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일 ‘다’해(루카 9,28ㄴ-36)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루카 9,35) Transfiguration, by Sieger Köder

사순 제2주일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변모에 관한 복음을 들려주면서 하느님으로서 스스로 기꺼이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이 되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필리 2,7) “하느님께서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9-11) 하는 말씀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 모시어 고백하도록 이끈다.

1.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의 변모에 관한 공관복음의 기록은 오늘 복음을 포함하여 셋인데, 각기 의미 있는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참조. 마르 9,2-10 마태 19,2-9) 오늘 복음인 루카복음은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루카 9,28) 하는 구절로 시작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나서(참조. 루카 9,18-21) “여드레쯤 되었을 때”라고 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날은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신 날이기도 하다.(참조. 루카 9,22)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루카 9,27) 하신 말씀을 확인이라도 해 주시듯이, 제자 중에서 셋을 데리고 산에 오르신다.

특별히 아끼시던 세 제자는 합법적으로 충분한 증인들의 숫자에 해당한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킬 때(마르 5,37), 변모 때(마르 9,2), 겟세마니 동산의 기도 때(마르 14,33) 이 세 사도와 동행하셨다. 전통적인 성경 주석에서 세 사도를 향주向主 3덕에 비겨 베드로는 신덕信德, 야고보는 망덕望德, 요한은 애덕愛德의 표상으로 보기도 한다.(참조. 단테, 신곡∙천국편, 제24-26곡)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신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여정은 주님과 함께 산에 오르는 영적 상승의 여정이요, 동시에 그 산 위의 체험으로 골고타의 십자가에까지 이어지는 여정이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 결정적인 순간에 늘 그러하셨듯이 하느님과 깊은 만남에 들어가신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느님의 뜻을 좇아 ‘아멘!’이라고 응답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모든 기도가 여기에 있고, 그리스도인의 모든 기도가 바로 여기에 담겨있다.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하셨고,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7) 하셨으니, 오직 주님께 순명과 ‘예!’로만 대답해야 하는 – 그렇다고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기꺼움과 믿음으로 – 대답해야 하는 우리의 기도이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라는 내용을 루카는 유달리 강조한다.(참조. 루카 5,16;6,12;9,18) 밤중에, 홀로, 산에서,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함께 수난과 부활의 예고 후 제자들의 신앙이 한 단계 도약할 시점에서 다시 기도에 들어가신다.

루카는 예수님의 기도를 자주 언급한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고쳐주신 다음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고(5,16), 열두 사도를 뽑으시기 전에 산에 올라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으며(6,12), 제자들과 함께 계시던 중에도 홀로 기도하시면서 당신이 누구인가를 물으셨고(9,18), 기도하시던 중에 영광스러이 변모하셨으며(9,29), 일흔 두 제자가 돌아왔을 때 감사하며 기도하셨고(10,21), 기도하시던 중에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셨으며(11,1), 베드로의 배반을 예감하시면서 그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 기도하셨고(22,32),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눈물을 흘리시며 밤을 새워 기도하셨으며(22,40-46),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못 박는 이들이 용서받기를 기도하셨고(23,34), 십자가 위의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께 당신의 영을 맡기신다며 기도하셨다.(23,4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 안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하신다.

몸소 기도하시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당신의 아버지와 만나시는 때와 장소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께서 변화하시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변화하게 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쉽게 이를 잊곤 한다. 하느님께 무엇인가 말씀을 드리고 싶고, 우리의 원의를 표출하고 싶으며, 우리가 굽혀지기보다 하느님이 굽혀지시기를 원하는 이교도적인 기도의 형태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연약하고 가난한 인간의 본성 자체가 우리의 필요에 따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예!’라고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기도를 뒤집어 하느님께 우리가!’하고 “아멘!”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임을 아는 기도이다.

2.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시며 기도하시는 중에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있는 두 사람(모세와 엘리야)도 보았다.”(루카 9,32) 그렇게 세 제자는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2베드 1,16)들이 된다. 루카가 전해주는 바에 따를 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ἕτερον, héteron)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29) 한다. 우리 인간에게 이는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루카가 “모습이 달라지고” 하는 것을 마르코와 마태오는 “모습이 변하셨다”(마르 9,2 마태 17,2) 한다. μεταμορφόω, metamorphoó(to transform>transfigure>transfiguration)이다. 인간의 말로 충분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지고 변한다. 세 제자가 예언자요 메시아로 알고 모시는 분,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다른 모습,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세 제자의 믿음을 변화시키기에는 충분한 예수님의 다른 모습이 계시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말로는 다할 길이 없지만, 경배로만 표현될 수 있는 사건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수 세기를 두고 이 장면에 대해 많은 물음을 가졌었다. 동방 교회의 전통에서는 사실 예수님의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제자들의 눈이 변화되어 일상에서 보지 못한 무엇인가를 알고 볼 수 있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기도 했고(참조.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St. John Damascene, 650~754년경 활동),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 죽을 인간의 육신을 넘어 당신께서 지니신 영광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고 생각했다. 최근 또 다른 이들은 예수님의 변모 모습을 부활하신 주님의 예형으로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이 갖는 믿음의 결실일 것이다. 신앙의 결실인 이 모든 이해는 그 어느 쪽도 배제함이 없이 모두 나름대로 깊은 묵상으로 다가온다. 아주 단순한 보통의 눈으로 보아 이 신비로운 사건은 하나의 ‘계시’임이 분명하다.

갈릴래아 사람 예수, 다른 예언자들처럼 제자들이 있었고 군중에게 말씀으로 가르치신 분, 한낱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셨던 그분은 실로 하느님의 아들이셨으나 진정으로 완전한 한 인간이셨기에 보통 사람들은 쉽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분은 진정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콜로 2,9)라고 바오로 사도가 표현해 준 그대로이다. 바로 그분께서 ‘변모’ 안에서 특별한 세 제자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모세와 엘리야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루카 9,31)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신원을 증언한다. 그들은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께서 방향을 잡아 올라가시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맞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실 때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루카 9,51 참조. 24,51)요 아버지께서 영광 중에 다시 들어 올리실 때이므로 예수님의 ‘출애굽’일 것이다. 앞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이 “율법”(모세)과 “예언”(엘리야)으로 확인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녀온 모든 성경 말씀이 오직 예수님께로 모여 하나를 이루고 충만히 성취된다. 세 제자에게는 이 변모 사건이 자기들이 따르는 분에 대한 봉인처럼 여겨졌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 예수님께서 향하여 가시고 있는 길, 하느님의 계시로 그동안 선택과 언약의 백성이 익히 알아 왔던 모든 성경 말씀, 이 모든 것을 환히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3.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신비 앞에서 당치도 않게 세 제자는 “잠에 빠졌다가 (잠을 극복하고)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본다.”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마르 9,1)에 속하게 된다. 이에 “베드로가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ㄱ) 한다. 일종의 탈혼 상태에서 영적인 투쟁이나 괴로움이 없는 그 상태, 그저 행복하고 환상적인 상태이기만 한 그 상태가 지속되기를 청한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서 우러나온 말은 아니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루카 9,33ㄴ) 비록 우리가 세상 것들에 취해 잠들어 있다가도 다시 한번 깨어나야 하는 시기가 사순시기이다. 우리도 이 거룩한 사순시기에 예수님처럼 산에 올라 기도하면서 우리 안에 담긴 우리 생명의 빛을 다시 바라보도록 해야만 한다. 우리가 장차 변화되어 빛나는 존재가 될 그 모습을 그려보아야만 한다. 과연 내가,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깊은 “잠”은 무엇인가?

『…“초막 셋”이라는 말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천막이나 초막을 친다고 할 때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뜨거운 태양열을 피하고자 함이고, 둘째는 바람으로부터 방어막을 치기 위함이며, 셋째는 쏟아지는 비로부터 젖지 않기 위함입니다.…뜨거운 태양…은 우리를 탐욕의 죄에 빠지게 하는 뜨거운 육신의 불길…다른 이를 죄에 빠지게 만드는 타오르는 정욕의 뜨거움…바람이 세상에 많은 비바람과 악마들의 유혹이 있습니다만, 초막 안에는 기도와 묵상이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은 악마의 유혹에서 우리를 지켜줍니다.…이 세상에는 비가 몰아쳐 우리를 죄짓게 하는 폭풍우와 물난리가 있습니다만, 복음의 천막 안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성 빈센트 페레르, 1350~1419년)』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셰키나Shekinah)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루카 9,34) 세 제자들이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있으나 밝히 볼 수 있는 빛이 아니라 보지 못하도록 하는 구름 속에 있다. 겁이 났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탈출 33,20) 하는 말씀처럼 하느님을 보지는 못하지만, “너희는 (주님께서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소리는 들었지만,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다. 너희는 소리만 들었을 뿐이다.”(신명 4,12) 하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 주었듯이 그분의 말씀만을 듣는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루카 9,35) 구름 속에서 들려온 소리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계시이자 동시에 제자들이 해야 할 바이다. 세 제자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 18,15) 하는 모세의 약속대로 예언자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이사 42,1) 하는 대로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가 약속했던 주님의 종에 관한 성취를 들어야 한다. 이는 수천 년을 두고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 “이스라엘아, 들어라!(Shema‘ Jisra’el)”(신명 6,4) 하는 위대한 명령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되뇌었던 그 말 그대로 이제 ‘예수님을 들으라’라는 계시이다. 율법과 예언을 듣는 것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받으신 사명을 완수하시는 예수님을 듣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세 제자는 하느님께서 보내시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시는 아드님, 하느님께서 들으라고 하신 예수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세 제자에게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루카 9,36ㄱ)

복음의 마지막 절은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루카 9,36ㄴ) 한다. 쉽게 이해가 가지 않고 전할 수 없는 이 사건은 “침묵”으로 끝난다. 예수님께서 다시 세 제자와 함께 계신다. 세 제자는 놀라고 겁나며, 신비에 대한 경외와 경배로 말문이 막히고,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실 때까지는 그들이 보고 들었던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른다. 부활과 변모는 실로 예언이요 표징이다. 아멘!

***

『우리는 그곳(변모의 산)에 급히 올라가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하늘로부터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앞서가신 것처럼 우리도 급히 올라가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올라간다면 우리도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그 빛으로 둘러싸이게 되고 우리 영혼의 모습은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변모되며, 그분의 모상으로 형성되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고 더욱 큰 영광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열렬한 마음과 기쁨을 지니고 그 산으로 달려가 모세와 엘리야, 야고보와 요한처럼 구름 속에 들어갑시다. 베드로처럼 이 신적 영상에 넋을 잃고 이 아름다운 변모의 영광으로 변모되어 이 세상 것들을 벗어나 높이 들리도록 합시다. 육신과 피조물은 뒤에다 남겨 두고 탈혼에 빠진 베드로처럼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창조주께로 향합시다.(시나이의 아나스타시우스 주교, 630~701년)』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