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전개 순서로 보아 세례자 요한의 죽음(마르 6,17-29)과 빵을 많게 하신 기적(마르 6,35-44)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도들이” 예수님께 돌아와 그동안의 활동을 보고한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중에 쉴 틈이 없는 사도들의 활약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특별한 능력들이 실제로 발휘되었고, 예수님 역시 가엾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시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1.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다 보고하였다”
예수님의 ‘파견’을 받고 전도자요 선교사로서 사명을 수행한 제자들이 돌아온다. 이들은 ‘파견된 자’, 혹은 ‘선교사’, ‘전도자’라는 호칭을 받을 만하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마르 6,30)라며 돌아온 제자들을 “사도들(아포스톨로이, ἀπόστολοι, apóstoloi)”이라고 칭한다.
예수님의 파견을 받고 “떠나가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마르 6,12)하며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던”(마르 6,12) 제자들,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시고,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파견”(마르 3,14)하신 제자들이 자기들을 떠나가게 하신 분, 파견하신 분, 이름을 지어주신 분, 함께 지내신 분, 모든 것의 원천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마르 6,30) 자기들의 스승이요 라삐이며 예언자이신 분, 함께 살며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그분께서 명하신 대로 실천한 그간의 행적을 보고한다. 그간 그들이 떠나가서 행한 일들은 세상의 압제와 악에 맞서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회개의 필요를 알리며,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기꺼이 영접하고 그들의 믿음을 일깨우면서 그들과 함께 희망하고 해방을 꿈꾸었던 내용이었다.
마르코는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라고만 할 뿐, 앞서 언급한 마귀를 쫓아냈다거나 병자를 고쳐준 것과 같은 특별한 일을 했다거나 기적을 행하였다고는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파견 “명령”을 받아 그저 그 명령에 순종하며 그 명령을 수행하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주위에 다시 모여든 제자들이 “다 보고”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공동체의 참 목자로서 그들이 전도자로서 경험하고 살았던 내용을 ‘다 들으셨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파견을 받은 이들 간의 대화이다.(루카복음에서는 이를 조금 더 극적으로 묘사한다. 제자들은 “마귀들까지 복종했다”고 의기양양하고,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하신다. 참조. 루카 10,17-20)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 대화에서 기쁨과 슬픔, 장차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가라고 이르실 갈릴래아 선교에서 미리 맛본 열매와 실패를 나눈다. 교회는 예수님께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매일’, ‘성실히’ “보고”해야만 한다.
2.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사도들은 피곤했고, 예수님께는 이미 당신의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의 참수 소식이 전해졌다. 사도들의 피곤과 예수님의 슬픔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하신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마르 6,31) 까닭이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한 번 더 따로 부르시고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소명과 사명을 심화하고 쉬기도 하면서,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를 함께 나누자고 초대하시는 것이다. 제자들을 배려하신 자상한 초대이지만, 예수님께도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으니 특별히 끔찍한 죽음으로 당신에 앞선 선구자의 소명을 다한 세례자 요한의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 자신도 당신의 소명을 식별하고 재정비하셔야 하였기 때문이다.
“쉬어라” 하시는데, 하느님께서도 천지창조 때에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쉬다”는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시편 23,2)”에 나오는 동사 “쉬다”와 같다. 그뿐만 아니라, “쉬다”는 말은 광야의 방황이 끝나고 주님의 백성이 마침내 약속된 땅에 도달하여 쉬는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참조. 탈출 33,1-14 신명 12,9-10 여호 1,13 예레 31,2)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마태 11,28)” 사람들에게 안식을 약속하셨다. “참 안식”은 종말론적인 쉼이기도 하다.(히브 4,9-11 참조)
『제자들은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마르 6,31)이라 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가르치는 이들의 노고와 배우는 이들의 열성이 빚어낸 그 당시의 커다란 행복이 엿보입니다. 이런 행복이 오늘날에도 다시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말씀의 봉사자들이 제 몸을 돌볼 겨를조차 없이 신심 깊은 청중에 둘러싸여 지내는 그런 행복 말입니다.(성 베다, 672/673~735년)』
마르코는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라며 예수님과 사람들의 만남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고 심지어 음식을 준비할 시간도 없었고,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명시한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우리가 맞닥트리고 있는 많은 사람의 움직임과 소음, 우리를 함몰시키고 마는 위협들을 피해서 가끔 우리의 현실로부터 훌쩍 떠나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함께 일하고 만나는 사람들과 일에 진지하게 임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고독과 침묵, 그리고 조용함의 차원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 마음속으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달아나라. 침묵하라. 고요함을 찾으라.(‘사막교부들의 금언’ 중 아르세니오 교부)』 하는 음성을 듣게 된다면, 우리는 조용한 곳, “외딴곳”을 찾아서 생각하고 묵상하며, 우리의 마음에서 오는 소리와 침묵을 듣고, 우리의 저 깊은 곳에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모든 것이 겉도는 피상성皮相性에 머물고 말 것이며, 산만해져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채 길을 잃고 말 것이다.
『이제 여기 와서 일상을 벗어나거라. 잠시 그동안의 생각들을 내려놓아라. 너의 무거운 짐과 산만함을 한쪽에 치워두고 자신을 놓아주어서 주님과 함께 머물러라! 네 영혼의 방에 들어가 하느님을 찾는 데 도움 되는 것 말고 모든 것을 닫아라. 그러면 그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성 안셀모, 1033~1109년)』 “외딴곳(desolate place)”은 32절에서도 반복되는 말이다. 이는 “광야(deserted place)”와 거의 같은 개념이다. 마르코 복음에서 “광야”는 세례자 요한이 회개로 부르심을 펼친 곳이고(마르 1,3-5), 예수님의 유혹이 진행된 곳이며(마르 1,12-13), “외딴곳”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며 피정을 하신 곳(마르 1,35.45)이다. 『가장 값진 인생의 양식은 ‘외딴 곳’에서 얻어집니다. 세상의 영예로 둘러싸인 곳이나 우상이 범람하는 곳에서는 얻어지지 않습니다.(성 암브로시오, 340?~397년)』
3.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배까지 동원해서 “외딴곳으로” 떠나고자 했던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예수 일행이 도착할 것으로 예견되는 외딴곳의 해변인) 그곳에 다다랐기”(마르 6,33)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이 장면에 나타난 세 가지 동사를 살펴봅시다. 곧, ‘보다(to see)’, ‘가엾어하다/동정하다(to have compassion)’, ‘가르치다(to teach)’입니다. 우리는 이를 사목자의 동사들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8년 7월 22일 삼종기도)』
많은 군중을 보신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한다. ‘스플랑크니조마이, σπλαγχνίζομαι, splanchnizomai’라고 하는 유명한 동사이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 하는 하느님의 마음이다. 애간장(애는 정확한 부위를 지칭할 수 없으나 창자나 쓸개 정도이고, 이것이 간장肝腸과 합쳐진 말로 추정)이 녹아내리고 타는, 단장斷腸(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의 아픔이다.
이때 예수님을 찾아온 “군중”은 사실 확실하게 예수님을 믿는 무리도 아니었고 그저 막연한 기대로 예수님을 찾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던” 그들, 먹을 것도 없었고 아픈 곳을 치료해 줄 사람이나 제도도 없으며, 힘들게 살아야만 하는 이들, 삶의 질곡과 의심과 불확실에 대해 그 누구도 말해주거나 위로해주지 않는 이들을 가엾이 여기신다. 목자 없는 양들은 길을 잃을 것이고, 사나운 들짐승이나 이리 떼가 해칠 것이며, 끝내 다시는 목자를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모세가 “주님의 공동체가 목자 없는 양 떼처럼 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민수 27,17) 하고 주님께 기도한 것을 기억하시기라도 하듯, 수많은 예언자가 하느님의 백성이 억압받는 것을 보면서 괴로워했던 사실들(참조. 1열왕 22,17 탈출 34,5 즈카 10,3-12)을 생각하시기라도 하듯,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착한 목자”(요한 10,11.14)가 되실 수밖에 없다. 정확히 하느님께서 명하는 대로 순명하시고,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의 뜻대로 행하신다. 마르코는 이 상황에서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라고 기록한다. 앞서 마르코는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마르 2,2) 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마르 4,33)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뭔가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던 군중에게서 “말씀”에 대한 굶주림을 읽으시고 보신다. 결정적인 것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한 것처럼 “말씀”이신 분이 군중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이다.
오늘 복음에 바로 이어지는 구절은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마르 6,35) 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멍에를 메고 뙤약볕 아래에서 밭을 갈듯이, 피곤과 배고픔도 잃으신 채 불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자비의 멍에를 메고 동정과 인내와 온유함으로 군중을 그렇게 오랫동안, 길게 가르쳐주신다.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사도들의 피곤함을 보시고 안타까우셨던 주님께서 이제 군중이 말씀에 대해 허기짐을 보시고 그들을 달래주신다. 예수님의 여정과 행적은 오로지 사람들을 향한 자비로운 연민과 가엾음, 그 이외의 어느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 나름대로 세우셨던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로막는 군중이었지만, 예수님께는 이들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고 조급증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는 목자가 없는 양들과도 같았던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우리의 모든 결정과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비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모든 일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바로 그 마음”(필리 2,5), 곧 자비가 기준이다. 그 자비는 인간적인 감정처럼 느껴질지라도 하느님의 감정이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호세 11,7.9)라 하신 분의 감정이다. 많은 경우에 사목자들은 공동체를 위해 설령 좋은 생각이나 선택, 결정일지라도 이에 우선하여 이러한 기준을 먼저 묻고 또 물어야만 한다.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 하신 분의 뜻을 말하면서도 그 말속에 하느님의 자비와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담겨 있는지를 거듭 물어야만 한다. 그리스도교는 그저 일사불란하게 정의를 이루자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비로 정의를 이루고 자비 안에서 정의를 실행하고자 한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빵을 주시기 전에(이어지는 복음 구절-마르 6,35-44) 먼저 말씀을 주신다. 그러나 곧 빵도 주실 것이다. 온유하신 주님께서는 군중의 말씀에 대한 굶주림만 보시지 않고 빵에 대한 굶주림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멘!
외딴 곳으로
가기 전
분주하게 할 일이 많아
쉼에 대한 갈망이
큽니다. 지금. 지금.
마치 크눌프가 외국을 떠나
고국 산 얹어리에 앉아
쉼을 찾듯.
요즘 피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