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공소(모리알도)

성 베드로 공소 제대(이곳에서 도메니코 사비오가 복사하였다)

거대한 성전을 중심으로 조성된 베끼 돈 보스코의 생가터 ‘콜레 돈 보스코’에서 시골길을 걸어 나가다 보면 몇 분 거리에서 맨 먼저 도메니코 사비오가 10여 년을 살았던 집을 만나고 그가 다녔던 성 베드로 공소에 이어 돈 보스코께서 ‘여기가 나의 집’이라 불렀던 곳, 아홉 살 꿈이 있었던 곳들을 차례로 만난다. 누구나 압도적인 콜레 돈 보스코의 위용에 놀라지만 여전히 조그만 시골 동네인 그곳의 중심은 단연코 옛날부터 지금까지 시골 언덕 길옆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는 10여 평 남짓한 성 베드로 공소이다. 그렇지만 결코 작은 곳이 아니었으니 이곳은 살레시오회와 관련된 주요 성인들이 처음으로 만났던 위대한 성지였기 때문이다.

공소 옆에는 사진에서 보는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의 내용이다: 「모리알도 성 베드로 성당과 담당 사제 숙소 1829/30(이탈리아말과 라틴어를 가르치신 공소 담당 사제 돈 칼로소와 죠반니가 함께 지낸 곳) 1830(죠반니가 신학생 쥬셉페 카파소를 만난 곳) 1830년 11월 21일(돈 죠반니 칼로소 사망, 어린 죠반니노 상속을 거부) 1843-1853년(모리알도에 사는 도메니코 사비오가 복사하고 노래 부른 곳) 1848년 1월부터 1850년 9월까지(도메니코가 공소 담당 사제 돈 주카에게서 초등 1~2학년을 배우러 다닌 곳)」

돈 칼로소와 죠반니노 보스코

베드로 공소 외부에 설치된 안내판

돈 칼로소don Giovanni Melchiore Calosso(1759~1830년)와 죠반니노 보스코와의 첫 번째 만남은 1826년 11월 5일부터 9일 사이에 부틸리에라 마을에서 있었던 순회 피정 동안이었다. 돈 보스코 자신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피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부님께서 열 살짜리 어린 소년에게 피정 강론 내용을 물었고 피정 내용은 물론이고 사제가 되고 싶은 자신의 장래에 이르기까지 슬기롭고도 담대하게 대답하는 요한 보스코에게 감탄하신 신부님께서 평생 은인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소년 보스코가 생애의 첫 지도자요 친구를 모시게 되었다는 장면을 듣는다.(참조. 돈 보스코의 회상, 59-63쪽)

그러나 행복한 시절을 보내던 소년 보스코는 1830년 11월에 뇌일혈로 쓰러지신 신부님을 잃었으며 신부님께서 주신 금고의 열쇠마저 신부님의 가족들에게 넘기고 만다. 금고에는 신부님께서 요한 보스코에게 남기신 6천 리라라는 상당한 돈이 들어 있었다.(참조. MB 1권, 217쪽)

신학생 주세페 카파소와 죠반니 보스코

San Giuseppe Caffasso(1811~1860년)

1827년 10월 둘째 주일이라고 돈 보스코가 기록하고는 있지만, 둘의 운명적인 만남은 아마도 1830년쯤이었을 것이다.(참조. Aldo Giraudo e Giuseppe Biancardi, Qui è vissuto Don Bosco, Elledici, 2004년, 53쪽) 15살의 요한 보스코가 이미 신학교에 입학하여 덕행의 거울이라 불리던 4살 위 주세페 카파소를 만난다.(참조. 돈 보스코의 회상, 71-73쪽) 훗날 주세페 카파소는 돈 보스코의 초기 사제 생활 20여 년을 동반하며 사목 신학 스승이자 고백 사제이며 영적 지도자로서 돈 보스코의 은인이 된다.

사제품을 받은 뒤 5개월여 출신 본당인 카스텔누오보에서 보좌로 일하던 돈 보스코는 여러 좋은 제안에도 불구하고 “사제 학교로 오라”는 영적 지도자요, 은인이었던 카파소 신부님의 의견에 따라 11월 3일에 토리노의 사제 학교에 들어간다.(참조. 돈 보스코의 회상, 183-187쪽) 이렇게 하여 사형을 당하는 이들의 주보 성인으로 훗날 성인이 되신 카파소 신부가 어렵거나 버려지고 위험에 처한 청소년들의 친구로서 성인이 될 보스코 신부를 소년원에 갇힌 아이들을 비롯하여 여러 무리의 아이들과 만나게 한다.

도메니코 사비오

San Domenico Savio(1842~1857년) 생전의 모습과 가장 근접한 초상화

돈 보스코가 돈 칼로소, 돈 주세페 카파소와 처음으로 만나게 된 성 베드로 공소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대장간을 열었던 아빠를 따라 어린이 도메니코 사비오가 10여 년을 살았다.

아래는 성 베드로 공소 담당이자 선생이었던 돈 죠반니 주카Giovanni Zucca 신부가 도메니코 사비오의 선종 후 돈 보스코의 요청을 받고 쓴 편지이다.

***

무리알도, 1857년 5월 5일

사랑하는 보스코 신부님,

신부님께서는 제가 살고 있는 여기 시골 성 베드로 공소와 학교 옆에 살면서 이곳에 다니다가 세상을 뜬 사비오에 대해 몇 마디라도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기꺼이 쓰겠습니다. 제가 무리알도에 부임하여 지내던 초기에 다섯 살 남짓 되는 어린이 하나가 어머니와 함께 자주 공소 한쪽에서 기도하던 모습을 보곤 하였는데, 제 기억에 그런 나이의 아기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오가면서 저를 만나면 저에게 항상 공손히 인사를 하였는데, 신기하고도 놀라워 누구인지 궁금해하며 물었더니 대장간 일을 하는 사비오Savio씨 아들로 미노트Minot라고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이듬해에 학교에 오기 시작했는데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성실하고 순종적이며 부지런하였습니다. 학습 능력도 충분하여 눈에 띄게 금세 진보를 보였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성당 한쪽에서 기도하던 이미 드러난 신심 역시 시간이 가면서 놀랍게 성장하였는데, (그 어린 나이에) 매일 미사에 참여하면서 미사 복사를 배울 수 있는 능력도 생겼습니다. 그는 여러 전례를 사랑하여 침착하고도 열심히 성체강복의 복사도 하였고, 학교 친구 하나와 교송하며 찬미가나 성가를 불렀으며, 대장간이나 집에서 아빠와 함께 이를 연습하기도 하였습니다.

매년 자주 고백성사를 보았고, 천상의 빵과 지상의 빵을 구분할 수 있게 되자마자 그렇게 어린 나이에도 놀라운 신심으로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제 기억에 어쩔 수 없이 다른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리면서도 어떤 심각한 다툼을 벌인 적이 없었고, 못된 본을 따라 부적절하거나 위험하며 이상한 놀이에 빠진 적도 없었습니다. (그뿐인가요!) 다른 이들의 열매를 가로채거나 훼손한 적이 없었으며 연로하신 분이나 불쌍한 분들을 놀려먹는다든가 하는 일에 가담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를 볼 때마다 저는 ‘여기 착한 희망의 아들이 있습니다. 집에 있을 때나 밖에 있을 때나 부모들의 눈을 벗어나서도 한결같이 착한 애들이 매우 드문 법인데, 이 아이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부모 눈 밖에 벗어나서) 그릇된 행동을 하는 애들의 예는 불행스럽게도 많습니다. 대하는 사물이나 경험에서 오는 일상의 가르침에 따를 때, 브레메 후작께서 ‘여타의 다른 사랑처럼 부모의 사랑도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에 콩깍지가 덮여 (자녀들에게) 자주 도움이 되는 대신 해를 끼친다.……’라고 말한 것이 얼마나 옳은 말인지요.

당신의 사랑스럽고도 신실한 친구 돈 주카

(M. MOLINERIS, Nuova vita di Domenico Savio, Colle Don Bosco 1974, 63-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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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rialdo, 5 maggio 1857

Caro don Bosco,

tu desideri qualche cenno sul testé defunto Savio, riferentesi al fatto che a me vicino abitava e frequentava la scuola e la chiesa campestre di San Pietro.

Volentieri m’accingo a scriverti. Nei primi giorni che io fui a Murialdo, vedeva spesso un figliuolo di forse cinque anni venir in compagnia della madre a pregare sul limitare della cappella, con un raccoglimento veramente raro all’età sua. Nell’andata e ritorno sovente incontrandomi mi salutava rispettosamente, talché da meraviglia compreso e da rispetto, era ansioso di sapere chi egli si fosse, e mi disse essere figlio del ferraio Savio, detto Minot. Nel susseguente anno, cominciò a venire a scuola, mostrando as-

siduità, docilità e diligenza; e, siccome era fornito di capacità sufficiente, fece in poco tempo notevoli progressi. La pietà, già dimostrata sul limitare della chiesa pregando colla madre, cresceva in lui con gli anni; aiutò la sua capacità nell’imparare presto a servire la S. Messa, e vi si portava potrei dire quotidianamente. L’amore alle funzioni religiose lo portava a servire con compostezza la Benedizione del SS. Sacramento e cantar lodi e inni con un compagno di scuola alternativamente col padre, il che praticava anche in casa e nelle stalle.

Si confessava alquante volte fra l’anno e, appena fu capace di distinguere il pane celeste dal terreno, venne ammesso alla S. Comunione, che egli riceveva con una divozione in quella tenera età ammirevole. Costretto a conversar coi discoli, non mi consta che egli abbia avuto con essi qualche seria contesa e molto meno poi che si sia lasciato trascinare dal loro esempio a prender divertimenti smodati o pericolosi o indecenti; né a depredare, come si suole da simil marmaglia, le frutta altrui, o arrecar guasti o a burlare i vecchi e i tapini.

Nel vederlo io ho più volte detto: ecco un figlio di buone speranze, purché s’en vada fuori di casa, poiché in essa pochissimi ragazzi, tanto dell’uno che dell’altro sesso, fanno buona riuscita, per l’indolenza ecc. ecc. dei parenti. Gli esempi sono sgraziatamente molti, e la quotidiana maestra delle cose, l’esperienza, mi ha fatto toccar con mano quanto avesse ragione il marchese di Breme quando disse: l’amor dei genitori, come quell’altro amore, ha pure la benda sugli occhi e bene spesso, senza volerlo, invece di giovare nuoce (…).

Il tuo caro e divoto amico don Zucca.

(Da: M. MOLINERIS, Nuova vita di Domenico Savio, Colle Don Bosco 1974, pp. 6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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