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르드의 성모님과 세계 병자의 날

매년 2월 11일은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세계 병자의 날’로서 육체적인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과 고통의 감소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의 날이다. 세계 병자의 날은 우리나라에도 두 번이나 방문하셨고,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년)께서 1992년에 제정하신 날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교황께서는 1991년 71세에 파킨슨병의 초기 증상을 보였으며 80세가 될 무렵에는 발음마저 부정확할 정도의 심한 상태로 병세가 발전해 갔다. 그러니까 교황께서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이듬해에 세계 병자의 날을 제정하신 셈이다. 노인성 뇌질환으로 알려진 파킨슨병은 20세기 최고의 복서로 알려진 무함마드 알리(1942~2016년)에게 40대에 발병해서 34년간 이 질병과 싸우게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필자는 살레시오 세계 총회에 참석차 로마에 체류하던 2002년 총회 참석자들만을 위한 특별 면담 자리에서 손을 떨고 침을 흘려가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전동 휠체어에 앉아 20여 분간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며 열변을 토하시던 교황님을 직접 만났다.(*이미지출처-영문구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이라는 교황 교서(1984년)를 통해 인간 고통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광범위하게 설파하면서 인간의 고통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과정임을 밝혔다. 교황의 제창으로 1993년 2월 11일 세계 병자의 날이 최초로 거행되었으며 이날에는 지금까지 매년 교황 담화가 발표되기도 한다. 이렇게 2월 11일이 세계 병자의 날이 되게 된 배경에는 성모님께서 1858년 2월 11일부터 프랑스 루르드에서 어린 소녀였던 베르나데트 수비루(1844~1879년)-훗날 성인이 되심-에게 18번에 걸쳐 발현하신 것으로부터 기원한다. 아직도 수많은 순례자가 루르드의 성모 경당을 방문하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전구를 힘입어 치유의 은총을 체험하고 있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9년 새로운 천 년을 앞둔 시점에는 레바논 베이루트 외곽 하리사 언덕에 있는 성모 마리아 순례지에서 세계 병자의 날을 지내도록 촉구하기도 하였다.

2005년 2월에 지낸 세계 병자의 날은 남달랐다. 병마와 싸우며 인생의 마지막 고통의 시기를 보내고 계시던 교황님을 위해 수많은 이들이 베드로 광장에 모여 기도하였고, 같은 해 4월에 교황 바오로 2세께서 선종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2013년 2월 11일 추기경 회의에 제출한 성명을 통해 당신의 사임을 갑작스럽게 발표하신 날이기도 하다. 세계 병자의 날에 온 세계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그 고통의 감소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약품이나 음식을 비롯하여 영적이고도 물질적인 연대를 표하면서 정성을 모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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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33차 세계 병자의 날 담화(*번역문 출처-CBCK)

(2025년 2월 11일)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희망은 오히려 시련의 때에 우리를 강인하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가 우리에게 ‘희망의 순례자’가 되라고 초대하는 2025년 희년에 우리는 제33차 세계 병자의 날을 거행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에게 바오로 성인의 말을 통하여 격려의 메시지를 줍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실제로 희망은 시련의 때에 우리를 강인하게 해 줍니다.

이는 위로의 말씀이지만 당혹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특히 고통받는 이들에게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심각한 질병에 걸려 몸이 점점 더 쇠약해지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값비싼 치료가 필요할 때, 어떻게 우리가 강해질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의 고통 외에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도우려 해도 도울 힘이 없다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때, 어떻게 우리가 힘을 낼 수 있습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하느님의 도우심과 은총과 섭리, 그리고 성령의 선물인 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808항 참조).

잠시 멈추어 하느님께서 고통받는 이들 곁에 계시는 세 가지 특별한 방식, 곧 만남선물나눔에 관하여 성찰해 봅시다. 

1. 만남.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며(루카 10,1-9 참조) 병자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9) 하고 선포하라고 이르셨습니다. 다시 말해, 아픈 이들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울지라도 자신의 병을 주님을 만나 뵙는 기회로 여길 수 있게 도우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병들었을 때 우리는 육체적 심리적 영적 측면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인간의 고통을 함께 나누신 하느님의 친밀함과 연민을 경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때로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는 결코 찾지 못할 힘을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십니다. 

질병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어떤 만남, 곧 우리가 삶의 폭풍우 속에서도 굳게 붙잡을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바위를 발견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는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 모두를 더 강인하게 해 주는 경험입니다. 질병은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언제나 구원의 신비로운 약속을 수반합니다. 고통은 하느님의 위로를 우리가 가까이에서 실제로 체험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약속과 생명을 지닌 복음의 충만함”(성 요한 바오로 2세, 젊은이들에게 한 연설, 미국 뉴올리언스, 1987.9.12.)을 알게 됩니다. 

2. 이는 하느님께서 고통받는 이들 곁에 계시는 두 번째 방식, 곧 선물에 관한 성찰로 우리를 이끕니다. 희망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그 어떤 것보다 더 고통이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러하기에 무엇보다도 고통은 마들렌 델브렐의 아름다운 표현처럼 늘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충실히 믿으면서”(「희망, 밤을 비추는 빛」, 바티칸 시국, 2024, 서문 참조) 받아들이고 가꾸어야 할 선물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만 우리의 삶과 운명은 영원이라는 무한한 지평 안에서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 안에서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이 “위대한 희망”이 삶의 시련과 걸림돌을 헤치고 우리의 길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모든 작은 불빛의 원천입니다(베네딕토 16세,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27.31항 참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걸으셨듯이(루카 24,13-53 참조) 우리의 길동무가 되어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그 제자들처럼 우리도 온갖 근심 걱정과 낙담을 주님과 나누며 우리를 비추고 우리 마음을 타오르게 하는 그분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처럼 우리도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고,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어 다시 한번 용기와 확신을 주시는 ‘더 위대한 실재’이신 그분을 지금 이 순간에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3.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는 세 번째 방식 곧 나눔에 관하여 살펴봅니다. 고통의 자리들은 흔히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나눔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아픈 이들의 침대맡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희망을 배웁니까! 고통받는 이들과 가까이 있으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믿음을 배웁니까!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돌볼 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랑을 발견합니까! 환자, 의사, 간호사, 가족, 친구, 사제, 남녀 수도자 등 어떤 모습이든, 가정, 진료소, 요양원, 병원, 의료 센터 등 어떤 장소에 있든,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희망의 ‘천사’이자 하느님의 심부름꾼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은총 가득한 만남들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인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간호사의 따뜻한 미소, 환자의 감사와 신뢰, 의사나 자원봉사자의 친절한 얼굴, 또는 배우자나 자녀, 손주, 사랑하는 친구의 염려하고 기대하는 모습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보배로운 빛줄기들로서, 역경의 어두운 한밤중에도 사랑과 이웃 됨을 통하여 우리에게 힘을 주며 삶의 심오한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루카 10,25-37 참조).

병중에 있거나 아픈 이들을 돌보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희년에 여러분은 특히 중요한 몫을 맡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함께하는 여정은 모든 이를 위한 하나의 표징, 곧 “인간 존엄성에 대한 찬가이자 희망의 노래”(「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11항)가 됩니다. 그 선율이 의료 시설의 병실과 병상 너머 널리 울려 퍼지며 조화로운 “사회 전체의 일치된 참여”(「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11항)를 사랑으로 이끌어 내도록 도와줍니다. 그 조화는 때로는 이루기 어렵지만 바로 그러한 까닭에 더 큰 위로가 되고 강력하며, 가장 필요한 모든 자리에 빛과 온기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온 교회가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감사드리며 기도 중에 늘 여러분을 기억합니다. 수많은 형제자매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때에 병자의 치유이신 성모님께 드린 다음과 같은 기도로 여러분을 성모님께 맡겨 드립니다.

천주의 성모님, 당신의 보호에 저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항상 모든 위험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시여.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축복을 보냅니다. 여러분도 부디 저를 위한 기도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5년 1월 14일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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