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봇deadbot

*어디서나 ‘AI’라는 말이나 ‘인공지능’, ‘챗봇’이라는 말이 들리는 요즈음이다. 그리고 곳곳에서 그것만이 우리의 미래요 살 길인 듯한 뭔지 모를 확신이 후렴처럼 되풀이된다. 챗봇이라는 말은 이미 비교적 친숙한 어휘인데, ‘데드봇’이라는 말은 아직 많은 이에게 생소할지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말이나 개념을 ‘디지털 영혼’이니 ‘디지털 영생’, ‘디지털 사후 세계’라는 말로 풀어서 소개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글은 Alejandro Terán-Somohano라는 분이 2024년 6월 14일 wordonfire.org에 <AI 데드봇과 그리스도교 희망의 필요(AI Deadbots and the Need for Christian Hope)>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내용을 바탕으로 번역·재구성하여 쓴 글이다. 바탕이 된 영문 글이나 대표 이미지는 덧붙인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wordonfire.org/articles/ai-deadbots-and-the-need-for-christian-hope

***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1테살 4,13-14)

“죽음”이 모든 이에게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말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관한 사도 바오로의 믿음에 관한 말씀을 많은 이들이 모르기도 하려니와 받아들이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 틀림없다. 옛사람들은 여러 문학 작품에서 죽음을 하데스, 즉 어둡고 그늘졌으며, 우울하고 음침한 곳으로 묘사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죽음을 공포와 절망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구약 성경을 통해서 볼 때 유다인들조차도 죽음 이후에 무엇이 오는 것인지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구약의 시편 기자 역시 절망에 빠져 다음과 같이 외친다.

“제 영혼은 불행으로 가득 차고 제 목숨은 저승에 다다랐습니다. 저는 구렁으로 내려가는 이들과 함께 헤아려지고 기운이 다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저는 죽은 이들 사이에 버려져 마치 무덤에 누워 있는 살해된 자들과 같습니다. … 당신께서 저를 깊은 구렁 속에, 어둡고 깊숙한 곳에 집어넣으셨습니다. … 제 눈은 고통으로 흐려졌습니다. 주님, 저는 온종일 당신을 부르며 당신께 제 두 손을 펴듭니다. 죽은 이들에게 당신께서 기적을 이루시겠습니까? 그림자들이 당신을 찬송하러 일어서겠습니까? 무덤에서 당신의 자애가 멸망의 나라에서 당신의 성실이 일컬어지겠습니까? 어둠에서 당신의 기적이, 망각의 나라에서 당신의 의로움이 알려지겠습니까? … 어려서부터 저는 가련하고 죽어 가는 몸 당신에 대한 무서움을 짊어진 채 어쩔 줄 몰라 합니다. … 당신께서 벗과 이웃을 제게서 멀어지게 하시어 어둠만이 저의 벗이 되었습니다.”(시편 88,4-19 부분 발췌)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없다면 죽음을 ‘더 좋은 곳’, ‘평화로운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순진한 생각이거나 ‘그랬으면…’ 하는 정도의 바람으로 끝나고 만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모든 것이 끝’일 뿐이라고 하는 생각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두렵지 않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옛 고대인들이나 미신적인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거의 자연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시대에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깨어있고 지극히 이성적이라는 현대인들조차도 여전히 죽음에 관한 두려움에 시달린다. 영국의 밴드 뮤즈Muse는 ‘죽어 가는 어떤 무신론자의 생각(Thoughts of a Dying Atheist)’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뮤즈의 세 번째 정규앨범 Absolution의 13번째 트랙

「소름 끼치는 속삭임이 네 배게 밑에 도사리고 있어 / 너는 너에 대한 기억들을 내가 보지 못하게 해 / 네가 이 방에 있다는 것을 알아 / 너의 한숨 소리를 틀림없이 들었어 / 우리의 세계가 충돌하는 곳 사이에 떠다니는 / 그게 날 너무 무섭게 해 /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끝일 뿐이지 / 그게 날 너무 무섭게 해 /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끝일 뿐이지 / Yeah, yeah, yeah, yeah, yeah, yeah, whoa / 그 순간이 가까워졌다는 걸 알아 /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 믿음 없는 눈으로 바라봐 / 넌 죽는 게 두려워?……(반복)」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더 오래 살고 싶어 하는 본능에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라고 하는 식의 얘기는 설명이 안 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훨씬 더 심오한 차원을 담고 있다. 무의식적으로라도 죽음에 대하여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고 의심해보고,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다. 누구나 영생에 대한 갈망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갈망은 현재의 삶이 무한대로 계속되어야 한다는 식의 갈망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곧 지옥이 되고 말 것이다. 영생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오히려 지금보다는 뭔가 나은 충만한 삶이 있을 것이라는 갈망이다. 그것까지는 분명하지만, 인류를 괴롭혀온 가장 큰 두려움은 이러한 갈망이 좌절되고 부질없는 것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의 부재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사후 세계를 믿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후 세계는 죽은 아킬레스가 하데스의 모든 죽은 이들을 다스리느니 지상에서 가난한 노동자로 살겠다고 외칠 정도로 형편없는 곳이었다.(참조. 호머의 오디세이, 제11권)

영생에 대한 갈망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갈망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갈망이기도 하다. 이러한 갈망은 모든 문화와 시대에 걸쳐 죽은 이들과 교감하고 싶은 욕망이 되면서 신내림이나 심령술, 영매 같은 것으로 나타나곤 한다.

이 글은 오늘날 AI를 사용하여 소위 ‘데드봇(deadbots)’, ‘그리프봇(griefbots)’ 혹은 ‘사후 아바타(postmortem avatars)’를 제작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디지털 영혼’, ‘디지털 영생’, ‘디지털 사후 세계’라는 내용으로 돈벌이가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의 배경을 거론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돈벌이는 소위 ‘디지털 사후 세계 산업(digital afterlife industry: DAI)’을 형성할 정도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더 읽고 싶은 이들을 위하여: Hollanek, Tomasz, and Katarzyna Nowaczyk-Basińska. “Griefbots, Deadbots, Postmortem Avatars: on Responsible Applications of Generative AI in the Digital Afterlife Industry,” Philosophy & Technology 37, no. 2, 2024: 1-22)

이러한 내용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이용하여 산 이들을 착취하고, 죽은 이들과의 소통을 상품화하는 상조회사들의 여러 문제 중 하나이다. 죽은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이제는 사울 왕처럼 굳이 “혼백을 불러올리는 여자”를 소환하여 어둠 속에서 번거로운 절차로 망령들을 귀찮게 할 필요가 없다.(참조. 1사무 28,7-25) 이제는 휴대폰에서 간단하게 앱을 열고 신용카드 정보를 입력하는 것만으로도 죽은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과학과 기술에 의존하여 영원을 향한 우리의 갈망을 충족할 수는 없다. 아무리 발전한 과학과 기술일지라도 현실에 영원을 접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환상과 착시·착각 현상으로 잠시 우리를 속이는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베네딕토 16세의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석관石棺은 삶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죽음과 연관하여 이러한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고대 석관에서 그리스도는 원칙적으로 철학자목자 두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 당시 철학은 일반적으로 오늘날처럼 어려운 학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철학자는 참다운 인간이 되는 중요한 기술, 곧 삶의 기술죽음의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확실히 오래전부터 철학자인 척, 곧 인생의 교사인 척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진정한 삶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으면서도 말로 돈을 버는 사기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사람들은 인생의 길을 참으로 알려줄 수 있는 진정한 철학자를 더욱 찾았습니다.

3세기 말엽 로마의 한 어린이의 석관 위에 다시 살아난 라자로와 연관하여 예수님께서 한 손에는 복음서를 다른 손에는 철학자들이 들고 다니는 여행용 지팡이를 지니신 참된 철학자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죽음을 이기십니다. 복음은 방랑하는 철학자들이 찾지 못했던 진리를 가져다줍니다. 당시 석관 예술의 일반적인 형태로 오래 지속된 이러한 모습에서 지식인들과 일반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정말 누구인지, 그리고 참된 인간이 되고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시고, 이 길은 진리입니다. 그분 자신이 길이요 진리이시며, 따라서 우리 모두 찾고 있는 생명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넘어서는 길도 보여 주십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분이 인생의 참스승입니다.

목자의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의 것이 나타납니다. 초대 교회는 철학자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목자의 모습도 기존의 로마 예술에 등장하는 예들과 일치시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예술에서 목자는 일반적으로 대도시의 혼란 중에서 사람들이 갈망하는 평온하고 소박한 삶에 대한 꿈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러한 모습이 좀 더 깊은 내용을 담은 새로운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22], 1,4)

참된 목자께서는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는 길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 목자께서는 아무도 같이 갈 수 없는 완전한 고독의 길에서도 저를 이끌며 함께하십니다. 목자께서 몸소 이 길을 지나가셨습니다. 목자께서 죽음의 나라로 내려가시어 죽음을 이기셨으며, 이제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과 함께하면 나아갈 길을 찾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시려고 돌아오셨습니다. 죽음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 계시고 그분의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주어….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시편 23[22],4 참조)라는 자각은 신자들의 삶에 나타난 새로운희망입니다.(제6항)」

이러한 ‘희망’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변질’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정도로 훼손되고 말았다.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이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 ‘구속救贖으로만 가능했던 내용을 이제는 신앙으로써가 아니라 과학과 그 실천 사이에서 새로 발견한 연결 고리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베이컨으로부터 희망도 이른바 발전하는 믿음(faith in progress)이라는 새로운 형태가 되고 말았으니, 희망의 원천이 더는 하느님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요 진보라는 생각이 파고든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죽음을 포함한 인간 존재의 모든 것이 과학과 기술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럴 때 낙원이나 영생, 혹은 이와 유사한 것들 모두가 인간적 노력으로 달성해야 하는 것이 되고 만다. 영생이나 영원한 사랑, 영원한 약속과 같은 것을 들먹이면서 이에 관한 환상을 매매하려고 하는 이들은 적어도 그것이 일시적인 환상이라는 사실에서만큼은 정직해야 한다. 거기까지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이다.

베네딕토 교황은 말한다: 「…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을 찾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거부하는 이기적인 추구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이 자연법과 동등하다고 해석하게 하여 마침내 ‘자연에 대한 기술의 승리(victoria cursus artis super naturam)’를 이루게 된 실험과 방법의 새로운 상호관계입니다. 베이컨의 전망에 따르면, 그 새로움은 과학과 실천의 새로운 상호관계에 있습니다. 이는 신학적으로도 적용됩니다. 과학과 실천의 이 새로운 상호관계는, 하느님께서 주셨으나 원죄로 잃어버린 모든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재구축하게 되었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앞의 문헌, 제16항)」

한 사회학자는 어떤 이들이 이러한 ‘데드봇’과 같은 기술을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무덤을 방문하거나 고인故人을 추모하며 혼잣말로 대화하거나 사진이나 오래된 편지 같은 유품을 어루만지는 것과 같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추가되는 다른 한 가지일 뿐’이라고 이를 일축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고인이 남긴 편지나 쪽지는 그가 직접 쓴 것이고 사진은 그가 우리 곁을 떠났어도 그의 모습이다. 그러한 유품을 통해 그는 우리 곁에 무엇인가를 남겼다. 그렇지만 기술이 조합하고 조작해낸 아바타는 그 사람이 아니다. 그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더라도 그의 음성을 분석하여 음파를 복제하고 조합해 낸 것일 뿐이고, 그가 살았을 때처럼 우리에게 뭔가 메시지를 전해 오더라도 그의 언어 패턴을 흉내 낸 것일 뿐이다. 이런 내용 이상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사기詐欺다. 과학과 기술이 우리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다. 그 안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결코 찾을 수 없다.

베네딕토 교황은 계속한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인간은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이는 현세에도 해당됩니다. 살아가면서 커다란 사랑의 체험을 하는 바로 그때가 자기 인생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구원’의 순간이 됩니다. 그러나 곧이어 자신에게 베풀어진 그 사랑 자체로는 자기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깨지기 쉬운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죽음으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조건 없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인간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것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에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이러한 절대적인 사랑이 이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과 함께 존재할 때 비로소 인간은 개별적으로 어떠한 상황에 있는 ‘구원’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같은 문헌, 26항)」

한 언론 기사는 암 진단을 받은 한 남성이 곧 헤어지게 될 아내를 위해 인공 지능을 이용한 챗봇을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고, 또 다른 기사는 이미 세상을 떠난 딸과 ‘대화’하기 위해 챗봇을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두 사람 모두 자기를 달래주고 구원해줄 사랑을 찾고 있지만, 엉뚱한 곳에서 사랑을 찾다가 유사類似 사랑에 사로잡혀 그러한 환상을 제공하는 기술에 집착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별을 앞둔 첫 번째 기사의 주인공은 희망과는 분명 다른 의미에서 ‘체념’하며 “몇 주 후 저는 죽을 것인데, 죽음 너머에서 무엇이 저를 기다릴지 아무도 모릅니다.”라고 말한다.

이상에서 거론한 이야기들이 그저 현대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또 하나의 사례에 관한 넋두리에 불과한 것일까? 부활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고대 세계의 죽음관을 강타하며 기쁨을 자아내고 사람들의 회심을 이끌어냈다. 부활은 다시 부활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생에 대한 인간의 갈망, 앞서 떠나간 이들과의 소통과 친교가 헛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지상의 교회, 연옥의 교회, 하늘의 교회가 제각각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이며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마르 12,27)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음보다 강한 이 희망으로 삶을 바꾸면 그 희망은 번져 나간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으로 불타오르는 세상이라면 앞서 말한 환상 판매 기업들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글 첫머리에 인용했던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 모르고 지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희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1테살 4,13)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자칫하면 ‘죽음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슬퍼할 뿐인 인생’, ‘희망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나 않은지 깊이 숙고해야 한다.

One thought on “데드봇deadbot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