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40-45(연중 제6주일 ‘나’해)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몇 주째 우리는 여전히 마르코복음 1장에 머물고 있다. 그렇지만, 이번 주일 복음에서 우리는 특정 시간이나 장소가 명시되지 않은 이야기 하나를 다소 갑작스러운 듯 듣는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여기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난 일처럼 들을 수 있게 된다. 예수님과 어떤 나병 환자의 만남 이야기이다.

1.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성경에서는 문둥병(한센병)뿐 아니라 타박상이나 상처들 및 모든 악성 피부질환을 “나병”이라 한다. 심지어 피부와 의복, 벽에 피는 곰팡이까지(레위 13,27이하;14,33이하) 포함한다. 나병 환자는 요즈음도 어느 정도는 거부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님께서 사시던 당시 몹시 혐오스러웠고, 아예 인간으로서는 생명이 끝난 사람 취급을 받았다. 더구나 유다인들은 끔찍한 죄를 지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벌罰을 받았다는 표징으로서 나병을 받아들였다. 성경에서는 모세의 동생 미르암이 모세를 시기할 때 받았던 벌(참조. 민수 12,9-10)이나 예언자 엘리사를 속이려 들었던 그의 종 게하지가 받았던 벌(2열왕 5,27), 그리고 다른 죄인들의 경우 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질병 자체보다도 더욱 끔찍했던 것은 공포였으며, 그 질병에 걸렸던 사람의 얼굴과 몸을 처참하게 일그러뜨리는 상황에 맞닥뜨린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당시 나병은 전염성이 있는 병이라고 여겨서 나병에 걸린 이들은 공동체나 공동생활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도록 마을 밖 외진 곳으로 격리되었으며, 혹시라도 다른 이와 마주치면 멀리서부터 “부정한 사람이요. 부정한 사람이요.” 하고 스스로 외쳐야만 했다.(참조. 레위 13,45-46) 일단 나병에 걸리면 하느님이나 사람과 어울리고 통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단순히 병에 걸린 사람을 넘어 “부정不淨”이나 시체처럼 여겨진 것이다. 그 상태에서 누군가를 접촉하거나 만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끔찍한 일이었다. 특별히 정결을 강조하는 종교적 차원에서는 더욱 그러하였으니 실제로 모든 증상이 완전히 없어지고 “정화”된 후에나 다시 어떤 사물이나 사람과 접촉하고 통교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치유 후에도 공동체에 받아줄 수 있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제의 승인을 거쳐야만 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한다. 그가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한다. 우리는 이 나병 환자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감히 그 사람의 인생이나 믿음에 관해서 평가할 수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굳게 믿었고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분으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믿음이지만 그가 대담하게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 말을 걸고 무엇인가를 들으려고 하는 적극성을 지녔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비유적으로 우리 양심의 감각이 무디어져 영적으로는 더욱 심한 나병에 걸려 있지나 않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마치 나병에나 걸린 것처럼 미워하고 소외시키고 격리하고 왕따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우리 형제와 자매들을 우리가 사는 공동체에서 철저하게 격리하고 왕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격리하며 왕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우리가 이기심과 미움이라는 나병에 걸려있음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도 가난의 나병, 절망의 나병, 왕따의 나병, 폭력의 나병, 우울의 나병, 고립의 나병…에 걸려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Covid 19 동안 거리 두기와 격리라는 말을 수도 없이 되뇌었으며, 경계심에 가득 차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이러스 탓으로 두고 정당화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다른 모든 사람에게서 배척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렇게는 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온다. 거부당하고 격리되는 사람으로는 그 누구도 살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따뜻함과 사랑을 동경한다. 나병 환자는 거부의 악순환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며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는다. 사실 예수님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가까이 갈 수 없는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감히 도움을 청한다. 예수님은 차별과 두려움의 장벽을 허물고 그 누구나 다가갈 수 있는 분이시다. 마태오는 이를 “엎드려 절하며(마태 8,2)”라고 하며, 루카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루카 5,12)”라고 한다.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신뢰와 복종의 자세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겸손한 자세이다.

2.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렇게 다가온 나병 환자를 두고 예수님께서 반응을 보이신다. 그를 보시고 그의 병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게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상처에서 풍기는 악취를 맡으시면서도 사랑하는 가족처럼, 여느 보통 사람처럼 그를 맞으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하고 말씀하신다.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라고 하는 것을 ‘노기를 띠시고, 화가 나셔서’(ὀργῆςθείς, orghistheís)라고 새길만 하다. [*마르코복음의 전체 맥락에서 “가엾은 마음(compassion)”을 ‘화(ὀργῆς=영어 anger, indignation)’로 번역할 수 있다는 내용은 예수님의 모습을 좀 더 정확하게 그리려는 학자들 간 이슈 중 하나이다]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처참한 상황을 견딜 수 없는 단호함으로 마치 그 병에게 명령하시듯이, 화라도 나신 듯이 말씀하신다. 마르코는 종종 예수님께서 열정과 단호함으로 당신께서 형제라고 부르는 인간, 존엄성을 지닌 인간이 처참해진 상황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반응하시는 예수님을 그린다.

나병 환자의 청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내가 너를 깨끗하게 한다’라고 하지 않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신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창세 1,3) 하시니 빛이 생겼던 것처럼 하느님의 행위를 묘사하는 수동태 형태로, 곧 하느님으로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정화의 주체인 당신을 내세우지 않으시면서도 그 사람에 대한 당신의 원의와 바람이 그 사람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므로 깨끗하게 되고 나아지라고 선언하듯이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화가 나듯이 단호하게 그 나병 환자를 견딜 수 없어 하셨다는 표현을 두고 복음사가 마르코가 예수님의 인성에 관한 인간적인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반대나 판단의 근거가 되어 사람들에게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말하면 곤란하다. 사실 종교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열성이 지나쳐서 행여 예수님의 신성이나 거룩함에 조금이라도 누累가 될만한 표현이나 언급이 있을 때 신경질적으로 이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와 만나시는 장면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먼저 율법의 규정을 잘 헤아리시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당신의 의중을 점잖게 드러내셨어야만 했다는 식으로 말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마르코 복음사가는 거침없이 예수님께서 “노기를 띠고 그들을 둘러보셨다.”(마르 3,5) “(바리사이들 앞에서)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마르 10,14) 하는 식으로 예수님을 묘사한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인간의 갈등 상황을 사셨으며, 악이나 질병에 갇히고 노예가 되어 그것들에 허덕이면서 살았어도 죽은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 하느님과 떨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시고 그것이 올바른 상황이 아니므로 안타깝다 못해 화가 나시고 언짢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분개憤慨요 의분義憤이다. 거룩한 분노이며 건강한 분노인 셈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두고 그렇게 묘사하는 것이 문제성이 있다고 생각한 일부 성서 기록자들은 ‘화가 나셔서’라는 표현을 오늘 복음에서처럼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참조. 마르 6,34;8,2)라는 표현으로 바꾸고 싶어 했고, 실제로 그렇게 번역하면서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원만한 표현이 되었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직설적이고도 적나라한 감정 표현과도 같은 ‘화가 나셔서’라는 표현 안에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그들이 망가진 채 살아가는 모습을 얼마나 애달파 하셨는지 실감 나게 느껴볼 수 있는 또 다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나병 환자의 애달프고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화가 나신’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마르 1,41) 그 환자의 손을 덥석 잡으신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그와 관계를 맺고 그와 말씀을 나누신다. 건강한 예수님의 손과 나병 환자의 손은 율법에 따라 접촉이 금지되어 있었고, 그 나병 환자의 몸은 마귀 들린 몸으로 간주 되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신다.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42) 나병 환자가 낫게 되고, 예수님을 믿었던 그 믿음이 원하는 결과를 얻으며, 불쌍한 그의 기도가 수락된다. 그는 더는 사람들로부터 격리되고 배제된 사람이 아니며 그렇게도 끔찍한 악으로부터 풀려나 예수님과 온전한 교제를 이룬 사람이 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아픈 사람이나 죄인들을 만나는 자세와 태도에 관해서도 묵상하게 된다. 보살핌과 자비가 손과 손을 잡고, 눈과 눈이 마주치며, 얼굴과 얼굴이 맞대어진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도 다른 인생과 다른 비전을 보고 새로운 시작을 하였을 때 나병 환자에게 입 맞추었다. 예수님을 만난 나병 환자에게도 새로운 인생이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 환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나병 환자, 모든 병자, 그리고 죄가 인류에게 끼친 온갖 불행에 대해서도 화가 나신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신다.” ‘untouchable’을 ‘touch’ 하신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신” 그 행위 자체가 율법의 위반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치유를 위해 스스로 불결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던 것처럼 “되어라” 하시니 “바로” 그렇게 된다.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하느님의 손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뿐 아니라, 오히려 ‘내가 간절히 원한다.’하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치유가 즉시 이루어진다. 보통으로 예수님의 치유와 구마는 즉석에서 “바로” 이루어지는 ‘선언’이다.

3. “단단히 이르셨다…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 1,43-44) 하신다. 율법의 처방과 함께 성전의 사제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하시며 그 사람을 염려하시고 걱정하시며 “단단히 이르신다.” 하느님의 개입으로 이미 몸이 깨끗해진 상황이므로 그 사람 처지에서는 굳이 그러한 율법의 준수가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과 행적으로 비롯된 새로움이 성전에도 알려지기를 고집하신다.

그러나 종교를 통해 소위 단물만 빨아 먹는 일부 종교인 중에 그러한 예수님의 치유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하고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르 1,44) 하셨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 환자를 치유하신 뒤에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과 행적에 주목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이루신 좋은 일을 두고 사람들의 인정認定에 취하시는 분이 아니고 그것을 바라시는 분도 아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 나병 환자와 만나 이루어진 사연과 인연을 세차게 끊어버리기라도 하실 듯이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라고 묘사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이나 일으키는 분으로 알려질까 염려하셨고, 당신의 행적을 두고 말에 말을 더해 왜곡하고 과장이라도 할까 염려하셨으며,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달려서야 알려지시고 선포될 온전한 당신의 메시아 신분이 미리 왜곡되어 알려지실까 염려하셨다.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제야 그렇게 당신을 알며 사람들이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3,47) 하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마태 27,54) 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침묵하며 행여 사람들의 박수라도 받을까를 주의하라고 하신다. 그런데도 그 나병 환자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마르 1,45) “이야기”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래 ‘말(씀)’을 뜻하고, 마르 2,2;4,14-20.33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알리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선포하다’를 뜻하기도 한다.(마르 1,4 참조) 그래서 병이 나은 이 사람은 복음 선포자들을 예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마르 5,19-20;7,36 참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들 가운데 처음으로 나병 환자가 복음 선포 활동에 가담한다. 마르코 복음에 등장하는 첫 번째 선교사이고 예수님에 대한 증거자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동요動搖와 소란을 아시는 분이고, 슬기롭게 자신을 감추시는 예술을 아시는 분이었다. 복음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마르 1,45)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거짓과 왜곡, 진실을 보려 하지 않는 작태, 편리한 대로 짜 맞추고 자기 식대로 변명하고 합리화하려는 비겁함이나 게으름을 보시면서 분명 다시 한번 화가 나셨을 법도 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45)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았고, 찾았고, 보고 싶어 했으며,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고 싶었다. 이를 두고 성공적인 귀결이라고 해야 할까? 어떤 면에서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성공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의 눈과 손,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성공임을 아신 까닭이었다. 아멘!

***

순종하지 않은 자유와 해방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 13,45-46) 한 것처럼 나병에 걸린 이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자기에게 다가오는 이들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경고의 뜻을 담아 외쳐야 했다. 당시 나병은 인간의 신체에 미친 가장 심각한 불결함으로 여겨졌다. 부정의 극치인 나병 환자는 몇 달, 혹은 몇 년이나 어쩌면 평생 인간적, 영적, 사회적 죽음의 상황을 겪으며 걸어 다니는 주검처럼 지내야 했다. 그들을 육체적으로 부정不淨하며 종교적인 악이라고 선언하여 사회적으로 격리하며 모든 관계에서 배제하는 것은 사제들의 독점적인 임무였다. 그들의 치유와 공동체 생활 재편입에 관한 증명 역시 여전히 사제의 몫이었다. 나병 환자들은 다른 이 앞에 스스로 “부정한 사람이요”를 큰소리로 외치며 가족이나 사회생활로부터 격리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하고자 하시면

오늘 복음인 마르코 복음에서는 이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마르 1,40) 하는 단순한 첫 구절의 묘사만으로도 이미 복음이다. 종교적·사회적 규범이자 규칙에 따르지 않는 나병 환자가 자신의 격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께 다가간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가 당신 가까이 오도록 허락하신다. 소외와 배제, 그렇게 격리의 이유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접근의 구실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 환자가 율법에 따라 배제된 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그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신다. 그는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말씀드리는 대신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하며 간청한다. 나병 환자는 자신의 더러움을 고발하는 대신 깨끗하게 해 주시라고 청한다. 낫게 해 달라는 치유 대신 깨끗하게 해 주시라는 정화를 청하면서 자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질병이 아니라 사람들 눈에 더럽게 보이는 것임을 드러낸다. 그렇게 나병 환자는 깨끗함을 청하면서 평범한 삶에서 자기 자리를 되찾아주실 것을 청한다. 그의 소원은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생명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다.

하고자 하니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1,41) 예수님의 정화는 깊고 애달픈 “가엾은 마음”에서 시작하고, ‘손을 내밀다’, ‘(손을) 대다’라는 두 개의 동사로 실현된다. 부정한 사람을 만진 사람은 그 자신도 부정한 사람이 된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더럽게 만드는 것이 피부병이 아니라 사람 마음속에 있는 것임을 아시고 부정한 이에게 손을 대어 접촉하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신다. 나병 환자가 “하고자 하시면”이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 “내가 하고자 하니”라고 대답해주신다.(희랍어 원문에 ‘내가’라는 인칭 대명사는 없다) 예수님께서 깨끗함을 원하신다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의지와 능력의 결과이고, 이는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42)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으로 즉시 실현된다.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그를 위해서 그를 깨끗하게 해 주셨으므로 “그를 곧 돌려보내며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 1,43-44) 하신다.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예수님의 명령과는 반대로 사제에게 가지 않고,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마르 1,45) 그는 사람들에게 나병이라는 악에 걸린 이들을 해방하시는 라삐가 왔다고 “알리고 퍼뜨리며” 억누를 수 없는 해방과 자유의 본성을 마음껏 주변에 펼친다.

예수님께서 부정함을 들어내시고, 그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신다. 그렇게 깨끗해진 내면의 자유와 해방은 자기를 자유롭게 하신 분과의 관계 앞에서도 거침없이 자유롭다. 이 순종하지 않은 자유와 해방은 아무리 찬미해도 부족할 것이다.

2 thoughts on “마르 1,40-45(연중 제6주일 ‘나’해)

  1. 죄라는 나병… 죄에 대한 양심의 감각이 무디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애절하고 겸손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잠시 회개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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