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명의 사도들로 기초 공동체를 결성하시고 제자들을 공들여 양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러저러한 당부와 함께 권한을 부여하시고 파견하시면서(참조. 마르 6,7-13와 병행구),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루카 10,3) 하신다. 파견된 제자들과 성령 안에서 당신 권위로 늘 함께하실 것이면서도 제자들을 무척 염려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다. 몸소 그렇게 제자들을 떠나보내신 예수님께서는 이제나저제나 제자들이 성공적인 파견의 여정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셔야 했다. 이때의 예수님 마음은 자녀를 물가에 내놓은 부모의 마음, 먼 외지 고생길에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제자들이 마침내 돌아온다. 떠나간 못된 둘째 아들이 언제 오나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아직도 아들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에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던”(루카 15,20) 아버지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제자들을 반기셨을 것이다. 돌아온 제자들은 학교에 처음 다녀온 어린애가 학교에서의 일을 종일 이야기하는 어린이처럼 미주알고주알 그동안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마르 6,30) 루카복음은 이런 광경을 일흔두 제자가 파견 여행을 마치고 예수님께 돌아왔을 때 “기뻐하며 돌아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하면서 의기양양하였었다고 기록한다. 그렇지만 예수님과 제자의 이야기를 간결하게 전하고 싶은 마르코 복음사가는 제자들의 보고를 일일이 듣지 않고도 예수님께서는 그간의 사정을 이미 알고 계시다는 듯이 사도들의 보고에는 한마디 맞장구도 없이 그저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4) 하셨다고만 한다. 제자들의 고생을 눈에 보듯 훤히 아시고 어서 빨리 쉬게 하고 싶으셨던 주님께서는 “쉬어라.” 하신다.
파견된 자로서 살았다 할 것이 없는 파견된 이가, 복음을 전하기는커녕 주님 앞에 감히 돌아갈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부끄럽게 엉뚱한 곳에서 제 하고 싶은 대로 제 좋은 것만 실컷 즐기고 누리다가, 다른 친구들과 어쩔 수 없이라도 주님 앞에 돌아가야만 할 때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쉬어라.” 하실까?
“쉬어라” 하실 것입니다. 엉뚱한 짓거리를 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 찔리고 자괴감에 빠져 더 비뚤비뚤하던 그 영혼도 주님은 보시기 때문입니다. 더 모나고 더 상처 받았을 그 “방탕한” 영혼의 귀향을 애타게 바라시던 주님도 “이제 되었다.” 하시며 졸이던 마음을 놓고 “함께 쉬실 것”입니다.
글보다
죄송하지만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플리트비체!
저 거기 가봤어요. 아는체 하고 싶으면서
눈과 귀가 참 시원했던 추억이 생각나는 곳.
지금 쉬고 싶다는 간절함도 얹어봅니다.
아마 예수님께선 다 아시고 계시면서도
쉬어라 하실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쉬려고요.
재충전해 낼 쨍하고 양들 돌보러
가야지요. 감사합니다.
“쉬어라” 하실 것입니다. 엉뚱한 짓거리를 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 찔리고 자괴감에 빠져 더 비뚤비뚤하던 그 영혼도 주님은 보시기 때문입니다. 더 모나고 더 상처 받았을 그 “방탕한” 영혼의 귀향을 애타게 바라시던 주님도 “이제 되었다.” 하시며 졸이던 마음을 놓고 “함께 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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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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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거기 가봤어요. 아는체 하고 싶으면서
눈과 귀가 참 시원했던 추억이 생각나는 곳.
지금 쉬고 싶다는 간절함도 얹어봅니다.
아마 예수님께선 다 아시고 계시면서도
쉬어라 하실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쉬려고요.
재충전해 낼 쨍하고 양들 돌보러
가야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