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알리는 방식

Pebble Beach(2024.12)

「엄마 오늘 저녁에 하늘나라 가셨어요~ 감사해요, 신부님. 얼굴이 정말 행복하셔서 마음이 편합니다」 출가외인이면서도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발병부터 꼬박 1년여 동안 힘드신 엄마를 수발해야만 했던 수녀님으로부터의 문자 소식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함께 거행하는 색깔로부터 그 슬픔을 치르는 방식과 절차, 심지어 음식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틀과 범례를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알리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럴 때는 충격과 함께 생각이나 감정이 슬픔과 눈물의 소용돌이에 뒤엉키고 시야와 이성이 흐려지면서 아득해진다. 그러면서도 사망 소식을 주변에 알리고 슬픔을 표현할 적절한 말을 찾아야 하는 절박한 필요가 생긴다. 대부분은 이미 익숙하고 검증된 상투적인 표현에 의지하게 되지만 이는 내심 진부하고, 내가 맞고 있는 감정과 슬픔을 담기에는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늘 하게 마련이다.

‘부고訃告’를 알리는 방법은 다양하고, 신앙을 가진 자나 그렇지 않은 자들 간에 다를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누구나 “죽음”이라는 직접적인 말을 피하거나 에둘러 표현하기 위해 언어의 곡예를 펼치는 것만 같다. 인터넷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故 ㅇㅇㅇ님께서 별세하셨기에 알려드립니다’, ‘저의 ( )께서 ( )월 ( )일 ( )시에 운명(별세, 소천)하셨기에 삼가 알려드립니다’, ‘( )께서 영면永眠에 드셨습니다’ 등등 부고 공지 예문들을 여지없이 알려준다. 이에 대한 응답의 예문들도 있는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와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다. ‘우리를 떠났다’나 ‘세상을 떠났다’, 혹은 장례식에서 여러 번 듣게 되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에 나오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와 같은 말들의 공통점은 어쩌면 누군가가 ‘죽었다’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기 위한 표현들이다.

신앙을 지닌 이들은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영원한 평화의 안식을 얻으셨습니다’, ‘주님께서 ( )를 부르셨습니다’, ‘( )를 하느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처럼 신앙을 지니지 못한 이들보다 다소 표현의 폭이 넓은 것이 사실이다. 나이가 젊은 경우에는 ‘꽃다운 나이에…’, ‘주님께서 한참 아름다운 꽃을 원하셨습니다’, ‘이제 천국에는 천사 하나가 더 있게 되었습니다’와 같은 표현을 하기도 하지만, 세속적이든 종교적이든 그 표현들에 담긴 공통점은 ‘죽음’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피해 ‘분리’라는 개념을 담는다. 죽은 이가 이제 더는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고 우리의 지각과 시야에서 사라졌으며, 우리와는 다른 차원에 있고 멀리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얼핏 듣기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라는 표현이 대단히 그리스도교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개념의 근원을 찾아가다 보면 하늘에서 행복하게 지내던 영혼들이 지상으로 내려오도록 강요를 받았다는 희랍 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은 인간 존재를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은 존재로 보면서 죽음을 통해 감옥과도 같은 생을 벗어나 본래의 집, 곧 하늘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엄밀히 말해 이는 그리스도교적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따른다면,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통해 아버지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를 때,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은 아버지께서 사랑하시어 그 사람 안에 와 살고 계시는, 이미 하느님의 집이다. 달리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통해 하늘(천국)로 돌아가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모신 이들 안에는 이미 하늘(천국)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은 최근에 ‘sit tibi terra levis(May the earth be light for you)’라는 라틴말에서 유래한 표현을 들먹이면서 (직역하면 ‘흙이 당신에게 가볍기를!’) 관에 흙을 덮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표현 역시 그리스도교의 영생에 대한 확신, 곧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 15,55)라고 외치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성인의 기념일처럼 ‘사망일’을 또 다른 ‘탄생일(라틴어, dies natalis)’로 본다. 우리말에도 ‘천상 탄일誕日’이라는 말이 있다.

소셜 미디어의 확산으로 요즘엔 부고를 알리는 것에 더해 고인의 사망 기념일을 기해 과거에 관습으로 지녔던 ‘3년상三年喪’을 넘어 정례적으로 누군가의 ‘사망 ( )주기’를 기념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를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너무 빨리 떠났고’, 그와 나 사이에 도저히 메꿀 수 없는 큰 틈새가 생겼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때에 서로 나누는 기억이나 인사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눈물을 지으며 ‘당신이 어디에 있든…’이라고 하는 표현 역시 감상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한 영혼이 광대한 우주에서 길을 잃고 ‘구천九天’을 떠돌고만 있을 것 같아 당황스럽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영혼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어 우리와 함께 있는(있게 된)’ 영혼을 추모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더는 육체적·물질적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그 누군가와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연다. 이는 죽은 이가 단순히 사랑하는 이의 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 더욱 깊어지고 강해질 수 있음을 뜻한다. 죽은 이와 산 이 사이의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힘을 입어 그 사이를 오가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우리가 함께 있는 것처럼 그와 함께 있게 된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저 먼 하늘에 계신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통하여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기까지……두루 퍼져나가게”(마르 16,20) 되었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참된 복음적 영성을 위해서는 죽음이 원죄에 따른 하느님의 형벌이라고 강조했던 과거의 신학을 넘어 죽음의 가치를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께서 물, 태양, 대지……만물을 인간의 생명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형제이며 자매로 여겼듯이 죽음도 그 어딘가에서 적절한 자리를 찾아 인간의 자매요 형제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묵시 14,13)라고 묵시록이 선포한 것처럼 죽음은 상실이나 박탈이 아니라 찬미요 행복이다.

우리의 죽음에 대한 비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두고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요한 16,7)라고 이르신 가르침에 따라 수정되고 맞춰져야만 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부재不在’가 아니라 당신께서 사랑하시듯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성령에 의한 더욱 강한 ‘현존’이요 ‘임재臨在’이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공생활 동안에 그분에게서 맛보았던 것보다 더욱 강렬한 사랑을 체험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람은 죽음으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가까워진다. 그런 의미로 이제는 ‘없다’가 아니라 더 가까이 ‘있다’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라고 하신 것처럼 소멸이 아니라 확장이다. 사람은 죽음을 통해서 빛이신 하느님을 만나 그 빛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다. 빛이신 하느님께서 그와 하나가 되시어 당신 존재를 끝없이 확장해가시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 2,9) 한 그대로, 죽은 이들은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들이 된다.

그렇게, 죽은 이들도 계속 성장하고 사랑을 키워간다. 1세기의 문헌인 <바룩이 전한 묵시록(Apocalypse of Baruch)>에 따르면 「(죽은 이들은) 죽음으로 저세상의 높은 곳에 살 것이며, 천사들과 비슷하고 별을 닮을 것이며, 은총 안에서 아름다움으로, 영광의 빛 안에서 빛으로, 어떤 형태로든 변하게 될 것이다.」(51,10)

그리스도교 영성 안에서 죽은 이들과의 관계는 단절되지 않고 변화한다. “죽은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i morti sono esseri invisibili ma non assenti)”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전적인 표현처럼 죽은 이들과 산 이들 간에는 소통의 방식이 더 강렬한 형태로 변화하면서 산 이들의 삶에서는 죽은 이들의 존재를 더욱 강렬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산 이들이 어두운 구름에 싸여 그들을 볼 수 없더라도 죽은 이들은 빛 속에 있어서 산 이들을 더욱 환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쁨으로 가득한 그들의 눈이 눈물로 가득한 우리의 눈을 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들은 훨씬 더 우리 가까이 있을 것이고, 행복한 모습일 것이며, 변화된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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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를 알리는 방식은 다양하고. 신앙을 가진 이건 그렇지 못한 이건 다르게 마련이지만, 모두 한결같이 어떤 식으로든 ‘죽음’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으려고 피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금기시되는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기 위해 언어적 곡예를 펼친다.(I modi per annunciare il lutto sono molteplici e variano tra credenti e non credenti, ma tutti, invariabilmente, evitano in ogni modo di parlare di ‘morte’, così si fanno vere e proprie acrobazie letterarie pur di non pronunciare quel termine che ormai è un tabù…)」(성서 학자 알베르토 마기Alberto Maggi의 ‘묵상집’에서)

One thought on “죽음을 알리는 방식

  1. 나이가 들면서 사랑하는 이들을
    차례로 떠나 보내는
    커다란 슬픔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제게는
    늘 숙제였습니다.
    근데
    늘 함께였습니다. 사진 속에서 기억속에서 추억속에서
    지금은 자연스러워졌고 어느새 내가 이 세상 하직할 때를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스스로 가벼워지려고 합니다.
    무겁지 않게. 무겁지 않게.
    지금 여기 현존하기.

    카라바지오의 그림자 라는 영화를 보고 온 날
    그의 그림이 그 시대의 민초를
    치열하게 탐구하고 그렸던
    진심으로 진지하게 살았던
    한 인간의 서사가 심금을 울린 날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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