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부활 대축일 다음 주일은 전통적으로 ‘사백주일(卸白主日-풀다, 떨어지다, 낙하하다 할 때의 ‘풀 사卸’)’로 불리었다. 부활 대축일에 세례를 받은 새 영세자들이 영혼의 결백을 상징하는 흰옷을 입고 부활 팔일 축제를 지낸 다음 부활 제2주일에 벗었기 때문이다. 많은 지역에서는 이날 어린이들의 첫영성체를 거행하기도 하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면서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Divine Mercy Sunday)’로 지내기도 한다. 이 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라 하게 된 것은 직접적으로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St. Faustina Kowalska 1905~1938년)의 계시와 연관이 있지만, 교회의 역사 안에서는 훨씬 더 소급되어 성 아우구스티누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부활 팔일 축제를 ‘자비와 용서의 날들(the days of mercy and pardon)’이라 불렀다.
1. “주간 첫날 저녁”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19)로 시작한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은 곧 예수님의 죽음이 있었던 서기 30년 4월 4일 금요일(주간의 여섯째 날) 이후 사흘째 되는 날 저녁이다. 요한복음 20장의 첫 구절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묘사하면서 “주간 첫날 이른 아침”(요한 20,1)이라 하였던 것에 대비된다. 이어서 제자들과 함께 토마스가 있던 장면을 기술할 때는 “여드레 뒤에”(요한 20,26)라고 한다. 복음사가 요한은 이처럼 구체적인 날과 시간을 명시하면서 무엇인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강조하려 한다. 참고로 “여드레”란 “주간 첫날”을 겹쳐서 날짜를 계산한 당시 사람들의 관습적 표현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발현한 날(요한 20,19)로부터 한 주간만인 또 다른 “주간 첫날”이다.
“주간 첫날”은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 “주님의 날(κυριακῇ ἡμέρᾳ, kyriaké heméra)”(묵시 1,10)이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날이고, 예수님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게 하시어 하느님께서 결정적으로 개입하신 날이며, 초대 그리스도인들인 형제자매들이 “한 자리에(ἐπὶ τὸ αὐτό, epì tò autó) 모여”(사도 1,15;2,1.44.47;1코린 11,20;14,23) 부활하신 분께서 그들 가운데에 오신 것을 기리고, 즉 전례를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재현하며,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1코린 11,26) 성찬례를 거행한 날(사도 20,7)이다.
“주간 첫날 저녁”은 그리스도인들의 주일 저녁 모임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주간 첫날 저녁”,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전해 준 막달레나(요한 20,18)를 믿지 않고 제자들의 마음에 낙담과 실의, 좌절이 내려앉은 저녁이었다. 이미 빈 무덤에 먼저 다다라, “보고 믿었다”(요한 20,8) 하던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마저도 아직 믿지 못하고 있던 저녁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참조. 요한 14,18) 하고 이미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었다. “제자들은…있었다.” 하는데, 제자들이 있던 곳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내 형제들에게 가서…전하여라.”(요한 20,17-18) 하셨던 것에서 짐작하듯이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리며 ‘형제자매들이 있던 곳’이다. “제자들”은 토마스와 유다를 뺀 열 명의 제자들이다.
2.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평화가 너희와 함께”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요한 20,19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요한 12,32)이라 하신 대로 제자들 한가운데에 서신 주님께서 중심이 되어 제자들을 하나가 되게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지녀야 할 진정한 모습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참조. 요한 19,37 즈카 12,10) 제자들 가운데에 서신 주님, 부활하신 분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히브. שָׁלוֹם עֲלֵיכֶם, Shalom ‘aleikhem)!”(요한 20,19ㄴ) 하고 말씀하신다. 평화, 충만, 그리고 두려움을 없애는 힘과 능력을 지닌 메시아로서의 인사말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 스승이요 예언자이며 메시아로서 제자들과 함께 지냈던 바로 그 당신임을 알리시고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흔적(참조. 요한 19,34)이 남아 있는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셨다.”(요한 20,20) 제자들은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19)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시체의 소생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몸”(필리 3,21), “영적인 몸”(1코린 15,44.46)이시어서 잠긴 문이어도 개의치 않고 들어오신다. 예수님 부활의 승리와 영광은 모든 인간적인 조건이나 조작, 인위적인 상황을 넘어선다. 그 몸에 남은 상처의 흔적은 수난의 흔적이면서도 죽기까지, “끝까지 사랑(εἰς τέλος, eis télos)”(요한 13,1)한 사랑과 영광, 죽음을 넘어선 승리의 표시이다. 유다인들의 박해가 두려운 제자들 앞에 박해를 받아내신 분으로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시어 진정 평화와 굳건한 힘을 주시는 분이 나타나신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 20,20ㄴ) 불과 얼마 전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ㄴ) 하고 예언하신 바가 있었다. 공동체가 맞은 새로운 상황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하시고,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하고 약속하신 대로 선물 중의 선물, 영원한 선물을 주시면서 다시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하신다. 제자들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알아 모시고 그분을 따랐으며 그분을 믿었으므로 이제 그 제자들을 당신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온 세상에 진리의 증인들이 되고, 그토록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들이 되라고 보내신다. 파견하신다. 제자들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라는 사실을 몸으로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이는 인간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문제이다. 보냄을 받은 자, 파견된 자는 파견하신 분의 얼굴이 되고, 입이 되며, 손이 되어야 하고, 귀가 되어 인간 간에, 그리고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만 한다.
3. “숨을 불어넣으며…성령을 받아라”
이러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제자들은 다시 창조되어야 하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성령에 잠겨 새로운 호흡, “새 마음”과 “새 영”,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참조. 에제 36,26), 곧 성령의 숨이 필요하다. “예전의 일”이나 “옛날의 일”이 아닌 “새 일”(참조. 이사 43,18-19)을 위해 준비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공동체에 “숨을 불어넣으며…‘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살게 하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숨이 한번 불어넣어지자 이제 그 숨이 제자들의 숨이 되어 제자들을 살게 한다. 마침내 예수님의 호흡이요 숨이 제자들의 호흡이요 숨이 되어 하나의 호흡이요 숨이 된다. “질그릇”(2코린 4,7)처럼 깨지기 쉽고 연약한 죄인들인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살아 숨 쉬게 하시는 성령으로, 비로소 이제 다른 죄인들을 용서하여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우리는 “성령의 성전”(1코린 6,19)이요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신 장면은 교회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성령의 은총을 받는 제4복음서의 오순절이고 성령 강림 장면이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마 1,4 참조. 로마 8,11)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시고, 『그리스도로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리스도의 동반자(체사레아의 성 바실리오)』이신 성령, 그래서 이제는 모든 그리스도인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요 보호자이시며 친구가 되시는 성령을 주신다. 모든 제자 안에 현존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참조. 요한 14,26)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한 그대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주님을 믿어 고백하고 증거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인간 육신의 호흡으로 주어진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요한 1,14)라는 말씀에 따를 때 제4복음서에서 사람, 육신, 사람의 살(sárx)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자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복음사가 요한에게 인간의 육신은 유혹과 죄의 자리로서 그저 하찮은 것이라고만 치부하면 안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안에 인간과 함께하고자 하신 자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는 하느님의 말씀께서 거하시고 그 말씀을 섬기는 인식의 자리, 곧 성령의 자리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한 여인에게서 잉태되신 것처럼 그렇게 교회도 성령으로 숨 쉬고 호흡하는 인간에게서 생겨난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죄의 사함을 뜻하는 결정적인 내용이 된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으로 온 세상 만물이 변화되기 전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역사 안에서 우리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체험은 죄 사함의 체험이다. 교회는 매일 아침 즈카르야의 노래를 통해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주려는 것”(루카 1,77)이라고 노래한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는다는 것,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4 에제 18,22;33,16) 하신 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말끔히 지워버리시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주님을 따라 사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 자비의 공현公顯, 형언할 수 없이 깊고도 깊은 하느님 사랑의 계시, 우리를 온전히 죄에서 해방하시고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완전한 새로움에 이르게 하시는 은총이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서로의 허물을 지울 수 있는 능력과 함께 서로 용서하는 용서의 공동체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서로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며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그 능력을 지닌다. 성령 강림절에 다락방에는 성모님과 함께 다른 여성 제자들도 있었듯이(참조. 사도 1,13-15;2,1) 제자들의 공동체가 지닌 용서의 능력, 서로를 죄에서 해방하고 자비를 실행하는 능력은 열한 제자뿐이거나 남성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에게 주어진 능력이다. 서로가 죄를 용서하며 그러기 위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야만 한다. 어딘가에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한 사람 있다면 그곳에는 악과 죄를 물러나게 하고 자비가 다스리도록 하는 자비의 사목이 있다.
4. “용서해 주면…그대로 두면…”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분명히 하시고자 숨을 불어넣으시는 동작과 함께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5) 하고 말씀하신다. 대구對句처럼 반대되는 두 문장의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당신의 의중을 강조하시려는 전형적인 셈족 언어식 표현이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자기들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행사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을 부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평생 단 한 번도 단죄하거나 심판하신 적이 없이(참조. 요한 8,15;12,47) 오로지 구하고 용서하러 왔으며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하신 예수님처럼 그저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시고자 하는 말씀임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하는 말씀 다음에 “숨을 불어넣으며” “용서”를 말씀하시는데,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20-23절의 말씀을 종합하여 달리 풀면 ‘내가 너희의 죄를 용서한 것처럼 너희도 용서하라고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낸다.’ 하는 말씀이 된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이 주님께서 나타나신 자리에 있지 않았던 토마스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ㄱ) 한다. 이 한 문장은 제자로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부활절 선포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제자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강한 어조로) 말하였다.”(요한 20,25ㄴ) “여드레 뒤(빈 무덤을 확인한 후 둘째 주의 첫째 날)에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있던)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요한 20,26) 첫째 날이면서 여덟째 날, 충만과 성취, 완성의 날이다.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한 새 시대를 일주일 경험했으나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죽인 유다인들이 두렵고 무서워 문을 잠가놓고 있었다. 그렇게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0,26ㄴ) 제자들은 벌써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성령의 은총을 입었으므로 온 예루살렘에 부활절 선포를 전하러 뛰쳐나가야 했었음에도 여태껏 두려움 속에 잠긴 문 뒤에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시고 제자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를 빌어주신다. 자신도 없고 믿음도 없으며 성실하지 못하고 자격이 없으며 기다리지도 않지만, 그래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 가운데에 기꺼이 ‘먼저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당신 부활의 증거와 교회를 새로이 나게 하시려고 ‘오시기에 지침이 없으신 분’이시다.
5. “토마스…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예수님께서는 “(쌍둥이) 토마스에게…‘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하신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토마스와 똑같은 쌍둥이다. 우리도 언젠가 열성이 북받쳐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했다가 불확실, 불신, 어둠의 순간에는 토마스처럼 “결코 믿지 못하겠소”를 서슴없이 내뱉는 자들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토마스처럼 보고 싶고 만져보고 싶은 논리와 눈앞에 보이는 증거에만 급급한 존재들이다. 주님을 보고 부활을 보면서도 “죽으러 갑시다”(참조. 11,15-16) 하며 죽음을 보는 존재들이다. “나는 길”이라 하시고 “나를 믿어라” 하시며 “너희는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하시는데도 “주님,…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는 토마스와 똑같은 존재들이다.(참조. 요한 14,2-6) 우리 형제자매들의 증언을 믿어야 하는 순간에도 스스로 보고 결정하는 존재들이 되고 싶어 한다.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도 끝까지 찾으시는 분이어서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토마스를 위해서도 오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토마스에게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몸이어도 수난과 죽음의 흔적만이 아닌 사랑의 흔적이어서 새겨지고 남아 있는 당신 사랑의 흔적을 보고 확인하라 하신다. 몸소 고난을 겪으시고 죽으셨던 몸이 영광스러운 부활을 거친 부활의 몸에도 남아 있다. 부활은 죽음과 죄의 흔적은 씻은 듯이 지우지만, 죽음보다 강하고 죽음을 초월한 사랑은 남는다. 아픈 이들을 낫게 해 주신 손, 어루만져 주신 손, 마음으로부터 터져 나와 누군가에게 가 닿았던 사랑의 손과 그 흔적이 부활하신 주님께도 그대로 남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도 그 사랑을 만져보라 하신다. 그런데 토마스가 과연 그 말씀대로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대어 보거나 넣어보았다는 기록은 없다. 복음은 그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사신 사랑을 깨우친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Ὁ Κύριός μου καὶ ὁ Θεός μου, Ho Kýriós mou ho Theós mou)!”(요한 20.28) 하고 대답하였다고만 전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주님”이시오 “하느님”이시다. 토마스의 주님이 곧 토마스의 하느님이시다. 복음서 전체를 통해 가장 간결하면서도 더는 말이 필요 없는 신앙 고백이다. 가장 완전하고 참된 선언이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신 말씀 그대로이고, 복음사가 요한이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하고 기록한 그대로이다.
토마스 안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토마스가 우리의 이상향은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하신다. 우리는 보지도 못하고 알아차리지도 못하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살아내신 사랑을 바라보며 믿기 시작한다. 기적이나 환상, 발현과 같은 것이 항상 우리의 믿음을 북돋아 주지는 않는다.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예수님의 사랑(‘기록의 표징’-30절의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징”에 반대되는 말로서), 주님께서 가운데에 서 계시는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부활 제2주간에 듣는 오늘 복음의 대목을 담은 요한복음 제20장이라는 대종장은 용서와 죄 사함, 우리가 한없이 부족한 처지임에도 항상 우리를 사랑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자비, 사랑하기를 절대로 멈추지 않고 참고 또 참으시는 하느님의 인내에 관한 노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