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주에 이어 여전히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 부분에 머물러 있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역에서 전도 여행을 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치유와 구마 활동을 하셨음을 기록한 다음, 첫 번째 제자들의 부르심(오늘 복음)을 배치한다. 그런데 루카는 마르코복음이 전하는 제자들의 부르심(마르 1,16-20)이나 마태오복음의 전하는 내용(마태 4,18-22)과는 다소 다른 각도에서 제자들의 부르심을 전한다. 루카의 기록은 여러 세부적인 풍부함과 함께 이미 교회의 사명까지 암시한다.
1.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스승님의 말씀대로”
나자렛(참조. 루카 4,16)에서부터 카파르나움으로까지(참조. 루카 4,31) 이어지는 예수님의 전도 여행은 티베리아(혹은 겐네사렛) 호수 주변의 도시들로까지 확장되었으며, 예수님께서는 매일매일 늘어나는 청중들에게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그들이 당신 가까이에 머물고 전하는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라신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루카 5,1),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물고기와 함께 그물에 걸려 올라온 잔해들을 정리하면서 다음 출항을 위해) 그물을 씻고 있었다.”(루카 5,2)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시몬의 소유)에 오르시어 그에게 물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강론대로 삼아) 군중을 가르치셨다.”(루카 5,3) 장면은 그 자체로 대단히 의미가 깊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 “말씀”께서 해변의 땅에 “말씀”의 씨앗을 뿌리시듯이(참조. 루카 8,4-15) 말씀을 듣고자 모인 사람들의 ‘마음 밭’에 말씀의 씨앗을 뿌리신다. 회당에 있는 강론대가 위엄을 갖추어 돌로 된 것이었다면 이곳의 강론대는 바로 시몬의 배, 교회라는 배였다.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마태 5,1)나 루카복음의 ‘평지설교’(참조. 루카 6,17)가 아닌 ‘선상船上설교’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라고 한다. 교회의 라틴어 대중 번역인 불가타Vulgata 번역에서 “Duc in altum!”이라고 번역한 내용을 인용하면서 여러 곳에서 자주 회자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특별히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이를 자주 언급하셨다. 영어로 굳이 번역하면 ‘put out into the deep’ 혹은 ‘head into the deep!’으로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머리를 깊은 데로 들이밀라’라는 표현이다. 주님께서 시몬에게 모든 것을 접어두고 용기와 희망만을 품어 저 넓은 바다로 나아가라고 하시면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신다.
그 말을 들은 “(고기잡이 전문가인)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루카 5,5) 시몬은 “권위”(엑수시아, ἐξουσία, exousía)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예수님을 그저 가르치는 선생이나 사람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주인’이라는 뜻에 더 가까울 “스승님”(에피스타타, Ἐπιστάτα, epistata, Master)이라고 호칭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순명한다. “배”는 초대 교회에서 항상 교회의 상징으로 이해된다. 교회의 중심에 가르침을 주시는 주님께서 계시고, 시몬이 그 배의 키를 잡고 있다. 배의 주인인 시몬이 예수님께 배를 인도하시도록 맡긴다. 오직 예언자이신 분의 말씀에만 매달려 깊은 물, ‘심연’을 향하여 두려움 없이 전진한다.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자마자 그 결과는 놀랍고도 즉각적이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루카 5,6-7) 예수님의 명령으로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뀐다. 인간들의 실패와 낙담 자리는 항상 주님과의 만남 자리가 된다. 주님께서 최악의 실패와 낙담의 자리인 십자가 위에 매달리시고 걸리신 이유가 그것이었다. 십자가의 실패가 있던 그 자리, 예루살렘의 무덤이 있던 그 자리에 부활이 있다. 밤새도록 헛수고만 했던 이들이 거둔 이 엄청난 성공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에서 온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 교회의 모든 사명과 나아감에 대한 예언이 담긴다. 반드시 예수님께서 가리키신 바에 따라야만 하고, 그분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믿음에서 비롯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부질없고 쓸모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어부로서 능력이 부족했을지라도, 그 어떤 결실을 얻을 수 없었을지라도, 예수님께서 인도해주시고 동반해 주시기를 청하면 모든 것이 변하고 달라진다.
2.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은 이 거대한 성공은 시몬에게 크나큰 놀라움의 표징이 된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시몬은 ‘무릎을 꿇는’ 조용한 경배의 자세로, 동시에 자신이 죄인임을 절감하며 주님께 자신이 감히 함께할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한다. 베드로가 “스승님”이라 부르던 예수님을 이제 “주님”이라 부르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는 것은 내가 잡은 좋은 물고기들만이 아니라 나의 실패와 죄를 내어드리기 위함이고,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담처럼 우리의 죄를 감추려는 바로 그 자리(참조. 창세 3,1-13)에서 우리를 찾으려 하시는지도 모른다. 하느님 앞에 내가 감히 설 수 없는 한없는 죄인임을 절감하고 내 자아와 자존심이라는 것을 꺾어 무릎을 꿇는 자리에서만 은총의 삶이 시작한다. 그 자리에서만 인간은 참된 자존심과 자아를 회복한다. “죄 많은 사람” 혹은 “죄인”은 예수님 앞에 선 “죄인인 여자”(7,37)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15,7) “죄인의 집”(19,7) 등에서 보듯이 루카에게 있어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단어 중 하나이다.
베드로의 마음에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시며 거룩하신 분임을 알 수 있는 계시가 주어지지만, 동시에 자신은 한 인간이요 죄인으로서 감히 그러한 계시를 받을 존재가 아니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반응은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을 뵈었을 때”(이사 6,1)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하는 반응과도 비슷하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인생에 개입해 들어오시는 것을 보았던 많은 예언자는 그러한 계시 앞에서 자신들이 그러한 계시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깊이 절감하곤 하였다.
바로 이 장면에 한 인간으로서, 한 예언자로서, 베드로가 정체를 알아챘던 예수님이 배 위에 계신다. 제4복음서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9)라고 분명하게 고백한다. 반면에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믿고 또 평생 그렇게 느끼며 살아간다. 간혹 스스로 죄인임을 잊을라치면 닭이 울어 그가 죄인임을 깨우쳐 줄 것이다. 사실 닭은 베드로를 향해 세 번 운다. 자기가 “하느님의 그리스도”(루카 9,20)라고 고백했던 주님을 두고 “모른다” 하고, 함께 어울리지도 않았다면서 “아닐세”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른다” 하면서 세 번이나 크게 주님을 배반했던 것을 상기시켜주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닭은 세 번 운다.(참조. 루카 22,54-62)
베드로에게만 놀라움과 두려움이 엄습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루카 5,9-10) 베드로 한 사람의 순종이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이익을 미치며 은혜를 끼친다. 하느님의 은혜는 절대로 인색하지 않다. 루카가 밝혀주는 이름들에 따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특별히 가깝게 지내게 된 이들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이 셋을 다른 사도들과 비교하고 차별하여 유별나게 더 사랑했다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살아있고 또 행동에 옮겨질 때 그 표현이 항상 같을 수 없을 뿐이다. 사랑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각기 고유하고 특별하게 마련이다.
3. “이제부터 너는…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루카 복음사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떠나 달라는” 시몬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 하시면서 소명을 약속하신다. 마치 ‘이제부터 너의 임무는 깊은 물로 나아가 악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 거센 파도와 지옥의 나락에서 사람들을 구하며, 길을 잃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해야 한다.’ 하시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행여 다른 이들을 사로잡고 개종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삼지 말고 예수님께서 나자렛의 회당에서 예언자 이사야서의 기록을 읽고 나서 그 말씀이 바로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신 모범을 따라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으라 하신다. 그렇게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루카 4,18 이사 61,1-2)해야 한다고 하신다.
교회의 선교는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교회 신자들의 수를 늘리는 것도 아니며, 세례를 주는 것만도 아니다. 교회의 선교는 무엇보다도 무엇인가가 필요한 이들을 그 필요에서 해방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무상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가 주님이신 예수님을 선포할 때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개종도 있을 것이며 주님을 따르는 교회의 지체가 되어 교회에 참여하게도 될 것이다. 숫자를 헤아리고 결과를 따지며 우리 손으로 이루어낸 눈에 보이는 것만을 찾으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선교의 역동성을 뒤집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1)라는 구절로 끝난다. 시몬과 동료들이었던 야고보와 요한 등이 결정적으로 변화한다. 물고기 잡는 어부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 그리고 제자가 예수님의 약속대로 “사람을 낚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이 된다. 그들은 이제 더는 배나 낚시, 그리고 물고기에 연루된 사람들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호수 기슭에)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 교회와 복음의 ‘급진성(radicality)’이 여기에 드러난다. 시몬과 동료 형제들은 예언자요 주님이신 분께 믿음으로 ‘예!’요 ‘아멘!’을 드리며 그분께 온 생을 의탁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인생의 온전한 의미를 두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정한다. 과연 제자들이 버린 것은 무엇이었고, 부르심을 받은 내가 버린 것은 무엇이었는가를 다시 물어야 한다.
루카 복음사가는 어찌 보면 물고기를 잡는다는 메타포를 활용하여 한 가지 단순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다.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예수님께서는 그 부르심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을 변화시키시고, 그 변화는 부르심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과거의 존재 자체를 모두 “버려두고” 미래에 주어질 변화된 새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모든 부르심에는 항상 부르심에 따른 사연이 있게 마련이지만, 분명한 약속도 한 가지 있다.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신실하신 하느님의 ‘약속 아래 살아가는’ 여정을 산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2티모 2,13)라고 하였듯이 시몬 베드로에게도 “닭이 우는 순간”이 있었고, 우리도 그렇게 “밖으로 나가 슬피 우는”(루카 22,60ㄴ.62) 순간이 있을 것이지만, 주님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실” 것이라는 그 약속 아래 우리는 우리의 부르심을 산다.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과 당신 첫 번째 제자들과의 만남이 이렇게 이루어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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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제자들의 부르심은 “말씀을 듣고 있을 때”(1절)가 시작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말씀”이다. “배 두 척”은 우리 내면의 주님 자리인 “나”와 “내 안에 자리 잡은 죄”(로마 7,17.20)라는 배 두 척이다. 주님께서 배 두 척을 보셨다.(2절) 주님이 먼저 나를 보신다. 어부들은 그물을 씻고 있었다.(2b) 일상이다. 평범한 일상 중에 주님께서 나를 보신다. 주님께서 “시몬의 배”(3절)에 오르신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그의 배에 오르신다. 우리 인생의 배 위에도 주님께서 언제인가 그렇게 불쑥 오르신다. 오르고 싶어 하신다. 그저 주님께서 오르시기만을 바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의 인생이라는 배에 오르시면 나의 인생이 달라진다. 배에 오르신 주님께서 “저어 나가달라고 부탁하신다.”(3절) 부탁인 듯 명령인 듯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께서 올라 자리 잡으신, 애초에 우리를 지으신 그대로의 “나”를 “저어 나가”(3절)야 한다. 나의 생긴 모습 그대로 위에서 “군중을 가르치신다.”(3b) 그대로일지라도 나를 도구로 삼으신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4절) 명령하신다. 부탁으로 시작했던 인연이 명령으로 바뀌고 기쁨의 구속이 된다. 주님 가르침을 따라 인도하시는 대로 “깊은 데로 저어 나가”(4절) “그물을 내려”(5절)야 한다. 내면 깊숙이 나를 살펴야 한다. 아직 “주님”을 “스승님”이라 부를지라도 그분 시키시는 대로 나아가야 한다.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5절) 우리의 공허와 헛수고를 그분께 내어놓아야 한다. 그래야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6절)를 잡는다. 깊은 곳에서 우리의 온갖 허물을 가득 잡아 올리게 된다. 그러면 비로소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고”(6절) 할 수 있게 된다. 나의 온갖 허물을 잡아 올려야만 비로소 형제와 자매들이 눈에 들어오고 나를 도와 달라 청할 수 있게 된다. “배가 가라앉을 지경”(7절)처럼 나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나의 죄와 허물을 동료들의 도움으로라도 길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그제야 든다. 그럴 때는 겁이 난다. 내가 너무도 큰 죄인이어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8절)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된다. 놀라움이 죄스러움과 미안으로 바뀐다. “스승님”이라 부르던 분을 비로소 “주님”이라 부르게 되면서도 두려움에 가득 차 눈물을 흘리며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 하게 된다. 그 두려움은 한편에서 나를 보고 또 다른 편에서 주님을 보는 “놀라움”(9절)이다. 그때에야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마라”(10절) 하시는 말씀이 귀에 들린다. 정신 차리고 깊은 곳에서 기적처럼 끌어올렸던 나의 온갖 죄와 허물, “모든 것을 버리고”(11절) 주님을 따라나선다. 주님을 만나 그분을 따른 내가 버린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렇게 시몬은 베드로가 되고, 죄인peccatore은 “사람 낚는” 어부pescatore가 된다. 그렇게 나선 길은 다시 세 번의 배반과 슬픔의 길일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도 도망할 길이며, 눈물로 돌아올 때야 처참한 십자가형의 죽음일지라도 감히 주님 달리신 모습대로는 도저히 십자가에 달릴 수 없어 거꾸로 못 박힐 때까지 이어질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