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6,24-35(연중 제18주일 ‘나’해)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빵을 많게 하시어 이를 나누게 하신 표징을 보고 배불리 빵을 먹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면서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이를 거부하시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가려는 제자들을 뒤에 남겨 놓으셨다.(참조. 요한 6,16-17) 제자들이 호수를 건너가는 중에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그러한 어려움 중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18-21)

1.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이튿날”(요한 6,22) 빵을 배불리 먹었던 군중은 아직도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다가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몇몇)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요한 6,24) 군중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정중하게) 물었다.”(요한 6,2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의 이러한 질문이 호기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동기를 품고 있으며, 불충분한 질문이고 모호한 질문이며 황당한 질문이라는 것을 아시고, 진지하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세메이아, σημεῖα, semeîa)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하신다. 군중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찾는 것은 인간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주신 분이라는 것뿐이었고,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굶주림을 해결하는 빵 해결사로서가 아니라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영원한 생명을 주러 오신 분이라는 당신의 진정한 신원을 깨우쳤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갈릴래아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빵을 보았지만, 또 다른 빵을 보지는 못하였고, 예수님의 행적이 지닌 의미를 읽지는 못하였으며, 포만감은 느꼈으나 그 빵이 예수님 생명의 선물이라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군중들이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하고 묻는다. 그러나 그들이 묻고 싶었던 것은 정작 “언제”가 아니었다. 빵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으므로 ‘무엇’을 묻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한때를 살면서 그 한 ‘때’의 의미를 물어야 하고, 또 내 인생이 ‘누구를 만나 의미를 담는가를 물어야 하며, ‘나의 인생이 이렇게 살아져야 하는가를 물어야 하는 소명을 지니면서도 정작 ‘무엇에 관한 질문과 답을 위해서만 인생을 허비하고 만다.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가? 또 어떻게 찾는가? 이렇게 질문한 군중들은 아래 28절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What must we do?(28절)” 하고 묻고, 또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What sign do you do?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30절)”하고 거듭하여 엉뚱한 질문을 한다. 참으로 인간은 하느님께 끊임없이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대로의 표징을 요구하는 습성과 아둔함을 지닌다.

사람들은 빵의 기적을 아직 신앙의 눈으로 보아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이심을 알아 모시는 표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군중은 예수님의 권능을 사실로 인정하지만, 그 사실의 참 의미는 깨닫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 권능에서 자기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 때문에,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표징으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생겨난다.(요한 2,11 카나의 첫 번째 표징을 상기할 것이다.) 사람들은 빵에만 사로잡혀 있었을 뿐 그 빵을 넘어선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빵과 군중들이 말하고 있는 빵이 달랐다는 말이다. 군중들은 육신의 배고픔과 허기를 없애주는 빵을 말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생명의 빵을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은 군중 속에 계셨으나 한없이 외로우셨던 분이시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빵의 기적을 올바로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모여들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세속적 욕심을 한껏 채워 줄 분으로 기대했고, 충분히 자신들의 왕이 되고도 남을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의 중심이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었던 것이다. 군중들은 “그럼,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하고 다그쳐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라고 분명하게 대답하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질 때에 하신 말씀이다.”(요한 6,59)에 따를 때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이렇게 군중의 모습과 태도를 드러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7)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긴 연설을 시작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듣는 이들이 해야 할 바를 알려주시고, 사람의 아들이신 당신께서 주시는 선물을 밝히시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군중이 해야 할 바는 오직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것”이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마태 6,11 루카 11,3)처럼 인간은 하느님께 죽음으로 운명지어진 육신을 위해서도 매일의 양식을 구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동시에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양식,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 죽음을 넘어선 양식을 두고도 이를 주시라고 확신과 믿음으로 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하신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필요한 음식을 평가절하 하시고 무시하신 것이 아니며,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신명 8,3 마태 4,4)라는 사실을 아시면서 영원한 생명, 사람의 아들만이 주실 수 있는 양식을 애써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이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이시며,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하였으니,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신 것은 분명 사실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 곧 허망한 것들은 결코 우리를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 『그 됨됨이가 심술궂고 악착스러워 걸근거리는 원을 채워본 적이 없어, 먹이를 얻은 뒤에도 전보다 더 허기져 하느니라.(단테, ‘신곡-지옥편 제1곡 99절’, 최민순 역)』 “썩어 없어질 양식”이란 허풍이요, 공허이며, 헛수고이고 무익한 것이다. 또한, 영적이 아닌 육적인 것이며, 필요한 오직 한 가지가 아닌 염려스럽고 걱정스러운 많은 것이며(루카 10,41), 하느님의 나라가 아닌 세상에 속한 부질없는 것이다. 영적인 것이 아닌 물질적인 것이며, 하늘에 속한 몸체가 아닌 땅에 속한 몸체들이며, 영광스러운 것이 아닌 비천한 것이며, 되살아나 썩어 없어지지 않을 것이 아닌 땅에 묻혀 썩어 없어지고 말 것들(1코린 15,40-46)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라”는 말씀을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지난 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에페 4,17.22-24)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니, 하느님의 일은 오직 믿음이다.

2. “하느님의 일그분께서 보내는 이를 너희가 믿는 것

갈릴래아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어떤 계명을 지켜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다시 묻는다. 이러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할 “일”로서,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하시면서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구체성이 결여된 듯한 대답을 하신다. 해야 할 행동 중의 행동, 하느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 하신다. 해야 할 유일한 일이 믿음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일”, 이는 결국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과 역사 안에, 그리고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 허락하신 일이다. 믿는 이들의 삶 안에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다는 바로 이 부분에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뒤, 그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두고 신약의 첫 교회가 처음으로 “신자들”(사도 2,44;4,32), 곧 “믿는 이들”이라고 그들을 불렀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며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다.

하느님의 일이란 그분의 십자가 발밑에서 십자가 위에 계시는 그분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 그리고 과연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일 뿐이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 자신의 행위로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오직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 곧 그분께서 파견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찬미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분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믿음은 하늘을 얻기 위해 땅을 보는 것이고 미래를 얻기 위해 현재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 믿음 하나로 한 형제가 되었고 자매가 되었으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것이다.

“믿는 이”들의 “믿는 것”은 잘 이해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어떤 지성적인 활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렬한 열망이고, 그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나도 걷고 싶은 간절한 희망이며 바람으로 사는 삶이다. 믿음과 행동, 관상과 활동 사이에서 자칫하면 추상적인 머릿속 믿음만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일”은 “믿는 것”이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자신만이 해야 하는 싸움을 마다하지 않으며, 자신만이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믿음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언제나 우리를 앞서 오시고 거저 오시는 은총과 선물에 감사할 수 있고, 그 감사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나 자신을 기꺼이 내어 놓겠다고 하는 책임감을 발동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그분께서 계시는 곳(참조. 요한 12,26;14,3;17,24)이라면 그곳이 어디든지, 또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묵시 14,4) 그곳에 있으면서, 그분과 함께 같은 생명을 나누며, “끝까지(에이스 텔로스, εἰς τέλος, eis télos)”(요한 13,1) “사랑”하는 것이다.

3. “내가 생명의 빵

예수님의 말씀에 군중들은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시편 78,24)라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요한 6,30-31) 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만다. 빵을 많게 하시고 나누게 하신 표징을 보았으면서도 그 표징이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을 세속적인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가 이번에는 모세를 들어 성경의 시편 말씀까지 인용하며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모양새로 그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율법서요 토라마저도 올바로 읽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이런 엉뚱한 질문에 다시 한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2-33) 하고 설명해주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무엇인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모든 것을 주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자신을 밝히신다. 이에 사람들은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 하고 요청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확연하게 “내가 생명의 빵이다.(에고 에이미, Eγώ εἰμι, Egó eimi)” 하고 대답하신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은 단지 예수님 편에서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온통 내어주시는 예수님 자신이다.

자칫하면 우리가 추상적으로만 이해할 수도 있는 예수님의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 이는 예수님이 우리 육신을 형성하는 구체적인 빵이고 음식이며,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요한 1,14) 할 때처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 하늘에서 내려온 말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보내신 말씀이시라는 뜻이다.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항상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음식으로 읽혔기 때문이다.(참조. 이사 55,1-3 잠언 9,3-6 등등) 이 말씀은 고대에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히브 1,1) 해 오셨지만, 이제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한 사람이 되신 바로 그분, 말씀이 되신 분의 말씀으로 이제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 생명으로 인도하는 빵으로서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내어 놓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심으로써 당신을 “빵”으로서 계시하시는 이 구절을 두고 김수환 추기경님은 예수님께서 우리나라에서 이 말씀을 하셨더라면, ‘나는 생명의 밥이다.’라고 하셨을 것이라 하면서 우리도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긴 연설의 1부를 이렇게 마무리하신다.

사실 오늘 복음 말씀은 강해할 수 있는 말씀이라기보다는 그저 받아들이고 찬미하며 흠숭해야 할 말씀이다. 예수라는 한 사람, 갈릴래아 변방 출신의 한 히브리 사람,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 바로 그분이 진실로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빵이며, 그분을 믿어 우리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인생을 맡겨야 하는 바로 그분이다. 이 사실을 누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고 풀이할 수 있을까? 어쩌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 말씀을 그저 받아들이라고만 요구하실지도 모른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말씀의 이 은총을 각자가 받아들이는 만큼만, 또 당신께서 허락하시는 만큼만,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4) 하시면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에게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신 주님의 약속을 그저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이 내 살이 되게 해야 한다. 아멘!

3 thoughts on “요한 6,24-35(연중 제18주일 ‘나’해)

  1. 은총으로 내 그릇을 크게 만들어
    말씀이 채워지도록,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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