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아담이 창조 시에 받았던 과성은혜(*過性恩惠, donum praeternaturale-인간의 본성本性을 더욱 완전하게 하는 하느님의 은혜, 원죄原罪를 범하기 이전 원조元祖가 고통과 죽음을 당하지 않고 탐욕에 지배되지 않은 은혜를 누렸던 상태를 두고 한 말이다. 성 토마스는 이 은혜가 은총의 소산所産이라 하였다. 이 은총을 입은 사람은 고통도 죽음도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고 설명하였다-가톨릭대사전)의 상태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비록 하느님께서 각 피조물에 하시듯 하는 그 이상으로 다른 보우하심을 입지 아니하더라도, 즉 자기에게 적합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그러한 도움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향을 아주 자연스럽게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역량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천상의 창조주께서는 대자연의 주재자로서도 당신의 강한 팔을 펴사 불길이 위로 높히 타오르게 하시고 물이 바다로 흘러들게 하시며, 땅속 낮은 데로 흘러내려 가서 가장 낮은 땅 밑 한가운데에 고이게 하시듯, 인간의 마음속에 당신을 심으시어, 일반적으로 모든 선을 다 좋아하고 사랑케 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당신의 신적인 선량성을 개별적으로 사랑할 경향을 주신 하느님의 그 지극히 높으신 감미로운 안배는 우리가 말하는 복된 이들에게 그러한 경향을 실천하여 결실을 내는데 필요한 도우심을 베풀어 주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도우심이 한편으로는 자연 본성적인 것으로서, 본성에 적합하여 하느님을 대자연의 창조와 주재자로 여겨 사랑케 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초자연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사람의 단순한 본성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고, 과성은혜로 꾸며져서 풍성해지고 영예롭게 된 초자연에 적합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과성은혜란, 하느님의 가장 특별한 은혜로써 주어지는 초자연적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우심으로 실천될 수 있는, 만물을 초월한 사랑은 자연 본성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덕스러운 여러 가지 행위는 그 대상과 동기에 의해 이름 지워지는데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자연적 빛을 통해 창조주로, 주님으로, 모든 피조물의 최상 목적으로 알아 모시는 하느님, 따라서, 다만 자연적 경향에 의해 만물을 초월하여 사랑하고 섬겨야 할 하느님으로 알고, 하느님을 향하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비록 인간 본성의 상태가 창조 당시의 첫 사람에게 주어진 원본적인 건전성과 정당성을 지니고 있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우리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매우 타락해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유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겠다는 거룩한 경향만은 항상 우리 안에 남아 있으니, 그것은 마치 우리가 자연 본성의 빛으로도 하느님의 최상 선이란 만물을 넘어 가장 사랑함직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어떤 이가 자연 본성적인 추리로만 하느님께 주의를 다 기울여 생각을 돌리고 있을지라도 우리 본성의 은밀한 경향에 의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이 최고 최상의 대상을 파악하게 되면 의지는 할 수 없이 거기에 사로잡히고 자극되고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연고다.
자고새(자고鷓鴣는 꿩과에 속하는 날짐승으로서, 메추라기와 비슷하나 훨씬 곱고 아름답다)라는 날짐승은 다른 자고새의 알을 훔쳐다가 품는 수가 자주 있는데(예레 17,11), 아마 그것은 남의 알 위에 앉아 보고 싶거나 남의 알을 까서 어미 노릇을 해보고 싶은 욕심과 혹은 너무 미련해서 남이 낳아 놓은 알을 제 것인 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좀 재미있고도 신기하게 입증된 사실로는(성 이레네오에게 보낸 성 암브로시오의 편지, XXII의 6. 성 이시도로의 Hispal. Etym. VII 63), 다른 새의 둥지에 있는 여러 개의 알을 훔쳐다가 품어 새끼를 깐 다음 그것이 조금 자랐을 때, 그 새끼의 본 어미가 한번 부르면 즉시 도둑 어미의 둥지를 떠나 저를 낳아준 본 어미를 따라가 제 본 형제들과 섞여 한데 어울리게 된다고 한다.
이와같이 대응성을 띤 친화력이란 비록 밖으로 현저히 나타나지는 않지만, 은밀히 숨어서 본성의 밑바닥에서 잠을 자듯 하다가도 제 본래의 대상을 만나면 즉시 자극을 받고 일깨워져서 활동하기 시작하니, 새끼 자고새의 경향성은 제 본연의 의무에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와 똑같이, 테오티모여, 우리의 마음이 비록 육체적이고 비천하고 지나가 버리는 사물 속에서 형성되고 길러지고 다져진다고 하더라도, 어떤 때 본성의 날개 밑에서, 어쩌다가 하느님을 바라보게 되면, 곧 하느님께로 날려고 하며,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자연적인 첫 경향이 좀 무디어져 있어서 무감각한 듯하여도, 단숨에 즉시 깨어나, 마치 잿속에서 불티가 튀어나오듯, 갑자기 나타나 우리의 의지를 감동시킴으로써 만물의 근원이신 최상주재자가 되시는 분께로 가야 할 최고의 사랑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