레스토랑에 초대한다. 이는 말 그대로 초대라기보다 비즈니스 식사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대가나 갚음을 바라며 초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를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3-14) 하신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보답할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하라는 이 말씀은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 누군가를 명예나 예의상 초대하는 그런 식사 자리가 아니라,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초대하는 식사 프로그램을 실제 조직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식사 자리에 함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식탁은 음식의 나눔, 가난하고 작은 이들을 환대해야 한다는 복음이 요구하는 그런 식탁이 아니다. 누군가를 내 집의 식탁에 초대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요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세속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초대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기쁘고 흥겨운 식사 자리와 잔치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자리여야만 한다.

도저히 “보답”해 드릴 수 없는 은혜로 주님 성찬의 식탁에 이미 초대받은 우리 역시 예수님의 영원한 잔치에 초대받은 가난한 이요, 장애인이며, 다리 저는 이요, 눈먼 자들이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 영적인 거지요, 하느님의 나라에 가는 길을 알고도 어느 부분이 망가진 장애인이며, 제대로 걷지 않는 절름발이요, 영적인 시력을 상실한 소경들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그 어떤 것도 갚아 드릴 수 없고 보답할 수 없는 이들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초대와 호의에 감사하며 그저 그 초대를 받아들이면 될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의 잔치에 들어가기 위하여 진정한 겸손의 몽둥이로 맞아 가난한 이가 되어야 하고, 장애인이 되어야 하며, 제대로 걷지 못하는 절름발이가 되어야 하고, 소경이 되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이 우리 식탁에 함께 앉았다면, 그 자리를 현실적으로 우리 자신이 준비하였다고 해도, 예수님께서 몸소 당신의 삶과 생명으로 준비하신 식탁임을 잊지 말 것이다. 우리가 거행하는 성체성사의 식탁이 우리 생각대로만 오직 성체성사에 합당하고 의롭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만 열린 식탁이면서, 소외되고 가난하며 용서받은 죄인들에게는 닫힌 식탁이라면 이는 그리스도의 성체성사 잔칫상이 아니다. 설령 종교적인 거룩한 잔칫상일지라도 복음의 논리가 아닌 세속적 논리에 갇힌 성사이다. 아멘!

2 thoughts on “연중 제22주일 ‘다’해(루카 14,1.7-14)

  1. 낮은 곳으로
    겸손을 장착하여. 함께 어울리기

    애구 자꾸
    못된 습관

    잘난체 하고 싶은
    마음 올라올 때

    침묵하며
    오늘 복음을 생각하겠습니다.

  2. 겸손, 신부님의 말씀을 읽고 보니 더욱 어렵습니다
    오늘 외적 행위로는 다른 이가 보지 않는 곳에서까지
    겸손한 척 했건만 속내로는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하였으니 참으로 어렵습니다
    신부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 노력해 보겠습니다
    지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신.
    제 행위가 위선이었습니다
    “신곡” 가르침의 죄의 뿌리인 교만이 자리잡고
    있어서 떨치기가 어려워 갈등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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