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4,22-33(연중 제19주일 ‘가’해)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마태 14,30) *그림 by Emile Nolde

지난주는 원래 연중 제18주일이었으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과 겹쳤으므로 교회의 자상한 배려로 축일의 복음을 들었다. 그러나 연중 제18주일의 복음을 묵상했다면, ‘비유의 장’인 13장의 비유들을 넘어 주님께서 “외딴곳”에서 “오천 명가량” 되는 수많은 군중에게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시어 “배불리” 먹이셨다는 말씀(마태 14,13-21)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외딴곳”으로 떠나신 것을 알고 겐네사렛 호수의 해변을 따라 먼 길을 걸어 예수님을 찾아간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실 때 예수님은 많은 군중을 보시고 놀라시면서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하늘 나라에 관한 여러 말씀을 해 주시며 함께 빵을 나누어 그들 모두가 배불리 먹게 해 주신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당신께서 떠나오셨던)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내셨다.”(마태 14,22)

1.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마태 14,23) 4번째 복음인 요한복음에 따르면 빵을 많게 하신 기적 후에 군중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모든 가난한 이들에게 정의를 펼치어 통치하실 정치적인 해방자요 메시아가 마침내 나타났다고 생각하였고,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게 되었고, 이에 예수님께서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참조) 한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산 위에서 기도하시려고 홀로 계셨다. “”은 성경에서 언제나 하느님의 위대한 계시가 드러나는 자리이다. 마태오 복음사가에게 “산”은 유혹의 자리(참조. 마태 4,8-19), 산상 설교를 펼치셨던 자리(참조. 마태 5-7장), 영광스러운 변모의 자리(참조. 마태 17,1-8),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명을 부여하신 자리(마태 28,16-20)이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산”을 고독과 기도의 자리로 묘사하면서 그곳에 계신 예수님을 소개한다.

고독과 외로움이 다르고, 인간에게 고독과 외로움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우리 인생에서 본질적인 내용 중 하나라는 사실은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고독과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죽음에 이르러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사실이면서도 온전한 해방과 자유를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찾을 수밖에 없고, 인간의 목소리를 더는 들을 수 없다고 여길 때 각자의 마음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하는 차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고독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더욱 붙잡아야만 할 모습 중 하나이다. 온전한 사람이 되신 인간의 모습으로 고독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모범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고독 안에서 권능과 세속적 힘의 메시아가 아닌 ‘고난받는 종’이라는 메시아로서의 당신 소명을 살아내야 하셨고, 유혹과 싸워 이겨내셔야 했으며,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유일한 힘이요 은총으로 버티며, 마음으로 기도하시고 식별하시면서 사탄을 물리치셔야만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고독 안에서 원수들을 용서하시고 사람을 “끝까지”(요한 13,1) 사랑하는 십자가의 논리를 받아들이도록 스스로 준비하셨다. 그뿐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공생활 이전에 적어도 30년이라는 고독의 시간을 보내셔야만 했으니, 예수님께는 이 고독의 시간이 하느님 부재의 시간이라기보다 하느님 현존의 시간이었다.

고독이 이처럼 참된 하느님 현존의 시간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로 충만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서들이 반복해서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마태 14,23)라고 기록하는 이유이다. 과연 예수님의 기도는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도 당신 백성에게 성경 말씀을 들으라고 가르치셨듯이 당신께서 “아빠! 아버지!”(마르 14,36)라고 부르시는 성부 하느님을 듣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들을 읽으시며 묵상하시고, 해석하시고, 기도하시며, 말씀에 잠겨 관상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 존재라면 누구나가 가장 깊숙한 내면인 마음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식별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께서도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들으신 것이었다. 이처럼 “말씀”을 바탕으로 인간의 깊숙한 저 마음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말씀을 듣지 못하면 그 말씀은 공허한 헛소리일 뿐 다른 인간의 마음에 가 닿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다음 그들의 환호와 함성을 뒤로한 채 “외딴곳”인 “산”에서 기도하신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마태 14,2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아빠, 아버지”를 부르며 다시 한번 가난하고 힘없는 메시아,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저 실패일 수밖에 없는 메시아,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갈라 3,13) 가야만 하는 십자가의 메시아가 되는 길을 추스르신다. 바로 이 예수님이야말로 오늘의 우리 교회와 우리가 우리의 일상, 우리의 투쟁, 우리의 실패, 우리의 연약함 안에서 모셔야만 할 주님이시다.

2. “유령이다…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복음은 이렇게 산에서 고독하게 기도에 전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다가 갑자기 파도가 몰아치는 호수 위의 예수님의 모습으로 장면을 바꾼다. 제자들이 탄 배가 밤중에 호수를 건너고 있었는데, 호수 한가운데서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마태 14,24) 언제 끝날지 모르는 어두운 밤의 폭풍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몰아치는 파도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 해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이 배의 모습을 두고 교부들은 늘 예수님의 공동체요 교회의 모습으로 해석한다. 역사의 매 순간 예수님의 공동체인 교회는 항상 맞바람을 맞아 파도와 싸우며 앞으로 나아간다.

교회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늘 그럴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맞서 반대하고 적이 되어 박해를 일삼는다. 혹자는 ‘이제 배에까지 물이 차 배가 거의 엎어지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배는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하늘 나라의 해안에 당도할 때까지 침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진짜 문제는 파도와 맞바람이 아니라 배 위에 타고 있는 이들의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표시이다. 땅의 주님이요 물의 주님, 역사의 주님이신 우리의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배에 함께 타고 계시는 분이어서 당신 손으로 구원의 역사를 몸소 이루어가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마태 14,25) 한다. “새벽”은 직역하여 새벽 3시부터 6시경에 해당하는 ‘밤 4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누었는데, 유다인들은 밤을 3등분 하였고 로마인들은 4등분 하였다. 여기서는 로마 식의 구분을 따랐다. “새벽”은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도움의 손을 내미는 때이다. ‘4경’은 40이라는 숫자로 대표되는 중년 위기의 상징일 수도 있다.(안셀름 그륀) 간혹 우리는 중년기에 우리의 존재와 삶을 지탱하는 근거를 잃는다. 그때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지금까지 억제되어 있던 폭풍우가 휘몰아친다. 그러나 중년기는 동시에 변화의 시기다. 그때가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마주할 때라면 운명이 바뀔 것이지만, 대부분 처음에 겁을 먹는다. 다가오는 분이 유령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 체험은 늘 편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두려울 정도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수도 있다.

『밤의 제1경은 역사 안에서 아담으로부터 노아에 이르는 때, 제2경은 노아로부터 율법을 받았던 모세에 이르는 때, 제3경은 모세로부터 우리 구세주이신 주님께서 오시는 때, 그리고 제4경은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으로 태어나시고 고통 받으신 때입니다. 이때는 당신의 부활 후에 당신의 제자들과 당신의 교회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때입니다.(성 크로마티우스, AC 400년 경)』

새벽에” 배 위의 제자들은 누군가가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로 오는 것을 본다. 제자들은 그분을 주 예수님의 모습인 줄도 모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댔다.”(마태 14,2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물 위에 서신 채로 제자들에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하시며 안심시키신다. 겁을 주는 유령이 아니라 예수님이다. 우리를 겁먹게 하고 두렵게 하는 삶의 소용돌이와 파도, 죽음의 심연을 밟고 계신 주님이시다. “나다!” 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니 용기를 내어 믿음을 두어야 할 주님이시다. 이렇게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알려주셨던 바로 그 이름, 예언자들이 수도 없이 반복했던 그 이름이 계시된다. 배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항상 계신다. 예수님의 배는 언제나 예수님의 배이다.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마르 4,37 마태 8,24) 하듯이 설령 주무시고 계셨다 할지라도 그분 배에는 그분이 항상 계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는 항상 우리가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하는데도 어느샌가 우리에게 오시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신다.

3.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마태오와 마르코가 전해주는 바에 따라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았던 베드로가(참조. 마르 1,16 마태 4,18)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을 입고 싶었고, 자기도 물의 주님이 되고 싶은 유혹에 빠져 “주님, 주님이시거든” 하면서 주님께 믿음을 두고 말씀드린다. 베드로가 함께 있던 형제들과 공동체를 떠나 물 위를 걷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험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너라.” 대답하시고,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마태 14,29)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베드로는 다시)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마태 14,30) 베드로가 시험을 해보았지만, 갈릴래아 호수의 물 위에 그대로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물에 빠져들면서 자신의 약함과 무능력을 깨우치면서, 그래도 주님을 불러야 살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해야만 했었다. 베드로는 자신의 약함과 무능을 깨우친다.

예수님께서 몸소 “믿음이 약한 자”(마태 6,30;8,26;14,31;16,8;17,20 루카 12,28)라고 규정하신 대로 두려움 많고, 때로 주님을 시험하지만 언제나 그저 자신의 가련함을 절실히 깨닫고 돌아오는 베드로이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하는 베드로의 외침은 『오, 간절히 바라는 행복한 약함이여Optanda infirmitas!(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1090~1153년, <아가서에 관한 담론> 25,7)』라고 성인이 노래한 대로 나의 약함 안에서 주님의 위대한 능력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진실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약함을 받아주시고, 우리가 넘어지거나 진창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면 언제라도 손을 내밀어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마태 14,31)라고 한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루카 22,61) 할 때,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한 뒤에도 다시 한번 예수님의 눈길을 통해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자신을 붙잡아주신 체험을 하게 될 것이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라는 베드로의 표현은 “주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키리에 엘레이손Κύριε Ελέησον!)”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자비송’ 그대로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이 기도를 담고 살아야 한다.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연약함을 느낄 때마다 부르짖어야 하는 기도이다. 우리가 인생의 바다에서 가라 앉고 있다 싶으면 언제나 주님께 자비를 베풀어주시라고 외쳐야 한다.

그렇게 예수님과 베드로가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마태 14,32)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4,33) “사람들이” “나다!” 하신 분께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대답하며 그분이 주님이심을 고백한다. 사람들의 고백과 베드로의 고백(마태 16,16), 예수님의 임종을 지켜본 백부장의 고백(마태 27,54)이 모두 같다.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요한복음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사람들의 고백 후에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21)”라는 표현을 덧붙인다. 우리들의 고백 한 마디로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가 닿는다.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그리고 우리 각자가 두려움과 고통의 시간이 지나서 알고, 알게 될 것이며, 고백할 내용이다. 예수님을 그저 “유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어 고백하기에 믿음이 부족하고 약한 사람이며,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고, 그분을 향해 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결코 그분께 가 닿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자는 맞바람을 맞으면서도 그분을 만나러 물 위를 걸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그분께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아멘!

One thought on “마태 14,22-33(연중 제19주일 ‘가’해)

  1. “고독의 시간이 하느님 부재의 시간이라기보다 하느님 현존의 시간이었다.”
    마음에 닿으며 묵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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