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의 복음은 마르 9,38-48에서 취하는데, 신체 일부를 훼손해도 좋다는 식으로 잘못 읽힐 소지가 있는 44절과 46절을 건너뛴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예고 후에 제자들과 함께 카파르나움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에 오르신다. 그러나 공동체의 분위기는 그리 평화스럽지 않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마르 9,32), 베드로처럼 그 말씀을 듣고 나서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마르 8,32)하기까지 하였다. 그 와중에 한 사람이 간질병과 같은 증세를 보이는 “벙어리, 귀머거리 영”이 들렸다는 자기 아들에게서 못된 영을 쫓아내 달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였지만, 제자들은 그 영을 쫓아낼 수 없었다.(참조. 마르 9,14-29) 이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 사이에는 오해와 거리가 여전하였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이러한 긴장,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가 이어지는 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침들을 베푸시는 내용(9,38-10,31) 중 한 부분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당신의 말씀을 믿고 따를 것을 요구하시는데, 제자들은 불확실과 혼란 속에서 당황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다. 이처럼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과 예수님 사이의 긴장으로 특징지어진다.
1.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천둥의 아들들”(마르 3,17) 중 한 명으로 알려지는 야고보의 동생이자 첫 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넷(참조. 마르 1,16-20) 중 하나, 그리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목격한 특권을 누리기까지 하면서(참조. 마르 9,2) 예수님과 특별히 가까운 것으로 알려지는 요한이 예수님께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 9,38-39) 하고 여쭙는다.
요한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38절)라고 한다. 차라리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라고 해야 했지만,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라고 한다. 은연중에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자신이 스승과 동격이 되는 셈이다. 보통 예수님을 따르는 경우 “따른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제자를 따른다는 식으로 예외적으로 사용된다. 요한의 말은 예수님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는 듯하지만, 사뭇 그릇된 열정의 발로이고 질투를 담고 있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와도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렇지만 이런 복잡한 생각이 엉켜 있는 가운데 열두 사도만이 마귀를 쫓아낼 권한을 지니고 있고 또 그러해야 한다는 생각도 담겼다. 공동체 밖의 사람들이 지닌 선善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일종의 배타 의식이 깔렸다고 하겠다. 선을 자기 기준으로 통제하면서 그 선이 일종의 제도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이 지점에서 진정한 교회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 분열과 반대를 위한 반대를 양산하고, 어둠에 갇혀 있는 모든 이를 위한 교회가 아닌 한낱 세상의 한 기관이나 조직으로 전락시키고 마는 교회의 병폐 현상을 엿볼 수 있다. 현 교황 프란치스코의 계속되는 질타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가 아직 이런 분위기나 질병, 혹은 중독에 감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솔직히 고백해야만 한다. 다른 이들을 판단할 수 있고, 다른 이들보다는 우위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교회 안에는 일정 부분 상존한다. 우리 교회 안에는 여전히 철석같은 신념 아닌 신념으로 가톨릭교회 밖의 전통을 멋대로 판단하고, 우리 교회의 권위에 동조하거나 흡수되지 않으려는 이들을 단죄하려는 유혹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교회가 교회 자체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불행하다. 우리가 곧 그리스도의 지체(참조. 1코린 12,12-27)요 교회의 구성원들이므로 다른 구성원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태도나 영적인 자폐증에 걸린 이들도 불행하다. 예수님께서는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이나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당신을 따르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라고 강제하신 적이 없고 억지로 개종을 시키신 적도 없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아신다.”(2티모 2,19) 하는 말씀처럼 예수님만이 교회의 주인이시고 그 교회 안에 누가 있어야 할지를 아신다. 다른 이들을 뽑아버려야 할 가라지로 여기거나 판단하는 것은(참조. 마태 13,24-30) 스스로 ‘우리가 교회요 내가 교회’라는 생각이나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의 몫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형태의 그룹이나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가시는 분이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요한 3,8) 하는 말씀처럼 성령만이 당신의 힘을 통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활동하실 수 있다. 불행스럽게도 교회는 배타와 배척이라는 질병에 시달리면서, 다른 이들도 악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선을 행할 수 있고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이러한 교회의 병폐를 지적하시면서 우리 모든 교회의 구성원들이 우리 교회 밖의 다른 이들, 다른 종파의 그리스도인들, 설령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이들과도 어울리면서, 그들을 배척하거나 그들 위에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나란히 걸어야 하며 그들을 들어야만 하고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을 누차 강조하신다. “하늘에 있는 권세와 권력들에게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매우 다양한 지혜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에페 3,10) 하는 말씀처럼 다양성은 풍요로움이며 교회를 여러 고운 색으로 물들이는 성령의 지혜이다. 성령께서는 몸소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에페 5,27)으로 주님의 신부를 치장하시고, “어린양의 혼인날”(묵시 19,7)을 준비하신다.
2. “막지 마라”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善을 행한다면 우선 이 선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면서 그를 신뢰해야 한다.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면서 그 자리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나쁘게 말할 리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40)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만 선을 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우리 밖의 사람들도 사랑의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많은 이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면서”(마태 7,22)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루카 13,26) 하면서 심지어 성체성사에 참여하기까지 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런 이들 모두가 주님에게서 인정을 받고 주님께 속한 이들이 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주님께서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마태 7,23 참조. 루카 13,27) 하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진정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누가 나와 우리를 반대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인가, 그리스도의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께서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코린 3,22-23)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사람”을 강조하신다. “그리스도의 사람”, 곧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은 『모든 예언자가 진리를 가르치지만, 그가 가르친 것을 행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디다케 11,10)』라고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사람이고,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하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마음에 소금을 간직”(마르 9,50)하지 않으면, 우리가 “세상의 소금”(마태 5,13)이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은 우리 외부에 있는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 우리 자신과 매일 싸우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무엇도, 우리가 복음을 사는 것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진리의 보관소가 아니라 증거자가 되는 사람. 고상한 것을 말할 줄은 몰라도 고상함을 이루어 내는 사람. 절망의 자리에 희망을 선포하고 죄의 자리에 하느님의 자비를 알리며 모든 것이 죽은 듯 보이는 자리에 하느님의 개입을 선언하는 사람. 자신의 한계, 약함, 의심과 회의, 무능력, 어설픔을 스스로 알면서도 하느님께서 선택하셨고 사랑하셨기에 용감무쌍한 사람. 언제나 하느님의 뜻만을 선택하고 하느님과 긴밀한 일치를 사는 사람. 그 누구와도 소통할 줄 아는 사람. 민중이 사는 곳, 일하는 곳, 고통받는 곳, 기뻐하는 곳을 찾아 그들과 함께 선교사의 정신과 마음을 사는 사람. 그저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믿어 사람들이 모이는 장터, 강둑, 산, 길에서 그리스도의 입이 되어 사람들 앞에, 세상 앞에, 역사 앞에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 예수님을 믿는 “작은 이들”(42절) 이다.
3.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
44절과 46절을 건너뛰어 이어지는 42-48절의 복음 대목은 전례 복음으로 취하고 원래의 의도를 중시한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 전개나 급진적이고 과격한 표현상의 문제로 현대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원만하게 알아듣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일정 부분을 공관복음이 공통으로 전하고 있는(참조. 마태 18,6-9 루카 17,1-2) 예수님의 말씀이므로 이 말씀을 소홀히 하거나 없어도 되는 부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죄를 짓는 행위나 악행을 단호하게 거부하기 위해서 신체를 훼손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만큼 죄나 악행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죄짓게 하다”는 말이 4번이나 반복된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μικρῶν τούτων τῶν πιστευόντων, mikrôn toúton tôn pisteuónton)”(마르 9,42)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한다는 것은 그들이 걸어가는 앞길에 장애물을 두어서 그들이 치명적으로 엎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이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 차라리 자살이라도 하라는 말씀이지만 실제 자살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어진 손과 발, 그리고 눈, 다시 말하면 다른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주요 신체 부위를 조심해야 한다. 이를 통해 다른 이를 죄짓게 하기 때문이다. ‘행하고 가고 보는 것’들을 통하여 다른 이와 소통하는 데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주의해야만 한다. 자칫하면 우리의 ‘행동과 발걸음과 시선’이 다른 이들이 하느님의 나라로 가는 길에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 특별히 “작은 이들”, 많은 것이 어렵고 가난한 이들, 불쌍한 이들,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이들, 미소한 이들이 가는 길에는 더욱 조심해야만 한다.
다른 이를 “죄짓게 하는 이”는 다른 이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가 밟고 넘어가는 디딤돌이 되어야 하고, 다른 이가 나를 통해 올라가는 삶을 살도록 계단석이 되어야 하는 소명을 지녔다. 우리는 이웃에게 천국을 가리킬 수도, 지옥을 가리킬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불친절은 상대방에게 스스로 왜소함을 느끼게 만드는 걸림돌, 불의는 상대방의 자신감을 잃게 만드는 걸림돌, 실수와 약점, 결점과 잘못을 이해해 주지 못하면 악마의 자식을 만나게 하는 걸림돌, 누군가의 기대대로 살지 못했다면 그의 자존심과 자아가 망가지게 만드는 걸림돌, 실망을 준다면 그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는 걸림돌, 무시와 냉대는 스스로 이방인이 되도록 하는 걸림돌, 누군가의 이상과 꿈을 깨트린다면 그에게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 품삯을 가로채는 것은 도둑이요 강도로 변해 그를 노예로 만드는 걸림돌…이다.
신체 일부를 잘라내거나 눈을 빼는 것과 같은 행동은 과격한 표현이지만, “생명에 들어가는”(44.45절 2회 반복) 것, 곧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편”(마르 9,47)은 절대 포기할 수 없고, 우리가 간절하게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바이다. 우리는 “생명”을 원하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만을 원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앞에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길, 그리고 “지옥”(우리말 “지옥”은 ‘게헨나Gehenna, γέενναν’를 번역한 말인데, 이는 실제 예루살렘 근처 쓰레기 처리장을 일컫는 말), 곧 죽음과 어둠으로 가는 길 두 가지만 있다. 사랑에서 떨어져 나가고 영생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묘사되는 “지옥”은 공관복음에서 12번 정도 예수님의 말씀으로 언급된다. 게헨나는 예루살렘 서쪽과 남쪽에 자리한 ‘벤 힌놈 골짜기(여호 18,16)’의 그리스어 음역이다. 기원전 622년 유다 왕 요시아가 종교개혁을 단행할 때까지 아하즈와 마낫세 왕 시절 사람들이 그곳에서 몰록이라는 우상에게 어린이들을 제물로 불살라 바쳤다.(2열왕 23,10 예레 7,31-32;19,5-6) 대략 기원전 2세기경부터 종말에 죄인들이 갈 곳이라는 저주받은 곳의 상징적인 이름이 되었다.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나를 거역하던 자들의 주검을 보리라. 정녕 그들의 구더기들은 죽지 아니하고 그들의 불은 꺼지지 아니한 채 모든 사람들에게 역겨움이 되리라.”(이사 66,24·이사야서 끝절) 하는 예언자처럼 예수님께서 “지옥”이라는 형상을 언급하시지만, 예수님의 이 언급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단죄하거나 저주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깨어 있음을 촉구하시기 위함이다. 아멘!
나란히 함께 걸어가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