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경 구절이나 성인들의 저작물은 때로 우리를 놀라게 하다 못해 두려워하게까지 한다. 그런 내용은 우리를 치고 때린다. 어떨 때는 정신을 못 차리게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살아계시고 (반드시) 일을 내시고야 마는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흔드시는(unsettled by the living and effective word of the risen Lord)” 것이다. 12월 3일에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년)의 편지 또한 그런 내용 중 하나이다.

리지외의 성녀 테레사(1873~1897년)와 함께 ‘가톨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선교지에서 친구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람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쏟았던 자신의 노력과 신앙의 기본을 부지런히 가르치느라 고군분투했던 상황을 보고한다. 그러면서 그는 많은 이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다는 슬픈 사실을 인정하고, 「여기 많은 사람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맙니다.」라고 그 이유를 밝힌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에게 이 문제는 단순히 교회 인력의 부족이 아니라 더 잘 알고 행동했어야 했던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열정의 부족이요 게으름’이었다. 그는 「유럽의 대학 특히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가서 사랑보다는 지식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지식으로 열매를 맺도록, 미친 사람처럼 큰소리로 외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꾸짖을 마음을 자주 먹었습니다. “여러분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은 실로 우리를 자극하는 한편 현시대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이들을 부추기는 말씀이다. 이 편지글에는 우리의 주의를 끄는 두 가지 핵심이 담겨있다. 첫째는 다른 이를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역할과 소명이고, 둘째는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자비를 직접 알 수 있도록 우리가 쏟아부어야 하는 영혼들에 대한 우리의 열정과 열성이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이의 영원한 구원을 위태롭게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는 이의 영혼마저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는 일이었다.

다른 이를 신앙으로 이끌어야 하는 우리의 역할과 소명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우리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보다 더 깊은 신앙에 이르지 못한 우리 주변의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어떻게, 어디까지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신앙 여정을 서로 동반하면서 함께 걷는 것이 훌륭한 일이지만 그 자체로 끝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신앙에 나아오고 우리와 함께 교회에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도록 바란다. 어떤 이가 어느 날 계면쩍어하면서도 반 우스개처럼 다소 자랑스럽기라도 하다는 듯이 자기는 성탄 때만 성당에 나온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있는데, 그에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모릅니다.”라고 답한 적이 있다. 그는 그 반응이 자기가 기대했던 답이 아니었으며 내가 의외로 너무 진지하게 응대한다고 생각하며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일 미사가 대단히 중요하며 생명과 기쁨의 원천인 성체 성사 안에서 살아야만 한다고 역설하는 이를 만나 당황하면서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부끄러워하면서도 의외로 내심 기뻐하는 듯한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결국 그가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수긍하는 듯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에게 다른 이를 신앙으로 인도하는 일은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일이 아니라 기쁨 그 자체였다. 그는 하느님께서 그를 거룩한 선교 사명에 불러 선택하셨고, 다른 이들을 교회 공동체로 초대하는 다리가 되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에게 전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도를 받지 못한 이들과 함께 자신마저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었다.

이러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생각이 너무 과장되고 과도한 것은 아닐까 싶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네가 그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곧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고 살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에제 3,18)라는 성경 말씀을 들으면 이것은 너와 나의 살고 죽는 문제가 된다. 바오로 사도의 “사실은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라는 말씀에 따를 때, 이는 그리스도인의 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의무이자, 그 의무를 소홀히 할 때 나에게 닥치는 불행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로마 1,15)이라고 말한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우리의 소명과 의무를 과소평가하거나 외면하려는 경향을 지니지나 않았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또한 영혼들의 구원에 대한 우리의 열정과 열성을 점검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라는 한 성인 사제에게서 영혼들의 구원을 향한 그칠 줄 모르는 열정과 열성을 발견하는 것은 참 아름답고 멋진 일이다. 성인 사제는 「학문에 대해 쏟는 열성만큼만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과 자신이 얻은 지식에 대해 결산서를 제출해야 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면,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영적 수련과 다른 방법으로 자기 마음속에 하느님의 뜻을 알고 느끼도록 노력하고, 자신의 욕망을 떠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주여, 저는 여기 있나이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며 배운 이들과 동료 사제들을 향해 거침없이 토로한다. 영혼 구원만이 배움과 사제 성소의 유일한 목표라며 “자신의 욕망”을 경계하라고 촉구한다.

배웠다는 이들이나 사제로서 영혼의 구원 사업에 게을리하는 일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표현을 빌릴 때, 「…다른 이들 안에서 고통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지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면서, 추상적 개념들의 백과사전 안에 파묻히고 맙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제37항)」 하는 그대로가 되고 만다.

영혼들의 구원을 두고 식어가는 교회의 열정과 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끝없이 뜨겁기만 한 열정,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거룩한 갈망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하느님의 집을 향한 예수님의 뜨거움을 본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시편 69,10)라는 시편의 말씀을 생각했다고 복음은 기록해준다.(참조. 요한 2,17) 예수님 몸소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라며 탄식하셨다. 어디 그뿐이랴. 바오로 사도 역시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로마 12,11)라며 우리를 다그친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성인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생각하며 하나같이 남들이 보기에 과도하다 싶을 열성과 열정으로 불타오르던 뜨거움을 지닌 분들이었다.

뜨거운 거룩함의 불로 우리가 불타오를 때, 그 불이 현시대를 특징짓는 관성, 불만족, 그리고 끔찍한 권태를 불살라버릴 것이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께서 “그리스도께는 너의 몸 외에 다른 몸이 없으며, 이 땅에서 네 손과 네 발 외에는 손도 발도 없으신 분이시다.(Christ has no body now but yours, no hands, no feet on earth but yours.)”라고 말씀하신 그대로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복음을 전하라고 나를 택하셨고, 그 부르심에 따라 우리는 영혼들의 구원만을 생각하는 뜨거움으로 불타올라야 한다. 바오로 사도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사도 20,24)라는 말씀이 내 말이 되어야 한다.

***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8년 전에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사는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땅이 몹시 메마르고 가난에 시달리는 이 부근에는 포르투갈인들이 한 명도 살지 않습니다. 이곳 원주민 신자들에게는 신앙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므로, 그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뿐입니다. 그들을 위해 미사를 드릴 사제도 없고, 사도신경이나 주님의 기도, 성모송 그리고 십계명을 가르칠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온 후 저는 쉴 틈이 없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아직 세례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모두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흔히 말하듯이 오른손과 왼손을 구별할 줄 모르는 수많은 아이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자주 졸라서 성무일도를 보거나 식사하거나 또는 휴식을 취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하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도 거룩한 청원을 양심의 가책 없이는 거절할 수 없으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도 신경과 주님의 기도 그리고 성모송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 중에 머리 좋은 아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르쳐 줄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지극히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여기 많은 사람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맙니다. 유럽의 대학 특히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가서 사랑보다는 지식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지식으로 열매를 맺도록, 미친 사람처럼 큰소리로 외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꾸짖을 마음을 자주 먹었습니다. “여러분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학문에 대해 쏟는 열성만큼만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과 자신이 얻은 지식에 대해 결산서를 제출해야 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면,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영적 수련과 다른 방법으로 자기 마음속에 하느님의 뜻을 알고 느끼도록 노력하고, 자신의 욕망을 떠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주여, 저는 여기 있나이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인도까지라도.”(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성 이냐시오에게 보낸 편지에서-E Vita Francisci Xaverii, auctore H. Tursellini, Romae, 1596, Lib. 4, epist. 4[1542] et 5[1544], 고유 성무일도 독서기도 제2독서)

————————

Woe to me if I do not preach the gospel

We have visited the villages of the new converts who accepted the Christian religion a few years ago. No Portuguese live here the country is so utterly barren and poor. The native Christians have no priests. They know only that they are Christians. There is nobody to say Mass for them; nobody to teach them the Creed, the Our Father, the Hail Mary and the Commandments of God’s Law.

I have not stopped since the day I arrived. I conscientiously made the rounds of the villages. I bathed in the sacred waters all the children who had not yet been baptised. This means that I have purified a very large number of children so young that, as the saying goes, they could not tell their right hand from their left. The older children would not let me say my Office or eat or sleep until I taught them one prayer or another. Then I began to understand: “The kingdom of heaven belongs to such as these.”

I could not refuse so devout a request without failing in devotion myself. I taught them, first the confession of faith in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then the Apostles’ Creed, the Our Father and Hail Mary. I noticed among them persons of great intelligence. If only someone could educate them in the Christian way of life, I have no doubt that they would make excellent Christians.

Many, many people hereabouts are not becoming Christians for one reason only: there is nobody to make them Christians. Again and again I have thought of going round the universities of Europe, especially Paris, and everywhere crying out like a madman, riveting the attention of those with more learning than charity: “What a tragedy: how many souls are being shut out of heaven and falling into hell, thanks to you!”

I wish they would work as hard at this as they do at their books, and so settle their account with God for their learning and the talents entrusted to them.

This thought would certainly stir most of them to meditate on spiritual realities, to listen actively to what God is saying to them. They would forget their own desires, their human affairs, and give themselves over entirely to God’s will and his choice. They would cry out with all their heart: Lord, I am here! What do you want me to do? Send me anywhere you like – even to India.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