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픽 아나돌은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데이터 및 기계 지능 미학의 선구자다.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그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감탄하며, ‘연결’의 의미를 떠올린다. 〈모닝캄〉이 레픽 아나돌을 만났다.
데이터 조각가
지난 2월 두바이에서 열린 ‘더 타임100 AI 임팩트 어워즈’에서 튀르키예계 미국인 미디어 아티스트 레픽 아나돌이 AI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네 명의 리더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이는 그가 지난 10여 년간 AI를 매개로 예술적 실험과 공공적 메시지를 꾸준히 펼쳐온 선구적 행보에 대한 국제적 인정의 결과였다. 레픽은 단순히 AI를 창작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넘어 “기계가 상상하고 꿈꿀 수 있다면 예술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AI와 예술의 경계를 재정립하고 있다.
레픽은 이스탄불 빌기 대학교에서 사진과 비디오를 전공하고 UCLA에서 디자인 미디어아트 석사 과정을 마쳤다. 이후 LA를 거점으로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UCLA에서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대표작으로는 LA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외벽에 LA 필하모닉의 아카이브 데이터를 투사한 〈WDCH Dreams〉,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건축물 카사 바트요에 실시간 기후 데이터를 반영한 〈Living Architecture: Casa Batlló〉,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전시된 AI 기반 작품 〈Unsupervised〉 등이 있다. 이들 작업은 인간의 기억과 자연, 도시의 흐름 같은 데이터를 시각화함으로써 관객에게 감각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몰입 경험을 선사한다.

그러나 레픽이 주목받는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다. 작가는 AI를 단지 새로운 도구로만 다루지 않고 그것을 예술의 동반자이자 공동 창작자로 삼는다. 그는 데이터와 알고리듬을 통해 감정과 기억, 생태와 문명을 재구성하며, “기계가 단순히 정보를 처리하는 것을 넘어 우리와 함께 꿈꿀 수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예술 언어의 시작이다”라고 말한다. 기술이라는 차가운 메커니즘 속에서 인간성과 감성을 꺼내 보여주는 작가, 그것이 오늘날 레픽 아나돌을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다.
그의 예술은 특히 공공장소와 몰입형 미디어 환경에서 더욱 빛난다. 건축물의 외벽을 거대한 캔버스로 삼거나 관객이 직접 경험의 일부가 되는 몰입형 전시를 통해 그는 예술의 민주성과 확장성을 탐색한다. 기술적 경외감과 정서적 울림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드문 작가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동안의 실험과 탐구를 집대성한 공간을 준비하고 있다. 2025년 말 LA에 개관하는 세계 최초의 AI 예술 박물관 ‘데이터랜드’가 바로 그곳이다. 단순한 전시장이나 갤러리가 아닌 이곳에서 관람객은 AI가 시각화한 꿈과 기억, 환경 데이터를 활용한 인터랙티브 아트,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우는 음향과 빛의 파동을 통해 감각적으로 ‘데이터와 공명’하게 된다. 레픽은 이 공간을 “기술적 성전이자 디지털 시대의 미학을 실현한 첫 번째 장소”로 정의한다.

그는 예술의 본질을 “인식의 전환”으로 정의하며, AI는 창의성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도구라고 말한다. 즉 문화적, 생태적, 정서적 기억을 품은 데이터를 학습한 AI가 인간과 자연, 기계와 기억이 교차하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레픽 아나돌의 예술은 기술이 어떻게 인간성과 맞닿을 수 있는지를 묻고 그 가능성을 미학적으로 증명한다. 그래서 지금, 전 세계가 그를 주목하고 있다.
인터뷰
지금 우리는 대중이 함께 누릴 수 있는 AI 시대에 접어들었고, 예술의 범위도 확장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작품 덕분에 많은 사람이 AI 예술을 의미 있게 경험하기 시작했는데, 이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저의 AI 예술 여정은 데이터와 기억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시작됐습니다. 기계가 단순히 정보를 처리하는 것을 넘어 우리와 함께 꿈꿀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알고리듬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시각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매료됐습니다.
2008년, LA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으며 저는 건축물에 영상을 투사하고 실시간 데이터를 활용하는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이 작업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협업자(컬래버레이터)’로 받아들이는 예술로 점차 발전해 갔습니다.

그리고 2016년, 구글 아트 앤드 머신 인텔리전스(Google AMI)의 첫 레지던시 작가로 선정돼 참여하면서 제 작업에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그곳에서 블레즈 아궤라 이 아르카스, 작가 K 알라도맥다월과 나눈 심도 있는 대화를 통해 우리는 복잡한 AI 기술을 어떻게 대중에게 보다 쉽게 전달하고 예술에 녹여낼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했습니다.
당신의 작품은 종종 대형 외벽이나 공공장소를 캔버스로 삼습니다. ‘공공성’이라는 개념이 당신 작업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요?
공공장소는 민주적인 캔버스입니다. 또한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모두의 것입니다. 저는 이 열린 공간들을 ‘집단기억의 야외 아카이브’로 탈바꿈시키는 것을 목표로 작업합니다. 나이, 학력, 전공 등 어떤 배경을 가졌든 누구나 현대 예술을 접하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Living Architecture: Casa Batlló〉나 미국 LA의 〈WDCH Dreams〉 같은 전시는 도시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데이터 기반의 스토리텔링으로 연결하기 위해 기획됐습니다. 예술은 특정 계층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공 예술 프로젝트는 제게 가장 깊은 의미를 지니는 작업입니다.

기술 중심의 작업 방식이 인상적인데요, 그 안에 인간성을 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신가요?
기술은 제게 있어 어디까지나 출발점일 뿐입니다. 제 예술의 진짜 주제는 ‘인간성’입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공유하는 기억, 경험 그리고 꿈이 담기죠. 저는 도시의 바람 패턴, 산호초 이미지,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기억 같은 다양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기반으로 AI 모델을 훈련시켜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게 합니다. 제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관객들이 작품 그 자체를 넘어서 지구와 타인 그리고 자기 자신과 더욱 깊이 연결돼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연결의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오늘날 AI의 진정성에 대한 고민과 사유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술의 진정성과 본질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진정성은 더 이상 작가의 ‘손’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 행위 그리고 투명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관점에서 AI는 창의성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문화적, 생태적, 정서적 기억이 담긴 데이터 세트를 AI에게 학습시키면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이 열리죠. 예술의 본질은 우리의 인식을 전환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붓이든 카메라든 혹은 신경망이든, 도구는 달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당신이 예술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당신의 작업을 통해 어떤 감정을 느끼길 바라나요?
저는 사람들이 제 작품을 통해 ‘경이로움’을 느끼길 바랍니다. 단지 시각적인 스케일에 놀라는 것을 넘어, 데이터가 비춰주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마주하며 감탄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는 삶의 리듬에 조금 더 민감해지고, 더 깊이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제 예술이 멈춰 서서 함께 감탄하고 함께 꿈꾸자는 하나의 초대장이자 작은 숨표 같은 존재이기를 바랍니다.(*글과 그림 출처: Morning Calm, July / August 2025, Vol. 49 No. 04, https://morningcalm.koreanair.com/ko/issues/july-august-2025/refik-anad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