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해(루카 9,11ㄴ-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루카 9,17)

지난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낸 교회는 오늘 다시 한번 또 다른 교의의 옹호를 위해 설립된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거행하면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그날까지 교회가 당신을 기억하여 성체성사를 거행하도록 명하신 사실을 기린다. 예수님의 교회는 매일, 매주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도 성체성사의 다할 길 없는 신비를 특별한 날, 곧 성령 강림절 후 두 번째 주간의 목요일(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목요일)에 거행하는데, 우리나라나 미국, 이탈리아를 비롯한 국가들에서는 성령 강림절 후 두 번째 주일로 옮겨 이를 거행한다. 이 대축일은 1264년 우르바노 4세 교황 때부터 공식적으로 지낸 축일이다. 성삼일 동안의 성 목요일에는 성체성사의 제정을 기념하고, 오늘 축일에는 많은 교회에서 성체거동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어 마련해주신 성체성사를 공개적으로 기념한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신 빵의 기적 이야기를 전한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는 복음서에 여섯 번(마태 14,15-21;15,32-39 마르 6,35-44;8,1-10 루카 9,12-17 요한 6,1-13) 등장하고, 4복음서가 모두 수록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었고, 초대교회에서 강조한 내용이었다는 반증이다. 이는 초대교회가 지낸 성찬례(성체성사)의 배경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인 루카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힘과 권한”을 부여하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라고” 파견(루카 9,1-2 참조)하셨으며,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제자들이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와 그간의 활동과 체험을 보고하였다.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내려오시어(참조. 루카 3,21-22) 하느님으로부터 수행하라고 명하신 사명이자 나자렛 회당에서 드러난(참조. 루카 4,18-19) 예수님의 사명이 이제 제자들에게까지 이어지고 널리 퍼진 것이다.

복음사가들(특히 요한 복음사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결정적이고도 중요한 순간음식으로 제자들과 만나는 장면을 기술한다.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이루신 첫 번째 기적이 포도주(잔치)에 관한 것이었고(참조. 요한 2장), 수많은 군중을 먹이시어 사람들이 임금으로 모시고자 시도할 때에도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이 있었던 다음이었으며(참조. 요한 6장),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정하실 때가 바로 빵의 기적 다음이었고(참조. 루카 9장),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 당부와 그들을 위한 기도를 하셨을 때도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다음이었으며(참조. 요한13,31-16,33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별사’와 그에 이어지는 요한 17장),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걸으시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이 바로 빵을 떼어 나누던 바로 그 순간이었고(참조. 루카 24장),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에서 그 누구도 그분이 과연 주님이신지를 물을 필요가 없게 된 때도 이른 아침 식사를 하시던 바로 그 자리(참조. 요한 21장)였다.

1. “맞이하시어말씀해 주시고고쳐 주셨다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을 예수님께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따로 데리고 벳사이다라는 고을로(벳사이다 근처에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안가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군중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어디로 가셨는지) 그것을 알고 예수님을 따라왔다. 예수님께서는 (사명 수행에 고생한 제자들과 함께 잠시 휴식도 취하실 겸 재정비의 기회를 얻고자 하셨으나) 그들(고집스럽게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께로 왔으며, 예수님을 따라온 군중)맞이하시어, (자비를 베푸시는 데에 한없이 너그러우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기꺼이) 병을 고쳐 주셨다.”(루카 9,10-11) 낯선 이나 불편한 이까지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고 내치지 않으시며 환대하시고 맞아들이시는 예수님의 스타일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다른 이를 환대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 자기들의 인생을 짓누르고 있는 악과 무게 앞에서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고 해방하실 수 있으며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하느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의 일상이자 일생이었으며,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말씀을 선포하는 일과였다.

2. “황량한 곳너희가저희에게는

그런데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서)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걱정하면서)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루카 9,12) 제자들의 제안은 인간적으로 볼 때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가능성을 일축하신다. “황량한 곳(사막, 광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우상 숭배, 문제 제기가 있던 곳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유혹이 있던 곳이지만, 만나와 생수가 터져 나오는 곳이면서 예수님의 승리가 있던 곳이다. 예수님 없이는 어떤 기본적인 필요도 채워주지 못하는 것이 제자들의 한계이다. 그러나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받았다.”(루카 9,1)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루카 9,13)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는 이 명령으로 제자들에게 나를 믿으라 하시는 것이고, 모든 이들의 마음에 이미 있으면서 당신께서 이끌어가실 ‘믿음’의 역동성과 리듬에 참여하라고 하신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들이 먹을 것밖에 없다는 가난함을 내세우며 고집한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는 우리가 가진 초라함이지만, 이것이라도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정직하게 내어놓을 때, 이는 만인이 먹는 풍요로움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축복”하시고 만인이 먹을 양식으로 삼으신다. 풍요는 결국 예수님에게서 얻어진다. 제자들은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이라고 재원 마련을 걱정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한 답이 없이 사람들에게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고나누게 하신다.”(루카 9,14)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의 조직과 분배를 생각하신다.

3. “하늘을 우러러떼어나누어 주도록

예수님께서 (주도권을 잡고 나서시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루카 9,14-15)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단지 허기를 면하는 것만이 아니라 해가 진 뒤에 여럿이 어울려 지내는 푸짐하고 넉넉한 만찬을 생각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기도하시는 몸짓으로)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식탁 봉사를 하듯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루카 9,16) 음식은 충분했고, 모두가 나눌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루카 9,17) 구약의 예언서를 아는 이들은 이미 엘리사 예언자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이나 되는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았다는 일화를 떠올린다.(참조. 2열왕 4,42-44)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실 뿐 아니라 “열두 광주리”나 남는다. 예수님 앞에 있던 제자들과 구약을 알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이야말로 엘리야나 엘리사뿐만 아니라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로 배부르게 했던 모세(차조. 탈출 16장)보다도 더 위대한 예언자이시며 뛰어난 분임을 알고 믿게 된다.

도대체 이러한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 사건을 보통으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이라고 알고 있지만, 복음에는 실제 이러한 말마디 자체가 없다. 그러한 사실로 미루어 우리는 ‘빵을 떼어’ 모두가 ‘함께 나누는’ 일이 있었다는 동작들과 함께 이것이 모든 이를 위한 풍요의 잔치가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거행할 마지막 만찬의 예표,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하셨던 것과 같은 동작들이 이미 이 이야기 안에 담겨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앞에서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같은 동작을 취하신 것으로 루카 복음사가는 기록한다. 그때도 날이 저물어가던 저녁때였으며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자고 예수님을 붙들어 청하였으며, 예수님께서 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루카 24,29-30) 루카가 전해주는 세 가지 이야기 모두 ‘군중, 백성,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굶주림,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이자 그 나라를 이루시는 예수님, 빵의 나눔으로 모두를 배불리시는 예수님, 모두를 위해 당신의 몸과 목숨을 떼어 나누시는 예수님’이라는 요소들을 담고 있다.

너무도 많고 다양한 성체성사에 관한 교의나 교리에 현혹되는 것보다는 성체성사의 신비가 지닌 단순성, 성체성사의 본질을 알아 모셔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한번 부서지고 쪼개어지시면서 당신을 찾고 따르려는 이들, 당신의 말씀에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려는 교회, 우리 모두에게 당신을 내어주시면서 남아 넘치는 양식이 되신다. 거룩한 전례 안에서 성체성사 거행의 본질은 빵을 떼어 모두가 함께 나눈다는 바로 이 역동성이다. 나아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 물질적인 음식의 나눔으로까지 나아간다는 패러다임이 성체성사의 완성이다.

성체성사는 천상 잔치요 주님의 살과 피를 모시는 식탁만이 아니다. 성체성사는 풍성한 음식이 있으면서도 배고프고 허기진 수많은 사람을 위해 나눔이 없는 우리의 매일 식탁에 대한 가르침도 된다. 이런 의미로 실제로 가난한 이들이 참여하지 않는 우리 성체성사의 식탁, 음식이 없어 굶주리는 이들과의 구체적인 음식 나눔이 없는 우리 성체성사의 식탁본질의 결여라는 점에서 빈말이다. 이럴 때 성체성사는 신심 깊은 이들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그럴듯한 전례일지는 몰라도 예수님께서 당신 교회에 바라신 표징에는 대단히 못 미치는 심각한 결핍이다. 주님 몸의 식탁은 언제나 주님의 말씀과 함께,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나눔의 식탁이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군중과 함께 나누심으로써 인간과 새로운 관계의 차원을 시작하시고 설정하신 셈이다. 친교를 통해 차별화가 없어질 수 있다고 하지만, 여기에 형제애나 연대 의식, 나눔이 없는 관계라는 것은 도무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오늘의 우리 교회가 초대교회와 교부들이 성체성사에서 얻었던 지혜와 가르침을 일정 부분 상실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솔직히 고백해야만 한다. 성체성사의 전례적인 측면가난한 사람과의 빵 나눔이라는 측면이 마치 이혼이라도 하듯이 갈라서게 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세상에 여전히 굶주림이 존재하고 우리 옆에는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상존하는데도 우리의 성체성사가 그들에게 구체적인 행동으로 결과를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성체성사는 바로오 사도께서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1코린 11,20) 하신 대로 단지 종교적 장면이나 의식으로만 비쳐질 뿐이다.

미사는 하느님 백성의 대표인 사제가 드리고 신자들이 ‘보러 가는 것’이 아니다. 미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제3계명의 수행을 위한 요식행위나 단순한 싱징적 행위가 아니다. 미사는 개인적으로 ‘영성체를 받아먹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미사, 곧 성체성사는 ①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생각하며 공동체로서 함께 드리는 감사이며(미사를 가리키는 ‘Eucharist’라는 말은 말마디 자체로 ‘감사’라는 뜻이다) ②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요한 13,35)이라는 말씀에 따라 공동체로서 같은 빵과 피, 예수님을 먹고 마셔 예수님 안에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가 되는 ‘하느님 사랑의 나눔’이다.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나,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동시에 당신 손에 나, 우리를 ‘받으시는’ 사제이시다. ③ (아직 공동체 안에 있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하여) 공동체로서 서로의 사랑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요한 13,1) 하신 주님께서 바로 이를 위해 성체성사를 제정하셨고, 이를 위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1.23)라고 기도하셨다.

우리는 성체강복 때 부르는 오래된 성체 찬미가 ‘딴뚬 에르고Tantum Ergo’의 첫 소절에서 『…묵은 계약 완성하는 새 계약을 이뤘네. 오묘하온 성체 신비 믿음으로 알리라』라고 노래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 면에서 아직 그저 ‘묵은 계약’에만 사로잡혀있고 갇혀있으며,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λογικὴ λατρεία, loghikè latreía, 직역하면 ‘말씀 예배’)”(로마 12,1)를 여태껏 드리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합당한 예배”는 우리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가난한 이웃을 위한 형제애로 ‘끝까지’-요한 13,1) 바치는”(로마 12,1)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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