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12-15(사순 제1주일 ‘나’해)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르 1,13)

사순 제1주일이다. 사순 시기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시기이다. 초순初旬, 중순中旬 하듯이 순旬은 10일을 의미하며, 사순四旬이란 40일을 뜻한다. 사순절四旬節이란 교회 전례 안에서 속죄의 재계齋戒(재계할 재, 경계할 계-부정한 일을 멀리하고 심신을 깨끗하게 함)를 통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며 부활축일을 준비하는 재의 수요일부터 성목요일의 주님 만찬 저녁 미사 전까지의 40일이다. *재의 수요일 주간의 수목금토(4) + 5주간 곱하기6, 주일 제외(30) + 성금, 성토(2) + 성주간의 월화수목, 목요일 점심까지(4), 이렇게 40일이다.

‘나’해의 사순절을 시작하는 사순 제1주일의 복음은 무척 짧다. 단 4절이다. 사실은 지난 연중 제3주일 복음에서 이미 14-15절의 내용을 심도 있게 읽은 바도 있다. 오늘 복음은 아주 간결하지만, 강렬하여 예수님의 유혹에 대한 본질적인 내용을 전달해주면서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를 담는 듯하다.

1.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 1,12) 세례 때에 예수님께 내렸던 성령께서 예수님을 하늘이 열리지 않은, 가히 닫혔다고 할 수 있는 “광야”로 “곧(곧바로, εὐθὺς, euthýs)” “내보내셨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 하느님과 갈라지게 하는 악마, 곧 “사탄”이 창궐하는 곳, 예수님을 시험하려 들 곳으로 몰아붙이다시피 한다. 복음의 문맥상 “광야”로 나가심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다음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신 첫 번째 행동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이사 40,3) 하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어둠의 광야, 시험의 광야, 유혹의 광야로 들어가신다. 공생활 전 하느님의 시험, 자기 소명의 직면, 성부와 자신 간의 확인 과정, 마치 수도자의 수련기와 같은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예수님은 거룩한 영과 함께 광야에 내보내진다.

광야”는 광야의 사람인 세례자 요한과 그의 의식주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의 길을 닦기”(이사 40,3) 위해 본질적인 것만을 들어야 하는 자리이다. 광야는 바위, 돌, 거친 관목들, 파충류, 메마름, 야수 같은 것들이 횡행하는 곳이다. 4세기 사막의 교부들이 마귀들과 싸우러 나간다고 했던 광야는 분명한 진실을 뒤엎으려는 거짓이 드러나는 자리이고, 불타오르는 뜨거운 사랑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이기심이 드러나는 자리이며, 예수님의 이름을 지우려는 미움과 시기, 질투가 드러나는 자리이며, 희망과 생명을 앗아가려는 절망과 두려움이 드러나는 자리이다. 우리 인생이라는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가 그러했던 것처럼 불평과 반역, 그리고 저항의 자리인 동시에 하느님과의 만남, 우정, 사랑이 어우러져 하느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는 자리이다.(참조. 호세 2,16-22 예레 2,2-3 신명 8,2 에제 16,23)

2. “사십 일 동안 유혹을”

사십일 동안”(마르 1,13)이라 한다. “사십”이라는 숫자는 성서에서 대단히 깊은 의미, 특별히 정화의 의미를 담은 상징적 숫자이다. 노아는 밤낮으로 비가 내린 40일의 홍수를 맞았으며(창세 7,12.17),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만나를 먹고 양을 치며 사막에서 지냈고(탈출 16,35 신명 8,2 탈출 16,35 민수 14,33-34), 모세는 40일 동안 시나이 산에서 단식하며 10계명을 새겼고(탈출 24,18;34,28), 여호수아는 동료들과 함께 가나안을 정찰하기 위해 40일(민수 13,25)을 보냈고, 에제키엘은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40일간 한쪽으로만 누워 지내야 했으며(에제 4,4-6), 엘리야는 천사가 주는 음식을 먹고 40일을 걸어 호렙 산으로 갔고(1열왕 19,1-8), 마침내 우리 주님께서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40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사도 1,3)”라고 한 40일이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께서 40일 동안 사탄의 유혹을 계속 받으신 것처럼 묘사하지만, 그 내용을 명시하지 않고(마태오-빵, 성전꼭대기, 매우 높은 산 / 루카-빵, 높은 곳, 성전꼭대기), 마태오나 루카 복음은(마태 4,1-11=루카 4,1-13) 40일이 지나서 3가지 유혹을 받으신 것으로 묘사한다.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르 1,13) 하면서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렇게 의도적으로 아주 단순하게 예수님의 유혹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활 내내 악마의 유혹이 계속될 것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바리사이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마르 8,11)하며 유혹할 것이고, 겟세마니에서는 “공포와 번민”이 유혹에 휩싸이게 할 것이며(참조. 마르 14,32-42), 수난과 십자가 위에서마저도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참조. 마르 15,29-32)라는 유혹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이렇게 사탄의 유혹으로 시작하고 골고타 산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유혹으로 끝난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당신의 제자 중 으뜸인 자에게서조차 유혹을 받으신 분이었으며(마르 8,33 참조), 당신의 친척들로부터도 미쳤다는 취급의 유혹을 당하신 분이시다.(마르 3,21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사탄의 유혹에 늘 넘어갔다. 그리스도인들도 언제나 거친 광야와도 같은 세상에서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3) 하며 살아간다.

“사탄”은 창조의 처음부터 인간을 죄에 빠트리기 위해 간교했던 창세기의 뱀(창세 3,1)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스 말의 “사탄(Σατανᾶ, Satan)”은 히브리 말 사탄과 아람 말 ‘사타나’를 음역한 것이다. 사탄, 또는 마귀는 복음서에서, 하느님과 그분 나라의 건설에 반대하는 원수의 이름으로 흔히 쓰인다. 이밖에 “베엘제불(마르 3,22)”, 또는 “벨리아르(2코린 6,15)”, 그리고 “세상의 우두머리(요한 12,31:14,30:16,11)” 등으로도 불린다. 그리스어로는 디아볼로스, 우리말로는 마귀, 악마 등에 해당한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것처럼 세례로 성령을 받고 광야 같은 세상에 나가 예수님처럼 끊임없는 유혹과 선택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삶이다. 『유혹은 세 단계, 곧 제안, 쾌락, 동의의 순서이다. 악마의 제안으로 유혹을 받으면 우리는 대체로 쾌락에 굴복했다가 동의를 표하게 된다.(성 대 그레고리오St.Gregory I the Great, 교황 재위 590~604년)』

『아르세니오는 로마 제국 시대에 대단히 고상한 귀족 가문의 한 사람이었다. 아직도 그렇게 세속에 살던 중 어느 날 하느님께 ‘주님, 어느 길이 과연 구원에 이르는 길인지 제발 보여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다. 그러자 ‘아르세니오야, 떠나거라, 입을 다물어라, 그리고 기도하여라.’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아르세니오는 은밀하게 로마를 뒤로하고 알렉산드리아를 향해 배에 올랐고, 마침내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 다시 한번 아르세니오는 하느님께 ‘주님, 어느 길이 과연 구원에 이르는 길인지 제발 보여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다. 그러자 ‘아르세니오야, 떠나거라, 입을 다물어라, 그리고 기도하여라. 이것들이 순결의 뿌리들이니라.’ 하는 목소리가 또다시 한번 똑같이 들려왔다. ‘떠남, 침묵, 기도’ 바로 이 세 단어야말로 사막의 영성 생활을 압축 요약한다. 바로 이 세 마디가 세상이 우리를 얽매어 놓으려 드는 것들을 피하는 세 가지 길, 곧 성령 안에 살아가는 세 가지 길을 가리켜준다.(헨리 나웬, ‘마음의 길’)』

마르코 복음사가는 유혹의 내용 대신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고,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마르 1,13)는 두 가지를 상징적으로 전한다. “들짐승들”은 여기에서 광야의 적막함을 강조하기 위하여(이사 34,11-15 참조), 또는 메시아의 통치 아래에서 이루어질 세상의 조화를 미리 보여주기 위하여(이사 11,6-9 참조) 언급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적인 메시아 시대가 오면 들짐승들이 유순하게 되어 사람들과 평화로이 지내리라는 기대가 있었다.(이사 11,6-8;65,17-25 호세 2,18) 낙원에서 범죄 전 아담도 그렇게 살았다.(창세 1,28;2,19-20)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에서 “시중”이라 하면 음식을 드렸다는 것인데, 마태오나 루카는 40일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고 밤낮으로 단식하셨다 한다. “천사들의 시중”은 하느님의 도움을 나타내는 표징이다. 이러한 “시중”은, 들짐승을 지배하는 것과 더불어,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에게 약속된 것이다.(마태 4,6에 인용된 시편 91,11-12 참조) 이로써 예수님께서 시련을 이겨내신 분으로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들짐승의 야수성과 “함께” 지내시며 들짐승들이 예수님을 해치지 못하는 관계로 사신다. 이사야 11장이 전하는 낙원의 묘사 그대로이다. 들짐승과 천사, 땅과 하늘, 육체와 영혼, 의식과 무의식의 온전한 조화이다. 우리 인생에서 우리도 “들짐승”의 야수성과 “천사의 시중사이의 긴장을 산다.

3.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마르 1,14) 하신다. “요한이 잡힌 뒤”와 관련된 사건은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요한을 체포하여 사해 동쪽에 있는 마캐루스 요새에 가두었다가 참수한 사건을 말한다.(마르 6,17-29) 요한이 활동을 마친 뒤에 예수님께서 활동하신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요한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착각했다.(마르 6,14;8,28) “갈릴래아에 가시어”라 한다. 요한은 주로 유다 지방 요르단 강 유역에서 세례 운동으로 활동했고,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방 겐네사렛 호수 주변에서 활약하셨다. 예수님은 성전과 예루살렘, 즉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소외된 사람들의 고장에서 활동을 시작하신다. 초대교회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의 복음”이라는 말마디(1테살 2,2.8.9 2코린 11,7 로마 1,1;15,16)를 맨 먼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바오로가 전한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고,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이다.

예수님께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신다. “때가 찼다”는 것은 역사가 완성되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정하신 시간이(마르 13,20 다니 7,22;12,4-9 참조) 되었다는 말이다. 15절의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설교만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 이후에도 교회에서 계속되는 설교까지 종합하는 표현이다. 교회의 설교는 시간이 다 되었음을 강조하면서(갈라 4,4 에페 1,10), 회개하고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한다.(1테살 1,5-6.9;2,13 콜로 1,5-6) 다만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이, 부활 뒤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구원의 복음으로 바뀐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하는 말씀이 바로 복음 선포의 요약이다.

회개와 믿음, 이것이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이다. 회개는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방향전환이고(예레 18,11 이사 55,7 즈카 1,4),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하느님 중심으로, 복음의 가치관으로 사는 것이다. 믿음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의 수락이다. 요한은 죄 사함을 위한 죄인들의 회개와 세례를 요구했으나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회개를 요구하신다. 예수님께로 눈을 돌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생을 보면 인생을 고칠 수밖에 없다. 그것이 회개이다. 그런 의미로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이쪽저쪽이다. 적어도 마르코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 공생활 시작의 제1성第一聲이 서로 사랑하라거나 섬기고 용서하며 봉사하라는 말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하는 말씀이었고, “회개하라”와 “믿어라” 하는 명령어였음을 잊지 말 것이다.

회개와 믿음은 결국 은총이므로 은총을 기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의 힘으로 유혹을 극복하고 회개하여 믿는 이가 될 것이다. 4세기 사막의 교부들이 사탄을 물리치기 위해서 굳이 사막으로 들어가야만 했던 이유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안토니오 교부가 사탄과의 오랜 싸움 끝에 기진맥진해서 『주님, 도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나 너와 함께 사탄과 싸우느라 네 옆에 있지 않았더냐?』 하였다 한다. 유혹과 시험은 우리 삶의 리듬이다. 어떤 의미에서 유혹이 없으면 무미건조한 삶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3) 하고 은총을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로마 1,16)이다. 아멘!

***

「……매년 사순절의 시작에, 광야에서 예수님의 유혹에 관한 이 복음 구절은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악령과의 싸움임을 일깨워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기꺼이 유혹자와 대면하시고 그를 이기셨음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악마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행할 가능성이 허락됐음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형벌, 우리의 실패에 관심을 두는 이 교활한 원수의 존재를 인식해야 하고, 악마를 상대로 싸우고 그에게서 우리를 방어하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믿음, 기도, 참회를 통해 원수에 대한 승리를 우리에게 보장해 줍니다. 하지만 저는 한 가지 사항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유혹을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결코 악마와 대화하지 않으셨습니다. 절대로 대화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평생 결코 악마와 대화하지 않으셨습니다. 결코 말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악령을 내쫓으시거나 악령을 단죄하시거나 그의 악함을 드러내 보이시긴 했지만, 결코 대화를 나누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님께 세 가지 제안을 하고 예수님께서 대답하셨기 때문에, 마치 둘 사이에 대화가 이뤄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대답하신 게 아니라, 성경의 세 구절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모두 이렇게 해야 합니다. 유혹자가 다가와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 보시오. 저렇게 해 보시오. (…)”라는 말로 우리를 유혹할 때, 그와 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유혹은 하와처럼, 악마와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악마와의 대화에 빠져든다면,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이 점을 머리와 마음속에 새기십시오. 악마와 절대 대화하지 말아야 하며, (악마와) 어떤 대화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말씀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사순 시기에 성령께서는, 예수님께 하신 것처럼, 광야로 들어가도록 우리 또한 재촉하십니다. (광야는)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회개의 삶으로 그 열매를 맺도록”(‘나’해 사순 제1주일 본기도),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침묵하게 하는 실존적인 차원을 말합니다. 광야를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 자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도와 침묵의 순간을 더 구하십시오.……」 (교황 프란치스코 삼종 기도 훈화 *번역문 출처-2021년 2월 21일 자 바티칸 뉴스 한국어판)

2 thoughts on “마르 1,12-15(사순 제1주일 ‘나’해)

  1. 광야!
    우리도 지금 광야에 나와서
    길을 찾고 있네요.
    떠나는 행동, 침묵 기도.
    40의 숫자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의미가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그분이 함께 계시니
    너른 광야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럼 한 발 디뎌볼까요?

  2. 사순절을 시작하는 복음을 묵상하며, 나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삶을 돌이켜보니….. 회개, 정화, 믿음의 은총이 가득한 사순시기를 맞이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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