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8,1-19,42(주님 수난 성금요일 ‘나’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by Roberto Ciaccio, Croce. Ferro, 2008년

오후 3시라고 알려지는 시각, 십자가의 시간에, 온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키리오스’(κύριος, Kýrios), 곧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에서 상대적으로 너무 길다 싶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분을 오늘 우리는 제4복음서, 곧 예수님의 십자가 밑까지 따라갔던 제자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알려진 제자의 증언을 통해 듣는다. 이 증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분에 대한 신앙의 은총 안에서 모든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가 깊은 묵상과 관상을 통해 전해주는 바요, 또한 부활하신 분께서 수난의 표징이었던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요한 20,20)를 보여주신 은총의 덕택이다.

그러니까 오늘 전례에서 듣는 내용은 공관복음을 전해주었던 이들의 신앙이 아니라 또 다른 제자의 다른 신앙에서 솟아 나왔으므로 공관복음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우선 대단히 길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을 두고 우리는 제4복음서만이 지니는 그리스도론적인 특수성과 그 의미를 파악하도록 총괄적인 독서에 머무른다.

1. 폭력의 공현

요한이 전해주는 예수님의 수난기를 읽는 이들은 누구라도 이 사건이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했던 대단한 폭력에 관한 기록임을 알게 된다. 폭력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예수님의 생애에 예수님께 가해졌던 폭력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조롱과 욕설, 비방을 퍼부어댔던 언어의 폭력으로부터, 급기야 유다의 배반을 부추겨 예수님을 사형에 이르게 하는 과정에서 자행된 고문과 박해, 그리고 살인에 이르는 폭력이었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요한 9,24) “그는 마귀가 들려 미쳤소.”(요한 10,2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그 사람을 풀어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요.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요한 19,12) 이런 엄청난 말들을 해대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하고”(요한 18,12)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요한 11,53)했던 것이다.

그렇게 이 모든 일이 이루어져 갔으니 이는 어차피 이루어져야 했던 운명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느님의 필요에 의한 것도 아니었으며, 오직 예수님의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못된 이들의 탓이자 그들에게 돌아갈 책임의 귀결이었다. 무엇보다도 폭력의 공현(발현), 이것이 예수님의 수난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간적이고 육체적인 연약함이라는 조건 때문에 고통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해오는 폭력,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지혜 2,14) 하는 것처럼 ‘의인’임을 알면서도 이렇든 저렇든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무조건 가해오는 폭력 때문에 수난을 겪으셔야 했다. 네 번째 복음사가가 굳이 언급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의 종’을 두고 네 번째 노래에서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 53,3)라고 예언한 대로 예수님께서 ‘고난받는 종’을 익히 알고 계시면서 겪으신 수난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인성人性 때문에 고통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공격하는 폭력으로 고통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질병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나시면서 인간의 고통을 알고 계셨으며 이러한 고통에 맞서 싸우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에서 예수님의 고통은 다른 것이었다. 폭력과 불의, 누군가의 사악함 때문에 겪으신 고통이었다.

예수님의 수난기를 따라가면서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묶여 종교적인 권력을 지닌 이들 앞에 끌려가시는 것을 본다. 예수님께서 대사제라는 한나스의 심문을 받으실 때 예수님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요한 18,22) 쳐서 맞으셨다. 막강한 황제의 세상 권력을 대신하는 빌라도 앞에 끌려가신 예수님께서는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당하시고, “가시나무로 된 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왕의 색깔이자 부유한 이들의 색이며 이 세상 권력자들의 색이요, “땅의 탕녀들과 역겨운 것들의 어미, 대바빌론”(묵시 17,5)의 색인 “자주색 옷”을 입히는 수모와 함께 다시 “뺨을 쳐대는” 조롱을 당하셨다.(참조. 요한 19,1-3) 채찍질과 고문, 조롱으로 엄청난 능욕을 가한 빌라도는 그런 다음에야 예수님을 군중 앞에 내놓으며 “자, 이 사람이요.”(요한 19,5) 하고 말한다. 바로 이 부분에 요한이 전한 수난기의 핵심적인 예수님 상像이 있다. 예수님은 인간이시고, 아담의 자손이시며, 형제의 폭력으로 희생된 아벨(참조. 창세 4,1-16)과도 같은 분이시다.

십자가 형이라는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의 존재와 삶을 부정하기 위해 행할 수 있는 극단적인 폭력 행위에 불과하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상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고통의 상이라기보다 인간이 다른 형제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인간의 의지와 폭력의 상이라고 해야 더 적절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들이 자행한 불의와 폭력으로 행해진 고통의 결과물을 보려 하지 않는다. 세상의 고통에는 자연적인 재해로 겪는 고통보다 인위적인 폭력으로 겪는 고통이 훨씬 클 터인데도, 인간들은 세상을 통치한답시고 스스로 벌이고 자행한 불의와 폭력으로 빚어진 인간의 고통을 바라보기보다는 오히려 지진이나 해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이들의 인간적 고통을 바라보며 가슴을 치고 눈물을 글썽이며 혀를 차는 것을 선호한다.

세상에는 굶주려 죽고, 핍박을 받아 죽으며, 박해를 받아 갇혀 썩어 죽어가고, 세상 권력이 결정하고 시행한 전쟁으로 죽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폭력의 희생자이시다. 우리 죄 때문에 저렇게 희생을 당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한다. 이 말은 깊은 의미에서 보면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실을 전혀 사실이 아닌 것처럼 그저 그냥 말하는 습성이 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종교인들이 죄라고 규정한 행위들이라기보다 우리 마음에 꿈틀거리며 살아있고, 우리 마음에서 삐져나와 우리가 그 책임을 떠맡겠다고 결정한 바로 그 폭력의 희생자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나 자신이 바로 그 폭력’이라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게 하신다.

예수님의 수난기가 바로 폭력의 공현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께서 이 폭력을 어떻게 살아내셨는가에 관한 증언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십자가는 폭력의 공현이요, 또한 사랑의 공현이다. 요한이 전해주는 수난기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불의한 고통을 어떻게 사셨는가에 관한 증언이다. 겟세마니에서 잡히시는 때로부터 수난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선 스스로 “나서시며”(요한 18,4) 그 수난에 임하시는 것으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 여러 번 그곳에 머무셨기에 배반자 유다도 잘 알고 있는 곳에 밤을 지내시러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신다.(참조. 요한 18,1-2) 탈출 시도나 배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없다. 배반자 유다가 군대와 함께 들이닥쳤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요한 18,4) 당당하게 “나다ἐγώ εἰμι, Egó eimi”(요한 18,6.8) 하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의 무장과 저항을 해제하시며,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하신다. 이처럼 수난에 임하시는 예수님의 첫 번째 모습은 자유의사이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요한 18,11)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폭력 앞에서 폭력을 거부하신다. 그것만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폭력이라는 사슬을 차단하고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대사제 한나스 앞에서 심문을 받으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였다.…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요한 18,20-21) 하시면서 거침없이 자유롭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드러내놓고”라고 번역하는 말은 영어에서 ‘publicly’라고 하면서 ‘공공연하게’라는 뜻이겠으나 ‘거침없는 자유’ 정도로 그 의미를 새길 수 있겠다. 중상모략에 직면하신 예수님께서는 거치적거림이 없으시다. “내가 잘못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요한 18,23) 하시면서 폭력적으로 뺨을 치는 경비병에게 따지듯이 꿋꿋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앙갚음이 서린 말씀도 아니고 자신을 방어하느라 웅크린 말씀도 아니다. 마지막에 빌라도 앞에서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요한 18,36) 하시면서 감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말씀도 하시면서 결국 당신이 왕이시고, 이를 위해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셨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요한 18,37)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나는 네가 진리에 속하지 않아 듣지 못하는 진리의 나라,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의 임금이다. 거짓과 모든 폭력의 어머니인 이 세상에 대항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하신다.

2. 사랑의 공현

제4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기에서 거침없는 예수님의 자유와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그린다. 실질적인 예수님 수난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최후의 만찬 대목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라고 서두를 시작한다. “끝까지, 에이스 텔로스εἰς τέλος, eis télos=영어 totally, for ever, completely, utterly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수난기를 관통하는 또 다른 축 하나는 예수님의 “사랑, 아가페, ἀγαπή”이다. 이 사랑은 당신의 아버지를 위한 사랑이고, 하느님을 위한 사랑이며, 당신에게 닥쳐오는 인간의 폭력으로 당신이 희생되시는 대가를 무릅쓰더라도 결코 그분의 뜻을 이루어내고야 마는 사랑, 인류와 형제를 위한 사랑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폭력을 무릅쓰시고, 스스로 그 폭력을 짊어지셨으며, 앙갚음으로 복수를 꾀하지 않으시고, 모욕과 조롱을 받아들이시며, 오직 침묵으로 하느님을 향한 “경외심”(히브 5,7)과 “예배”(히브 12,28)를 드리셨다. 폭력의 사슬을 끊어내시는 폭력의 수용과 그분의 온유하심으로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마르 15,31과 병행구) 하는 말대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신 분, 다른 이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폭력에 맞닥트리신 주님의 모습이다. 마침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당신이 “끝까지” 살아내신 “경외심”이요 “예배”의 충만이며 완성임을 말씀하고자 하신다. 그러고 나서는 당신의 영을 하느님께 넘겨드리는 것 말고는 이제 더 하실 일이 없으셨다.

3. 영광의 공현

제4복음서의 예수님 수난기는 그렇게 해서 예수님 영광의 공현이 된다. 예수님 수난으로부터 예수님 사랑의 영광이 된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가해온 인간의 폭력이라는 악,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사슬과 그 역사를 선善으로 끊어내시고 뒤집어엎으시어 승리를 거두신다. 예수님의 수난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한 사랑의 승리, 아가페 사랑의 공현이다. 오늘 전례에서 제2독서로 들은 히브리서는 이를 두고 이 모든 것을 요약정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습니다.”(히브 5,7)라고 기록한다. 이러한 히브리서의 정확한 통찰에 의해서 하느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오시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분을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루카 23,48) 한 대로 우리도 그분을 바라보며 사랑의 공현을 드러낸 십자가를 경배하고, 우리의 가슴을 치며, 그분의 사랑을 묵상하고 찬미한다. 아멘!

2 thoughts on “요한 18,1-19,42(주님 수난 성금요일 ‘나’해)

  1. 늘 부활절 마다 읽었던 이 복음은.
    묵상할 때 마다
    가슴 한 켠이 서늘했지요.
    불의에 대항하고
    의연하게 십자가형의 수모를
    받아들이시는 그 분.
    비겁함 뒤에 숨었던 저를
    봅니다.

  2. 매년 성금요일마다 예수님의 수난기에 대해 마음으로 들었던 거보다 의무감으로 듣고 흘릴 때가 많았습니다. 신부님의 복음 강해를 읽으며 십자가 위의 예수님 희생의 의미를 정성껏 되새겨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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