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는 부활 시기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낸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17장에 이르는 이른바 ‘고별사’에서 모두 5번에 걸쳐 “보호자”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파라클리토, παράκλητος, paráklētos라는 말에서 유래, 우리말 성경에서는 모두 “보호자”로 옮겼다. 위로자나 변호인 등의 뜻이 담겼고 현대 영어에서는 Advocate, the Spirit of truth로 옮겼다)을 약속하셨는데(참조. 요한 14,16-17.26;15,26-27;16,5-11.12-15), 교회는 성령 강림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인류 구원의 사명이 완성되었고, 이러한 구원의 신비가 성령께서 일하시는 교회와 함께 계속됨을 경축하였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용감하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여러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이날을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탄생한 날로 보아서 교회의 생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50’이란 숫자를 뜻하는 ‘펜테코스테Pentecoste’라고도 하는데, 이는 부활 후 50일째를 뜻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강림 사건이 유다인들의 큰 축제인 오순절五巡節, 곧 유다인들의 대축제인 파스카 축제 후 50일에 지내는 축제에 일어난 것으로 알아 왔다. 유다인들이 거행한 오순절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거행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의 그림자요 상징이 되도록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셈이다.(※참조. 오순절 https://benjikim.com/?p=14096)
부활 후 50일이 지난 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도들이 모두 한자리에 함께 모여 있던 오순절에 성령께서 각 사람 위에 내렸다.(오늘 제1독서, 사도 2,1-11) 같은 내용을 전하는 요한복음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날을 주님 부활의 날, “주간 첫날 이른 아침”(요한 20,1)이 있던 날의 “저녁”(오늘 복음-요한 20,19)이라고 기록한다. 오늘 복음은 부활절 저녁, 히브리 사람들의 관습에 따라 새로운 주간이 시작하는 첫째 날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주신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이는 시차에 따른 오류라기보다는 같은 사건을 어떤 시각에서 보는가에 따라 기술하였을 뿐이다. 하나의 교향곡을 다른 방식으로 연주하듯이 같은 사건을 다른 방식으로 전한다고 할 수 있다.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하늘로 오르신 주님께서 이미 약속하셨던 성령을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 후 유다인들의 오순절에 내려주셨다고 기술한다. 루카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 간에 이루어졌던 계약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었고, 이는 돌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참조. 예레 31,31-33) 믿는 이들의 마음에 새겨진 계약이요, 문자로 된 율법이 아니라 충만한 성령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계약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루카는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가운데에 서시어” 이루신 교회의 시작과 탄생을 기록한다. 그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도들은 이제 세상 “모든 민족에게”, “땅끝까지”,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요한 복음사가는 자기 복음의 끝 장면을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는 제자들의 모습으로 그리려고 한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승리를 묘사하면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묵시 21,5) 주님께서 이제 제자들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애초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던”(창세 1,4.10.12.18.21.31), 세상이 죄로 더러워진 후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모든 죄와 죽음을 물리치신 우리 주님 덕으로 죄에서 벗어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졌음을 기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온전한 은총으로 이루어진 구원으로 새로운 인간성이 창조되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이 조건 없이 무상으로 주어진 하느님의 결정적인 죄의 용서가 바로 인류 안에 제자들이 사목자로서 살아가는 사명이요 이유이다. 오늘은 이미 부활 후 제2주일에 읽었던 복음을 다시 주의 깊게 듣고 읽어 묵상한다. 먼 옛날의 고전 한 대목이 아니라 오늘 바로 이 자리의 내 마음과 영혼 안에 성령께서, “진리의 영”께서, 새로움을 깨우치시어 살아있는 말씀이 되어 “진리 안으로 이끌어”(요한 16,13) 주시기를 청하면서 읽고 듣는다.
1. “주간 첫날 저녁…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놓고”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19ㄱ)라고 한다. “그날”은 서기 30년 4월 7일, 그해의 파스카 축제날이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무덤이 비어있음을 발견한 날이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던 순간에 도망갔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그들의 집에서 그들의 라삐이며 예언자이신 예수님처럼 자기들도 유다인들에게 잡혀 투옥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분을 깊이 이해하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면서, 두려움 때문에 도망치고 마비되어, 확신과 믿음에서 주어지는 용기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이도 저도 못 하는 막막한 상황(아포리아, ᾰ̓πορῐ́ᾱ, aporia)에서도 제자들의 마음과 공동체 생활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살아 움직이며 일하고 계셨다. 수도 없이 들었던 말씀, 설령 잠이 들어있었더라도 그들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셨던 말씀, 예수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루카 24,44) 말씀, 예수님과 함께하면 계속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말씀, 하느님의 신비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말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믿음의 힘으로 “보고 믿었던”(요한 20,8) 말씀, 마리아 막달레나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하면서 제자들을 감동하게 하던 말씀이다.
2.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두려움과 믿음이 믿는 이들의 마음에서 싸움을 벌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요한 20,19ㄴ) 부활하시고 살아계시는 영광의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에 오신다. 그렇지만 우리의 눈은 보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볼 용기가 없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라고 말하지만, 부활하신 분께서는 우리가 알아 모시려고만 하면 언제나 우리 가운데에 계신다. 부활하신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에도 당신께서 먼저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가운데 서시는 분이다. 그렇게 우리의 중심이 되려는 분이시다. 이것이 매주간 첫날, 매 주일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요 실제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맨 처음의 주간 첫날에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보다도 더한 특권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중심에 계신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탓이거나, 혹은 우리가 중심에 계셔야 할 그분 자리를 차지하고서 부활하시어 살아계신 그분의 다스림을 훼손한 탓이다.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하고 말할 줄 아는 사람만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 모실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장 큰 유혹으로 맞닥트려야 했던 질문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탈출 17,7) 하는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믿지 못하거나 작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이다. 진실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절대 버려두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시며,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시고 “함께 있겠다”(마태 1,23;28,20) 하는 분이시다. 겟세마니의 제자들처럼(참조. 마르 14,50 마태 26,56) 그분을 버리고 그분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우리이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르 14,71과 병행구) 하고 베드로처럼 그분을 부인하는 것은 우리이다. 그분을 증거하고 증언하는 이들이 있어도 토마스처럼 의심에 의심을 더하고 믿지 못하는(참조. 요한 20,24-25) 이들이 바로 우리이다.
제자들 가운데에 오신 주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ㄴ) 하신다. 평화를 주시고, ‘샬롬’ 하시면서 충만한 생명을 주신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셨다.”(요한 20,20)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제자들이 알아 왔고 생각했던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시어서 “보여주신다.” 제자들이 전에 알았던 예수님이 아닌 까닭은 예수님의 부활이 단순한 시체 소생甦生이 아니라 변화된 몸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인 성령으로 다시 호흡하게 하신 분,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어 세상에 오시기 전 아버지의 품에서 영원히 숨 쉬시던 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영광의 몸에는 사람이 되시어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참조. 요한 15,13) 사랑하신 고난과 수난의 흔적, 사랑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에는 상처, 상흔, 십자가에 달리신 자국, 창에 찔려 열린 옆구리, 당신의 사랑을 선포하시려고 열려 물과 피의 강물이 되고, 그 강물에 인간을 용서하고 깨끗이 씻어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며, “생수의 강”이 되어 “목마른 사람”은 누구나 마실 수 있게 하시느라(참조. 요한 7,37-39;19,34) 열린 옆구리의 상처가 있다.
3. “숨을 불어넣으며…성령을 받아라”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 20,20) 마침내 제자들의 불신이 사라지고 예수님의 현존과 생명이 제자들을 압도한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제자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1-22) 단순히 인간의 숨이 아닌 성령을 불어넣으신다. “한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시듯이(참조. 창세 2,7), 마지막 창조 때에 “사방에서 와…살아나게” 하는 숨(참조. 에제 37,9)을 불어넣으신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청하고 알아모시면 언제나 공동체의 숨이요 호흡을 계속하실 성령을 불어넣으신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숨은 이제 그리스도인의 숨이다. 우리는 성령으로 숨을 쉰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에페 4,30) 하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을 자주 슬프게 하는 때에도, 또 우리가 자주 그분을 의식하지 못할 때도,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에 대한 우리의 배반과 반항으로 숨을 헐떡일 때조차도 우리 각자는 성령으로 호흡한다.
두려움에 문을 잠가놓고 있던 제자들을 되살린 생명의 숨은 우리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숨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을 거부하여 숨이 꼴깍 넘어가는 지경이 되어 자주 “성령을 슬프게” 해 드릴지라도 끝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숨이다. 우리에게 불어 넣어진 생명의 숨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숨, 용서하시는 숨, 우리의 죄를 기억하는 데는 형편없이 기억력이 좋지 않으시는 숨, 우리의 죄들을 언제인가 싶게 흔적 없이 지워주시는 숨이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하신 주님께서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하신다.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의 숨이 된 성령의 첫 번째 효력은 죄의 용서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죄를 용서하시고 죄를 지우시며 하느님께서 더는 죄를 기억하지 않게 하신다. 성령의 숨은 우리를 ‘아버지의 품에’ 안아주시어 우리가 느끼는 그 숨이다.(참조. 요한 1,18에서는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이라 번역하는 부분인데, 희랍어 원문에서는 “εἰς τὸν κόλπον τοῦ Πατρὸς, eis tôn kólpon toû Patrós”이고, 영어로는 ‘in the bosom of the Father, 아버지의 품에’로 직역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한 1,18에서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을 ‘아버지의 품에 계신 외아드님’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같은 예를 “예수님 품에” – 요한 13,23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아버지의 품에 꼭 껴안아 주시듯이 우리를 품에 안아 우리가 고아로 느끼지 않게 하시고, 감히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이 사는 나날이어도 잴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아라” 하신다. 곧 선물로, 은총으로 “받으라” 하신다. 유일한 조건은 선물을 거부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성령을 청하는 이에게는 항상 주신다. 성령은 온전히 충만한 생명이다. 감히 우리가 다 살아내지 못할 사랑의 선물이다. 우리가 매일 누릴 기쁨의 선물이다. 우리가 형제자매들과 하나의 믿음, 하나의 희망을 고백하며 친교를 나누게 하는 은총의 선물이다. 우리가 모든 피조물의 이름으로 주님이시며 창조주이신 분을 고백하고 찬미하게 하는 선물이다.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 26,27) 하신 분께서 이제 “성령을 받아라!” 하신다. 언제나 그저 ‘선물을, 은총을 받으라’는 주님의 초대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받으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라는 것이며,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성령을 호흡하라는 말씀이다.
거룩한 숨으로 살아 숨 쉬는 새로운 생명은 죄 사함을 낳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저희에게(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우리가) 용서하였듯이 저희(우리) 잘못을 용서”(마태 6,12 루카 11,4) 하신다. 죽음과 악, 그리고 죄에서 해방되지 않는 해방은 그 어디에도 없다. 성령 강림절은 우리 일상의 수고와 타락, 그리고 우리를 가두는 악으로부터 이러한 해방을 은총으로 얻는 축제이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영이시자 그리스도의 성령을 호흡하는 이로서 성령의 은총으로 거룩해지며 주님께 기도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존재임을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성령을 받아라” 하시자마자 죄의 용서를 말씀하시는 것이 얼핏 보기에 문맥상 논리적인 비약이나 어색함으로 들리는 듯도 하지만, 성령을 받은 이, 예수님을 통하여 가장 큰 죄를 탕감받은 이가 필연적으로, 최우선으로, 살아야 하는 죄의 “용서”이다. 그래서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23절) 하신다. 일상의 어려움, 넘어짐, 우리를 옭아매는 유혹과 악들에서 우리를 해방하시는 숨이다. 용서받은 이는 용서하는 숨을 쉬어야만 한다. 은총으로 내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께서 나에게 용서하는 호흡을 가르쳐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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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소생이 아니라 변화된 몸. 상처가 아니라 사랑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