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5,21-28(연중 제20주일 ‘가’해)

“아, 여인아!”(마태 15,28) *그림- by Trisha Adams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마태 15,21)라는 말로 시작한다. 지리상으로 보면 예수께서는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마태 14,34)에 계시다가 그곳을 떠나 이스라엘 땅을 거의 벗어나 국경 지역으로 이동하신 셈이 된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러가신” 경우는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이나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등과 같은 이들의 논쟁으로부터 잠시 멀어지시기 위함이거나 따로 기도하시기 위함이었다.(참조. 마태 4,12;12,15;14,13;15,21 마르 3,7 루카 5,16;9,10 요한 6,15;10,4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물러가신 데에는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거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폭력적인 박해의 조짐까지 보이는 상황이 그 배경일 수 있다. 예수님께는 고독과 침묵, 그리고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식별하고 성경의 빛으로 당신 소명을 분명히 하며, 궁극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 고귀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하여 ‘물러가시는 것’이 절실했다. 이처럼 ‘물러가는’ 때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어나게 마련이다. 시험과 유혹 그리고 고통의 때가 그러한 때이다.

1.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이렇게 이스라엘 땅과 그곳 사람들, 곧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물러나 멀어지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결하고 어둠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 이교도 지방, 살아계신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모르면서 우상숭배를 하는 천박한 것들이 모여 사는 고장에서 “어떤 (익명의)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을 가로막는다. 복음은 “가나안”이라는 출신지를 강조한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많은 이방인이자 이교도들도 만나셨다는 것을 증언하면서 이 이방인 여자도 그중 하나로 등장시킨다.(참조. 마르 5,1-20;7,31-8,10)

당시의 종교적인 문화 안에서 볼 때 이렇게 이방인을 만나는 것 못지않게 여성을 만나는 것이 라삐로 대접을 받던 예수님께 상당히 부적절한 상황이었다. 같은 내용을 전해주는 마르코복음은 이 여인이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마르 7,26)이라면서 단순한 이교도 지역이 아니라 완전히 골수 이교도 지역 출신임을 강조한다. 그것만으로도 이 여인은 출신으로 보나 문화적으로 보나 정말 이스라엘의 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스라엘인이 볼 때 이스라엘의 신을 믿지 않는 우상숭배자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비록 이스라엘 밖에서였을지라도 예수님에 관해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고, 그분이 믿을만한 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온다.

부인의 간청에 따르면 부인의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으므로” 부인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마태 15,22) 딸의 아픔이 곧 자신의 아픔이었기에 ‘제 딸에게’라 하지 않고 “저에게”라고 한다. ‘소리를 지른다’는 것은 나와 누군가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나를 듣게 하고 싶어서이다. 예수님 앞에 선 부인은 그렇게 이미 자신이 이방인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은 누구나 이방인이다.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임을 절감하는 만큼 간곡하게, 애절하게, 소리를 질러,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눈먼 자들이 예수님께 청할 때도 행여 예수님을 다시 못 만날세라 소리소리 질렀다.(마태 9,27;20,30-31 마르 10,47-48 루카 18,38-39 참조)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자신을 위해 평생 울고불고 하느님께 소리치던 어머니가 있었다고 술회했다.

『가나안 여인의 간청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환영, 그리고 우정을 찾는 모든 이들의 부르짖음입니다. 이 세상 도시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의 외침이고, 여러분 또래의 수많은 젊은이가 외치는 절규이며,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죽음과 박해의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순교자의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것은 흔히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4년 8월 17일 한국 방문 중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 미사에서)』

부인은 마치 몽둥이에 맞은 개라도 되는 것처럼 예수님 일행을 계속 뒤따라가며 아주 강하게 울부짖는다. 여인은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22절)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25절)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 하고 세 번 예수님께 말씀을 드리면서 시종일관 “주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울부짖음을 듣지 못한 것처럼)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부인은 그런 예수님이 속으로 원망스러웠고, 야속했으며, 매몰차다고 생각했고,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나의 간절한 외침이 들리지 않을 것 같을 때 인간은 상대방을 원망하고 화가 나며 서운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그렇게만 머무르면 결국 화병火病이 생기고 내가 나를 망친다.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상황으로 나를 한 걸음 더 당신 가까이 인도하시려는 하느님의 ‘거룩한 음모(?)’가 시작되었음을 간파해야 하고, “주님”께로 향한 믿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탈출 32,27) 하던 야곱처럼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이라도 해야 한다. 하느님을 설득이라도 하듯이 매달려야 한다. 설령 나 자신이 “강아지”처럼 느껴지는 모욕감이 들더라도 하느님 자신도 인간들에게 그런 취급을 당하셨음을 생각하고 한없이 겸손해져야만 한다.

부인의 외침에 짜증이 난 제자들이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 15,23) 하면서 차라리 그 여자의 간청을 들어주는 것이 이 난감한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도라는 듯 예수님께 말씀드린다. 이방인 여자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호칭은 메시아 신앙을 가진 유다인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믿음의 호칭이다. 부인은 예수님을 이렇게 거듭 부를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한다. 예수님의 위대함을 칭송하며 딸에게 들린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간청한다. 부인의 외침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위협당하고 정신 질환으로 고생하는 딸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이고, 고통의 울부짖음이며,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길이 없는 한계의 토로이다.

2. “강아지들에게…강아지들도”

이방인 여인이지만 간절히 청하는 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면서 답을 주신다. 똑같은 상황에서 마르코 복음사가가 “먼저 자녀를 배불리 먹여야 한다.”(마르 7,27) 하고 기록했던 것처럼 유다인들에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설령 이방인들일지라도) 하느님 백성 모두에게 전해져야 할 일이 있다. 이를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 15,24) 하셨으며 그 여인을 내치듯이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하셨다고 한다. “강아지들”, 혹 ‘개들’은 당시 히브리인들이 이교도들을 지칭하는 표현으로서(참조. 마태 7,6), 유다인들은 “개들을 조심”(필리 3,2) 해야 하고 “개들은 밖에 남아 있어야”(묵시 22,15) 한다고 했다. 그러나 “자녀들”이 자녀답지 못하면 오히려 진짜 개가 될 수도 있다.

이스라엘 집안”은 선별된 이들이지만, 그 선별은 특권이 아니라, 그 선별에 따른 몫을 살아야 하는 책임이다. 우리의 신앙은 천국을 위한 티켓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참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앞에 하느님 백성의 신분을 살아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 있다.

예수님의 거절과도 같은 응답에 여인은 실망하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강아지들”이라는 표현을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유리하게 대변하는 말이라는 듯이 활용하면서, 예수님께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하며 맞서듯이 받아친다. 여인은 다소 모욕적인 것처럼 들리는 표현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유연하게 예수님의 말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태도를 바꾸려고 시도한다. 여인의 표현을 보면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났다는 식이 아니라 여전히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 속에서 영리하게 ‘합리성으로 예수님을 설득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여인의 예수님 설득은 성공을 거둔다.

3.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큰 그림 안에서 고집하는 여인은 사람들을 피해 잠시 말씀 선포와 치유를 멈추시려고 했던 예수님의 뜻을 되돌린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말로 부활 이후에야 가능할, 이방인에게까지 가 닿을 복음에 대한 당신의 계획을 앞당기신다. 이 장면은 마치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던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의 요청으로 메시아 예수로서의 당신 계획을 앞당기셔야만 했던 장면(참조. 요한 2,1-11)을 연상시킨다. 믿음은 하느님의 계획까지도 앞당길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매우 흡족해하시고 감탄하시면서 기쁨에 차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하신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8) 영리하게, 그리고 사실을 말하는 데에 거침이 없고 고집스러운 여인의 유연함으로 악마는 패배하고 하느님의 딸이 마침내 해방된다. 여인의 말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예수님의 보편 사명을 계시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는다. 여인과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여인, 나아가 하느님 백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일이 드러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주인공이 된 이방인 여인은 예수님 자신이 곧 ‘복음’이요 ‘기쁜 소식’이듯이 그 자체로복음’이고 기쁜 소식이다. 여인은 이방인이었지만, 인간이면 누구나 율법을 넘고 국경을 넘어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마르 8,35),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마르 10,29)이 될 때 누릴 권리, 하느님의 자비를 얻을 권리, 율법을 넘어서는 권리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하신 말씀에 따라 여인의 믿음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믿음을 넘어선 것이었으니, 여인은 이스라엘 집안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결코 하느님의 자비에서 제외될 수 없었다. 여인은 하느님의 자비가 마땅히 가 닿아야 하는 인류의 한 사람이었다. * 참조. 교황님께 무신론자였던 아버지의 구원을 물었던 엠마뉴엘레(2018년 4월 15일)

마침내 여인의 간청을 허락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마태 15,28) 하신다. 간절히 기다리는 여인의 간청을 들어 허락해야만 하겠다고 예수님의 계획과 생각을 바꾸게 한 여인의 믿음이다. 일찍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하라 하셨던 믿음이고,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는 믿음이며, 복음이 위치한 15장에서 들어오는 것과 나오는 것, 순결한 것과 더러운 것(참조. 마태 15,10-20)에 관하여 말씀하셨던 것에 따를 때 참으로 순결한 믿음이었고, 오늘 복음에 바로 이어지는 다음 대목에서 이방인 지역의 사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위해 빵을 많게 하신 기적(참조. 마태 15,32-39)을 준비하도록 하는 믿음이었으니,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열린 충분한 빵의 식탁을 예시하는 믿음이었다. 여인의 믿음은 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하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는, 예수님께서 인정하시고 감탄하신 믿음이었다.

모든 이에게 열린 복음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통해서, “강아지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는 ‘(하느님) 집 안의 강아지’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여인은 사상의 경계나 고정된 틀의 장벽들을 허물고 구원의 실제 가능성과 현실을 인간 모두에게 제시한다. 어떤 면에서 이 복음은 예수님과 한 인간의 ‘만남의 기적’을 말해 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예수님과 만난 이 이방인 여인을 두고 『신심 깊은 한 이방인 여인을 통하여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는 예수님 사명의 보편성이 드러났다.(엘리앙 쿠빌리에Élian Cuvillier, 1960년~)』 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명이 지닌 우주적 보편성을 드러내시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신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시면서 그들을 바꾸시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바꾸기도 하였다. 우리도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그들에게 영향을 끼쳐 그들을 바꿀 뿐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쳐 우리를 바꾼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의 한 사람으로서 본인 스스로 이스라엘 집안의 하나요, 축복과 약속된 민족으로서 당신 사명의 첫째 자리에 있는 이들 중 하나로 자신을 느끼셨지만, 주님의 종으로서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마태 8,17 이사 53,4) 하는 말씀 그대로 갖은 아픔과 허약함을 지닌 모든 인류에게 열린 구원의 역사 안에서 그 누구도 결코 배제할 수 없이 다른 이들의 고통을 들어야만 한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확인하신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에게나 열린 구원의 복음이시다. 우리도 타인을 향해 누구에게나 열린 복음이어야만 한다. 아멘!

3 thoughts on “마태 15,21-28(연중 제20주일 ‘가’해)

  1. “주님께로 향한 믿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없이 겸손해져야만 한다.”
    묵상합니다~

  2. 참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여인, 해서 진실한 믿음을 갖고, 용기를 낼 수 있는 여인의 모습이 내 안에도 있기를 기도해본다.

  3. 겸손한 마음과 믿음으로 주님께 한걸음 한걸음 걸어 나아가는 제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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