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종교의 시녀였던 시절이 있었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사회 안에서 ‘신성한 질서가 있는 곳의 주소지(address to sacred order)’로 인식되었고, 예술은 그 주소지의 중심에 있었다.
라스코와 페슈 메를(Lascaux and Pehe Merle)의 동굴 벽화, 아이스킬로스(Aeschylos, BC 525~456년)와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6~406년)의 비극,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의 건축,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년)의 시스틴 성당 천장화,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1525~1594년)의 폴리포니……이 작품들은 하나같이 신앙 공동체가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면서 자기를 거룩한 질서 아래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의 산물들이었다.
거룩한 질서가 있는 곳의 주소지로서의 예술은 톨킨(J.R.R. Tolkien, 1892~1973년)의 말을 빌릴 때 하위 창조물(sub-creation)이다. 다시 말해 예술은 신성한 질서가 마련한 소재로 그 질서를 거행하고 그 질서가 지닌 아름다움을 관상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예술을 미메시스(mimēsis)로 이해하려는 사고의 바탕이 되었다. 미메시스라는 이 희랍말은 자주 ‘모방(imitation)’이나 ‘재현再現(re-presentation)’이라는 말로 번역된다. 모방이나 재현으로서의 예술은 존재하는 것들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보고 듣고 느끼는 이들의 감각적이고도 지성적인 즐거움을 위해 다른 매체를 통하여 감각적이거나 지성적인 형태로 이를 다시 제시하는 것이다.
한 예로,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년)이 그린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 1478~1535년) 경의 젊은 시절 초상화 안에서 우리는 토마스 모어가 실제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처럼 그를 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 그림 안에 토마스 모어의 3차원적인 입체감이 모두 살아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홀바인의 2차원 캔버스 안에는 토마스 모어의 이목구비와 자세가 감각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놀랍게도 왕세자의 변덕에 맞서 하느님의 법을 수호하려는 그의 강직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거룩한 질서의 문화라는 주소지 안에서 자기 집을 잃어버린 예술들은 노숙자들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화와 예술에 뭔가 어떤 일이 일어나고 말았으며, 문화는 스스로 자신을 거룩한 질서의 주소지로 보지 않게 되었다. 사실 문화가 그러한 질서로부터의 해방으로 자기를 규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근대라고 하는 긴 이야기이다. 여기서는 그저 거룩한 질서의 주소지인 문화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예술들이 자기 집을 잃어버렸고, 노숙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가름하려고 한다. 예술들은 종교적인 의례나 실행, 심지어는 실제에 관한 종교적인 이해와도 통합되지 못하게 되었고, 예술은 이제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큐레이터, 콘서트홀의 매니저, 혹은 개인 소장품의 중개인들이 그들에게 마련해준 안식처나 피난처를 통해 어린 이주민이나 난민처럼 세상을 떠돈다. 교회와 신앙을 지닌 예술의 수호자들이 결국은 세속적인 장터로 대체되고 만 것이다. 예술은 신앙 공동체와 함께 붕괴하였으며, 예술의 엘리트 취향은 대중의 오락 취향으로부터 분리되고 말았다.
예술 자체의 성격이 바뀌었다. 소위 해방이요 자유라는 것이 거룩한 자리, 예술의 자리를 점점 먹어들어가면서 해방이라는 목소리가 ‘거룩한’ 것이 되었고, 소위 천재적인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시대의 ‘성직자’가 되어갔다.
자신의 가장 진실한 자아를 표현할 줄 몰랐던 우리 일반 대중의 것을 그 천재 예술가들은 할 줄 알았다. 천재 예술가들이 하위 창작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열정과 취향·선호로 적어도 한동안은 자유롭고 독창적인 무언가를 창작해냈다.
그러다가 우리는 예술과 인생이라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 고유의 문화·예술의 쇠퇴와 몰락이라는 장場을 맞고 말았다.
어떤 열정, 어떤 취향이나 선호가 중요한 것일까? 어떤 예술가들이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을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인간이라는 존재로 인식하도록 도울 수 있는 것에는 어떤 것이 가장 필요할까? 이러한 질문들은 이제 자신의 진정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각각의 예술적 추구로만 답할 수 있다. 어떤 예술가가 비록 자신만이 홀로 자기의 표현을 의미 있게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이 그에게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대니얼 맥키너니 박사Dr. Daniel Macinerny가 2024년 6월 3일 자신의 저서 <On Beauty and Imitation>의 출간에 앞서 자신의 책을 소개하는 글의 일부 번역문이다. 그는 예술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토마스주의 윤리 이론이 겹치는 부분을 연구하면서 실천 기반 예술 철학 개발에 역점을 둔다. 그는 휴스턴의 토마스 대학 교수였다. <On Beauty and Imitation>를 소개하면서 그는 ‘거룩한 질서에 근거한 문화와 예술에 관하여’는 Philip Rieff, My Life Among the Deathworks – Charlottesville, VA: University of Virginia Press, 2006을, 그리고 ‘현대 세계 안에서 예술의 변화’에 관하여는 Larry Shiner, The Invention of Art –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1;Charles Taylor, Sources of the Self –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89 등을 더 읽도록 권고한다. *번역 원문 출처-https://www.wordonfire.org/articles/on-beauty-and-imit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