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일 ‘다’해(루카 6,17.20-26)

“행복하여라!”(루카 6,20.21) 수채화 by Maria Cavazzini Fortini, 2012년

오늘 복음의 바로 앞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셨다. 예수님 편에서 제자들의 선발과 선택이 있었다 하겠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혼자가 아니시며, 이스라엘 백성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사도가 주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은 셈이다.

사도들의 선발에 관한 식별을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그러했던 것처럼(참조. 탈출 32,30-34,2)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에 좋은 조용한 자리에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12)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하시는 때에 아버지와 통교하고 아버지의 뜻을 찾기 위해서 항상 기도하신다. ‘들음’이라는 진한 체험과 기도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에 관한 결정을 무르익게 하시고, 당신으로부터 ‘파견’을 받게 될 이들(아포스톨로이, Απόστολοι, Apóstoloi)을 선발하시며, 그들에게 당신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하라는 임무를 주실 것이다.

1. “예수님께서 그들(사도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렇게 기도에 따른 열두 사도의 선발과 기초 공동체의 설립이 있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루카 6,17) 그 많은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루카 6,18) 군중은 말씀과 치유, 그리고 악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찾아 예수님께 온다. 많은 이들이 이미 예수님께서 참 예언자이시고 참 라삐이시며 그분 안에 생명의 힘(뒤나미스, δύναμις, dýnamis)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 (당신 주변에 있는) 제자들을 보시며(루카 6,20) 서두에 “행복하여라” 하시는 말씀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참행복’을 말씀하신다.

행복하여라” 하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어법은 힘 있고 희망에 찬 환호이며 외침으로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익숙한 내용이었다.(참조. 이사 30,18;32,20 시편 1,1 등등) 인생과 역사를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이루어나갈 때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이를 이루시는 축복이 함께할 것임을 확인하고 선포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다. 따라서 모든 행복에는 하느님의 개입에 관한 약속이 담겼다.

오늘 복음인 루카복음이 전하는 “행복”은 4가지로서, 이는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실질적인 9개의 행복(참조. 마태 5,1-11)과는 다르다. 루카복음이 전하는 행복은 대상이 2인칭 복수로서 예수님 앞에서 그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직접 전달되는 듯이 묘사되고, 가난, 굶주림, 울음, 박해와도 같은 구체적인 상황이 기록된다.

마태오는 “마음이 가난”, “슬퍼하는”, “온유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 깨끗한” “평화를 이루는”…하는 식으로 상당히 추상적이고 개념적이며 영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듯이 보이지만, 루카구체적인 현실을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 앞에 서 있는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우는 이” “박해받는 이”라는 사람들에 대한 행복 선언 네 번과 “부유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불행 선언 네 번을 기록한다. 마태오와 루카의 행복 선언은 서로 구체적인 현실과 영적인 의미로 보완하여 함께 읽어야 한다. 루카식의 직설적이고 현실적인 대상에 대한 행복 선언을 마태오식의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대상에 대한 행복 선언으로 변질시켜 교묘하고 복잡한 해석을 붙여 참뜻을 흐리려는 시도가 교회 역사에는 아주 많았다.

결국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에 관한 두 가지 해석두 가지 증언이 있는 셈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힘과 확신과 희망을 주는 이 두 가지 해석과 증언은 서로를 보완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더 깊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행복에 관한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서, 또한 선포하면서 우리의 마음과 입술은 뜨겁게 불타오른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빵이 없어 굶주린 사람들, 우는 사람들, (미움과 모욕과 중상으로) 박해받는 이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하느님 나라의 대상자들로서 거론되는 이들 가운데 나도 과연 있는가 하는 물음을 하게 되면 아득하다.

물론 근본주의나 극단주의의 위험이나 스캔들에 빠질 필요는 없지만, 다시 한번 이 말씀을 깊게 읽어야 하고, 심각하게 나 자신에게 되물어야 하며, 이러한 물음에 나의 마음이 상처를 입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위 ‘진복眞福’이요 참행복은 도덕도 아니고 윤리도 아니다. 계시이며, 거부하거나 받아들여야 할 선포이고, 하느님 나라의 역동성과 논리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루카 12,31) 하시고,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하신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이시자 복음이시라는 깨우침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찾아야만 한다.

2.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하는 첫 번째 행복은 “가난한 사람들”, 복음 전체를 통해 항상 “가난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리는 행복이다. 제자들은 모든 것, 곧 가족마저도 버리고 가난한 자 되어 가난한 메시아를 따르는 벌거벗은 자들이다. 예수님께서 당시의 제자들을 두고 하신 이 말씀은 분명 오늘의 교회에도 하신 말씀으로서 교회의 본질을 규정하는 원칙이 담긴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행복하다 하신 이 가난한 사람들,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아니, 살펴야 할 정도라면 이미 교회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우리의 교회는 과연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일까?

루카 복음사가는 그의 두 번째 저술인 사도행전에서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34) 하면서 그 이유가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기”(사도 4,35) 때문이라고 밝히며 그리스도교의 이상향을 그리듯이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긴다. 루카는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이 나눔과 코이노니아의 채권자들이라고 하듯이 말한다. 그렇지만 교회는 말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 소위 ‘빈민 집단’이나 ‘거지촌’이 아니라 진정한 “나눔을 알아서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공동체를 살고자 한다.

첫 번째 행복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이 정말 가능하기나 할까? 가난 자체가 행복하다기보다 가난이라는 조건이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며 하느님만을 찾을 수 있도록 하므로 그런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댈 곳이 없어서 이 세상의 돈이나 권세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을 다스려주시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로 가난한 사람들은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어떤 말로도 할 수 없는 강하고 효과적인 표징이 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세상의 불의에 맞서는 표징이자 동시에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한 그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사聖事이다. “가난”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하며 그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참으로 자기들의 것이고 자기들이 누리는 그 행복을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정의가 세워질 나라요 코이노니아가 충만할 나라이다.

두 번째 행복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루카 6,21) 하신다. 실제 가난한 사람들처럼 현실적으로 굶주리면서 음식과 물의 부족으로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도 행복하다. 지금은 굶주리고 목마를지 몰라도 해방자이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호의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사가가 성모님의 노래인 마니피캇을 통해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라고 알려주었듯이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심판에서 드러날 정의이다.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 곁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 우리가 얻게 될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바로 그 심판이다. 우리가 자비를 베푸는 데에 게으른 것이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죽음을 초래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굶주린 이들을 보고도 그들을 배부르게 하지 않는 이는 그를 죽게 하는 것이며 형제를 살해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 하신다. 세 번째 행복에서는 우리 모두 어떤 면에서는 “우는 사람들”이어서 조금 덜 경직된 표현으로 이를 묵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번째 행복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인생을 사는 사람들과 그저 행복하고 기쁘게만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대비를 읽어야만 한다. 세상에는 그저 힘들게, 힘들게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의 수고와 피곤과 고통을 누군가가 대신 져주어서 그리 힘들지 않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며, 억압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억압받는 이들도 있다. “웃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기쁨과 노래이며 이는 억눌리며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약속이다.

루카복음이 전하는 마지막, 네 번째 행복은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2)로 이어진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는 박해와 적대감, 멸시와 모욕이 뒤따를 것이다. 그리스도께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하물며 그분의 이름을 지닌 제자들에게는 오죽하겠는가? 이 행복 선언으로 예수님께서는 미래를 내다보시고 예견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온 세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일어났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곳곳에서 이러한 일들이 극심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3)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박해를 통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자임을 입증할 수 있고, 그러한 박해가 천국에서 받을 상에 대한 보증이 되기 때문이다.

3. “불행하여라

이어지는 복음의 후반부라 할 수 있는 대목에서는 ‘참행복’(μακάριοί ἐστε, makarioi este, Blessed are you, happy)에 대비되는 ‘불행 선언’(οὐαὶ ὑμῖν, Ouaì hymîn, Woe to you)을 듣는다. 그저 자기만 알고 자기만족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경고이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왜곡하여 번역하거나 회자하는 ‘저주 선언’이 아니다.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담긴 탄식이다. “속으로는 자기 집이 영원하고 자기 거처가 대대로 이어지리라 생각하며 땅을 제 이름따라 부르지만, 사람은 영화 속에 오래 가지 못하여…영화 속에 있으면서도 지각없는 사람”(시편 49,12-13.21), 이미 형제와 자매들 안에 살면서도 죽음과 파멸을 향해가고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예수님의 애절한 호소이다.

이러한 “불행”은 이미 오래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치던 예언자들의 목소리로서(참조. 이사 5,8-25 하바 2,6-20)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길을 바꾸고 사고방식과 행동을 바꾸라는 부르심이었으며 진정 참되고 충만한 삶으로 들어서라는 초대였다.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그분을 성실하게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가 걷는 길에서 그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 치워지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진실로 의로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악인들은 행실과 말로 죽음을 불러내고 죽음을 친구로 여겨 그것을 열망하며 죽음과 계약을 맺는다.…그들은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삶은 짧고 슬프다.……”(지혜 1,16-2,20) 하는 지혜서의 말씀처럼 악인들의 행실과 말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쉽게 나뒹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불행”의 마지막 절이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루카 6,26)로 끝나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몸소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이 되어 사셨으니 그분의 제자 된 사람들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루카 6,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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