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6,1-6.16-18(재의 수요일)

사순절 여정을 시작합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따라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요엘 예언자의 말씀으로 열립니다. 사순절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그리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우리에게 “너희는 시온에서 뿔 나팔을 불어,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여라.”(요엘 2,15)라고 간청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초대입니다. 너희가 나에게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사순 시기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바쁘다는 핑계, 무관심의 핑계를 대며 “주님, 조금만 있다가 나중에 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오늘은 할 수 없지만 내일 기도를 시작할 것이고,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내일) 뭔가를 하겠습니다.” 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자주 말씀드렸는지요. 그렇게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갑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호소하십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항상 뭔가 할 일이 있고, 둘러댈 핑계도 있지만,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하느님께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다해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순절은 우리 삶 전체, 우리 자신 전체와 관련된 여정입니다.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길을 점검하고, 우리를 집으로 다시 데려갈 길을 찾으며, 모든 것이 달린 하느님과의 근본적인 결속을 재발견하는 때입니다. 사순절은 작은 꽃송이들을 수집하는 때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어디로 향해있는지를 식별하는 때입니다. 이것이 사순절의 핵심입니다. 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있습니까?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하느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 자신에게로 향해있습니까? 내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삽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거나 찬사를 받으며 선호를 받는 으뜸 자리를 찾는 것은 아닙니까? 한 걸음 앞으로 갔다가 한 걸음 뒤로 가는 식으로 왔다 갔다 하는(줏대 없이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주님을 조금 사랑했다가 세상도 조금 사랑하는 마음입니까, 아니면 하느님 안에 굳건한 마음입니까? 나의 위선에 (그저 그런대로) 만족하고 삽니까, 아니면 나를 옭아매고 있는 이중성과 거짓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까?

사순절의 여정은 노예의 삶에서 해방으로 나아가는 출애굽입니다. 사순절은 하느님의 백성이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 광야를 여행해야 했던 40년을 기억하기 위한 40일입니다. 그렇지만 이집트를 떠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실제 이집트 땅을 떠나는 것보다 하느님 백성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이집트, 항상 마음속으로 잡아끄는 이집트를 떠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이집트를 떠나는 것은 몹시 어렵습니다. 그 여정에는 (이집트에서만 나는) 향신채香辛菜(고수풀-탈출 16,31)를 그리워하는 유혹, 뒤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 과거의 기억이나 어떤 우상에 자신을 옭아매고 싶은 유혹이 항상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여정은 우리의 건강하지 못한 집착, 우리에게 달라붙어 떨치기 어려운 악습, 돈이나 외모 같은 거짓된 안정감, 우리를 마비시키는 탄식 같은 것으로 방해를 받습니다. 사순절의 여정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이런 환상들의 가면을 벗겨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을 향한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에서는 우리에게 해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었던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때임을 알게 됩니다. 그 아들처럼 우리도 집의 냄새를 잊어버렸고, 하잘것없는 것에 소중한 재산을 낭비하였으며, 우리에게는 행복하지 않은 마음과 빈손만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넘어졌습니다. 우리는 거듭 넘어지는 아들들입니다. 우리는 걸으려다가 몇 번이고 땅바닥에 엎어져서 아빠가 몇 번이고 일으켜줘야만 하는 어린 아기들 같습니다.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아버지의 용서,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고백성사는 아버지께 돌아가는 여정의 첫걸음입니다. 고백을 들으시는 신부님들께 고백성사에서는 채찍이 아닌 포옹으로 아버지처럼 하시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다음에 우리는 나병에 걸렸다가 치유를 받고 예수님께 돌아가 감사를 드렸던 사람처럼 예수님께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열 사람이 치유를 받았습니다만 예수님께 돌아간 그 사람은 예수님께 돌아갔으므로 구원도 받았습니다.(참조. 루카 17,12-19) 우리 모두 영적인 질병에 걸려있습니다만 혼자서는 치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뿌리 깊은 악습에 매여 있지만 혼자서는 끊어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마비시키는 두려움이 있지만 혼자서는 이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와 그분 발 앞에 몸을 던진 그 나병 환자를 본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가 필요하고, 그분 앞에 나의 상처를 보여드리면서 “예수님, 저의 죄, 저의 가련함과 함께 저 여기 당신 앞에 있습니다. 당신은 의사입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구하실 수 있습니다. 저의 마음을 고쳐주십시오.”하고 말씀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버지께로 돌아가라고 요청하시고, 예수님께 돌아가라고 요청하시며, 성령께 돌아가라고 부르십니다. 우리의 머리에 얹는 재는 우리가 먼지이며 먼지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먼지에 불과한 우리에게 생명의 영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지고 마는 먼지를 쫓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분, 우리의 먼지에 다시 사랑하도록 가르치시는 사랑의 불꽃이 피어오르게 하시는 분이신 성령께 돌아갑니다. 우리는 언제나 먼지에 불과할 것입니다만, 전례 노래가 말하는 것처럼 사랑에 빠진 먼지입니다. 기도하러 성령께 돌아갑시다. 탄식과 체념의 재를 태워버리는 찬미의 불꽃을 다시 발견합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 돌아가는 우리의 여정은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여정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가기 전에 그분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분께서 먼저 나서셨고 우리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낮게 내려오셨습니다. (몸소) 죄가 되셨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성 바오로께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라고 이를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걸으시기 위하여 우리의 죄 가운데로 내려오셨고, 우리의 죽음에 내려오셨으며, 우리의 죄를 만지셨고 우리의 죽음을 만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여정은 그분의 손에 이끌려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찾으러 집을 나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낫게 하시는 주님은 십자가에서 상처를 입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바꾸시는 성령은 먼지인 우리에게 강함과 부드러움으로 숨을 불어넣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20)라고 간청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는 우리의 길은 우리 힘으로 걷는 길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자기 힘으로 하느님과 화해할 수 없습니다. 안 됩니다. 마음의 회개, 그것을 표현하는 몸짓과 실천은 하느님의 힘이 먼저 불러일으켜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그분께 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공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은총을 받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은총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구원은 순수한 은총이요 순수한 무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와의 진지한 관계라고(참조. 마태 6,1)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시작은 우리에게 그분이 필요하고, 그분의 자비와 은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길, 겸손의 길입니다. 내게 그분이 필요하다고 느낍니까, 아니면 나 혼자서 충분하다고 느낍니까?

오늘 우리는 우리 머리에 재를 받기 위해 머리를 숙입니다. 사순절이 끝날 때 형제들의 발을 씻어주기 위해 우리는 더욱 숙이고 낮출 것입니다. 사순절은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 그리고 다른 이들을 향해 겸손하게 내려가는 것입니다. 구원이 영광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향해 내려가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를 작은 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여정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섭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침묵이라는 옥좌입니다. 하늘로 가져가셔서 당신의 간청하는 기도로 아버지께 보여드리는 그분의 상처를 우리는 매일 바라봅니다. 우리는 그분의 상처를 매일 바라봅니다. 구멍 난 그분의 상처에서 우리는 우리의 공허함, 우리의 불손, 우리 죄의 상처들, 우리를 다치게 한 주먹을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지적하시는 손가락이 아니라 우리를 안으시려고 펼치신 손과 팔을 봅니다. 그분 옆구리의 상처가 우리를 위하여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1베드 2,24 이사 53,5) 한 그대로 우리가 낫게 됩니다. 바로 그곳,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구멍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무한한 자비로 우리를 기도드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그 상처에 입 맞춥니다. 바로 그곳, 우리가 가장 약하고,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그곳에 그분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이제 우리를 만나러 오셨고, 사랑받는 기쁨을 다시 누리라며 당신께 돌아오라고 초대하십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2021년 2월 17일 재의 수요일 미사 강론, 베드로 대성당 *이탈리아어 번역 원문 출처 – 바티칸 공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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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4년 사순 시기 담화

하느님께서는 광야를 통해 우리를 자유로 이끄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계시하실 때 언제나 다음과 같은 자유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 20,2). 이는 시나이산에서 모세가 받은 십계명의 첫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탈출(exodus)이 무엇인지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겪은 속박에 무겁게 짓눌려 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자유로 이르는 길인 ‘열 마디 말씀’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형성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힘을 강조하고자, 우리는 이 말씀을 ‘계명’이라고 부릅니다. 자유로의 부르심은 힘든 요구입니다. 곧바로 응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정의 일부로 무르익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자주 과거를 그리워하고 주님과 모세에게 불평하면서 여전히 이집트에 매여 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느님 백성은 벗어나라고 부름받는 견디기 힘든 속박에 매여 있을 수 있습니다. 사막 같은 삶을 헤매고 우리 목적지인 약속의 땅을 필요로하며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들에 우리는 참으로 그러한 속박에 매여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순 시기는 은총의 때입니다. 이 은총의 시기에 호세아 예언자의 말처럼, 광야는 다시 한번 우리 첫사랑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호세 2,16-17 참조).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형성하시어 우리를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파스카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신랑처럼 우리 마음에 사랑의 말씀을 속삭이시며 우리를 당신께 다시 한번 이끄십니다.

종살이에서 자유로 가는 탈출은 추상적인 여정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사순 시기를 구체적으로 거행하려면, 그 첫걸음은 현실에 눈뜨기를 바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당신께서는 보시는 하느님, 무엇보다도 들으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곧바로 보여 주셨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탈출 3,7-8). 오늘날에도, 억압받는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의 울부짖음이 하늘까지 올라갑니다.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봅시다. ‘우리는 그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나요? 그 울부짖음이 우리를 괴롭게 하나요? 아니면 우리를 움직이나요?’ 온갖 많은 것들이 우리를 한처음부터 하나로 묶어 준 형제애를 부인하면서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람페두사를 방문했을 때, 저는 무관심의 세계화에 맞서는 길로서 점점 더 절실해져 온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창세 4,9) 다시 한번 이와 같은 두 질문을 귀여겨듣고 우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파라오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사순 여정도 구체적이 될 것입니다. 그 지배는 우리를 지치고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갈라놓고 우리에게서 미래를 앗아가는 성장 모델입니다. 지구와 대기와 물은 오염되었고 우리 영혼 또한 더럽혀졌습니다. 참으로, 세례로써 우리의 해방 여정이 시작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종살이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향수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익숙한 것에 대한 안도감으로의 끌림, 우리 자유를 훼손하는 방향으로의 끌림입니다.

탈출기 이야기에는 중요한 세부 사항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보시고 마음이 움직이시어 자유를 가져다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파라오는 꿈을 억누르고 하늘을 보지 못하게 차단하며,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고 진정한 유대가 거부당하는 이 세상이 결코 바뀔 리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파라오는 모든 것을 속박합니다. 이렇게 질문해 봅시다. ‘나는 새 세상을 원하는가?’ ‘나는 묵은 것과 타협하는 데에서 벗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저의 많은 형제 주교 그리고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일하는 많은 이의 증언 덕분에, 저는 꿈을 억누르는 희망의 결여에 맞서 그리고 하늘에 가닿아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 없는 울부짖음을 위하여 우리가 싸울 필요가 있다는 확신을 점점 더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희망의 결여’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 종살이에 대한 향수와 다르지 않습니다. 탈출은 가로막힐 수 있습니다. 인류가 보편적 형제애의 문턱에 도달했고, 과학적, 기술적, 문화적, 법적 수준도 모든 이의 존엄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인류가 아직도 불평등과 갈등의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치신 적이 없습니다. 사순 시기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일깨워 주시는 위대한 시기로 맞이합시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 20,2). 사순 시기는 회개의 시기, 자유의 시기입니다. 우리가 해마다 사순 제1주일에 기억하듯, 예수님께서도 친히 자유로이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강생하신 성자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우리 앞에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파라오와 달리 신민(臣民)이 아니라 아들딸을 원하십니다. 광야는 다시는 노예 상태에 빠지지 않겠다는 개인적인 결심을 통하여 우리의 자유가 성숙해질 수 있는 장소입니다. 사순 시기에, 우리는 정의의 새로운 기준을 발견하고, 아직 가지 않은 길을 향하여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과 탈출기가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듯이, 이는 어떤 싸움이 따르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마르 1,11).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 20,3). 하느님의 이 목소리에 원수와 그의 거짓말이 대적합니다. 파라오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 우리 스스로 세운 우상들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우상들을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로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능해진다는 말, 모든 이에게 우러러 보인다는 말,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한다는 말. 그러한 거짓말이 얼마나 유혹적일 수 있는지 모든 인간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흔히 걸어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돈에, 특정 계획이나 생각이나 목표에, 지위에, 전통에, 심지어 특정 개인에게 집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는커녕 무기력하게 만들고, 만남 대신에 갈등을 낳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인류도 있습니다. 곧 거짓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 작은 이들과 겸손한 이들로 이루어진 백성입니다. 우상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 우상들처럼,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시편 115[114],4 참조). 반면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열려 있고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세상을 치유하고 지탱하는 소리 없는 선의 힘입니다.

이제 행동할 때입니다. 사순 시기에 행동한다는 것은 또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기도 안에서 멈추고, 사마리아인처럼 다친 형제나 자매가 있는 곳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이웃의 육신 곁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서로 관계없는 세 가지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짓누르는 우상들과 우리를 구속하는 집착을 쫓아버리는, 개방과 자기 비움의 단일한 행위입니다. 그렇게 할 때 위축되고 외로웠던 마음이 회복될 것입니다. 속도를 늦추고, 그런 뒤에, 멈추어 봅시다! 사순 시기에 힘입어 우리가 재발견하게 되는 삶의 관상적 차원은 새로운 힘을 퍼뜨립니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우리는 형제자매가 되고, 서로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곧, 위협들과 적들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동반자들과 길동무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꿈이자, 우리가 노예살이를 뒤로한 채 여행을 떠나는 약속된 땅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가 재발견하고 함양하고 있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은, 사순 시기가 시류를 거스르는 크고 작은 공동체적인 결정들을 내리는 때라는 것도 시사합니다. 개인들과 모든 이웃의 일상을 바꿀 수 있는 결정들은, 예를 들어, 우리가 재화를 획득하는 방법, 피조물을 돌보는 법, 그리고 눈에서 멀어진 이들 또는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포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입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것을 꼭 실천하도록 초대합니다. 바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그들의 삶의 방식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와, 사회 안에서 그들의 존재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자신의 기여에 대해 고찰하는 시간을 따로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의 속죄가 예수님을 실망시켜 드린 그런 종류의 것이라면, 이는 우리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마태 6,16). 이렇게 하는 대신, 가장 작은 이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부터 시작하여, 다른 사람들이 기쁨 가득한 얼굴을 보게 하고, 자유로운 느낌을 받도록 하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사랑을 체험하도록 합시다. 이러한 일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의 모든 이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가 회개의 때가 된다면, 불안해하는 인류는 새로운 희망의 불꽃인 솟구치는 창조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여름 제가 리스본에서 만난 젊은이들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하겠습니다. “계속해서 찾아 나가고, 위험을 감수할 준비를 하십시오. 현 시점에, 우리는 막대한 위기를 직면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의 고통스러운 애원을 듣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단편적으로 치러지는 제3차 세계 대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말마의 고통이 아닌 생명을 창조하는 과정에, 그리고 마침이 아닌 역사의 위대하고 새로운 장의 시작점에 머무르며 우리의 세상을 바라볼 용기를 냅시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위한 용기가 필요합니다”(대학생들에게 한 연설, 2023.8.3.). 이러한 것이 회개의 용기이고,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면서 생겨난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희망이라는 막내 여동생의 손을 잡아 주기 바랍니다. 믿음과 사랑은 이 동생을 걸어가게 하고,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어 줍니다.(샤를 페기, 「두 번째 덕의 신비를 향한 문」-Le Porche du Mystère de la deuxième vertu 참조)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의 사순 시기 여정을 축복합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3년 12월 3일 대림 제1주일, 프란치스코)

* 번역문 출처-https://cbck.or.kr/

One thought on “마태 6,1-6.16-18(재의 수요일)

  1. 하느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어리석게도 갖은 핑계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힘들 때마다 하느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셨고 내 삶에 중요한 가르침을 알려 주시고 계시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얼마나 소홀히 했는지 깊이 뉘우칩니다. 사랑으로 기다려주신 그분께 감사하며 더욱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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