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일 ‘다’해(요한 2,1-11)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요한 2,3) “The Wedding at Cana” by Paolo Veronese, 1563년, 루브르박물관(부분화)

우리가 종종 그리스도인들의 혼배미사에서 낭독하기도 하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 관해 요한이 기록한 말씀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참 어렵다. 우선 이 혼인이 어떤 혼인이었으며 신랑은 누구이고 신부는 누구였는지 의문이 앞선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펼쳐진 공생활의 첫 번째 표징이다. 물이라고 하는 필수적이고도 일상적인 소재가 메시아 시대의 선물인 포도주로 탈바꿈한다. ‘다’해의 복음은 대체로 루카복음에서 선정하는데, 오늘 복음 말씀은 루카가 아닌 요한복음에서 채택한다. 이는 요한복음이 예수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어떻게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는지 전하는 유일한 복음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Lord Byron(1788~1824년)이 오늘 복음을 두고 『물이 주인을 만나 얼굴 붉혔네! The water met its master and blushed.』라고 묘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오늘 복음의 혼인에서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가 누구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으면서 예수님, 그분의 어머니, 일꾼들, 제자들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여러 등장인물 중에서 예수님이 단연코 주인공이신 것은 틀림없다. 실질적으로 다른 등장인물들이 모두 예수님께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혼인의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신부는 나타나지도 않고, 과방장의 질문을 받은 신랑은 아예 답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제4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앞 장인 제1장에서 선발하신 제자들의 공동체를 당신께로 불러 모으시고, 당신과 함께 새로운 혼인 계약을 맺게 된 신부와도 같은 그 공동체와 혼인 잔치를 거행하시는 것처럼 묘사하려 하였다고 할 수 있다.

1.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요한 2,1)에서 보듯이 이 복음서에서 한 번도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는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이미) 거기에 계셨다(ἦν ἐκεῖ, ên ekeî, was there)”라고 묘사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어머니를 먼저 기술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요한 2,2) 한다. 성모님께서 ‘이미 거기에 계셨다.’ 요한 복음사가는 메시아의 시대가 오기를 고대하는 이스라엘의 표상이자 시온의 딸로서, 그리고 7개의 표징을 기록하는 이른바 ‘표징의 책’(1-12장)으로 알려지는 부분, 첫 번째 표징 첫 문장에 성모님이 “거기에 계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미 거기에 계신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모든 표징을 완성하시는 십자가 밑에서도 “거기에 계신다.”(참조. 요한 19,25)

요한 복음사가가 첫마디 말을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표현으로 이 혼인 잔치가 있었던 날을 명시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찍이 시나이 산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백성에게 가거라.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아 셋째 날을 준비하게 하여라. 바로 이 셋째 날에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이 시나이 산에 내릴 것이다.”(탈출 19,10-11) 하셨고, 그에 따라 “셋째 날 아침 우렛소리와 함께…주님께서는 시나이 산 위로, 그 산봉우리로 내려오셨다.”(탈출 19,16.20) 요한 사도는 마치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사이에 만남과 계약이 이루어지던 그 구약의 내용을 상기하듯이 “사흘째 되는 날”, 이어질 4일을 암시하는 바로 그날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첫 번째 기적과 혼인 잔치를 지내셨다고 기록한다. “사흘째 되는 날”은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1코린 15,4)라고 바오로 사도가 기록해준 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계시된 예수님 영광의 날이다.

2. “포도주가 없구나

그렇게 모두가 혼인 잔치에 가 있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요한 2,3)에서 보듯이, 포도주가 없었다. 잔치에 반드시 있어야 할 포도주가 없자,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신)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들)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요한 2,3) 예수님의 어머니는 실제 상황을 파악하는 동시에 예수님께 상황을 알리면서 간접적으로 예수님더러 무엇인가를 하도록 정중하게 요청한다.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다면 어떻게 그 잔치가 흥겹게 이어질 수 있겠는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어머니와도 같은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어머니처럼 ‘포도주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기쁘지 않다.’라는 것과 같은 사실을 주님께 알리는 역할만이라도 성실히 할 수 있다면 이것이 교회로서 이미 중대한 임무를 다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여러 번 생각해 본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행복이요 기쁨의 선물로 주시는 하느님 자신의 약속이며 메시아 시대의 선물이다.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시편 104,15)이요,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주는 이 포도주”(판관 9,13)라는 표현대로 하느님의 마음마저 흥겹게 하는 술이며, 또한 예언자를 통하여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이사 25,6.8) 말씀하신 대로 세상 모든 이에게 약속된 종말의 잔치, 죽음에서 인간이 결정적으로 풀려날 해방을 기념하는 것이고, 또한 신랑과 신부의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축하하는 것이며(참조. 아가1,4;4,10;5,1;7,10),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요엘 4,18) 하듯이 축복의 땅에서 시냇물처럼 흘러내릴 것이 포도주이다.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을 얻게 하시고 기름으로 얼굴을 윤기 나게 하십니다. 또 인간의 마음에 생기를 돋우는 빵을 주십니다.”(시편 104,15) 하듯이 생명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빵을 초탈하게 하는 것은 거저 얻어지는 무상의 술이며, 남성과 여성을 자신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도 술이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 당신을 기억하도록 명하신 성체성사(참조. 마르 14,22-24와 병행구. 1코린 11,23-25)에는 인간이 살기 위해 꼭 먹어야만 하는 빵과 거저 얻어지는 무상과 은총의 포도주가 담겼다. 인간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먹어야만 사는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춤을 추는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3.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포도주가 없는 잔치는 생각할 수도 없으므로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이에 개입하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님께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한다. 수수께끼 같은 예수님의 대답은 어느 정도 어머님과 거리를 두려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육친의 어머니는 어머니일 뿐이니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냥 가만히 계시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당신 어머니와 당신과의 관계는 육체적으로 낳아주셨다는 그 관계에 우선하여 좀 더 결정적이고도 깊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먼저라는 뜻이 담겨있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는 말씀도 아무리 어머니라 할지라도, 또한 당신 자신마저도 자신의 “때”를 결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겠지만 여전히 모호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때”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일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그 “때”에 관한 징조를 아버지에게서 받으실 것이다.

이에 “예수님의 어머니”는 즉각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말없이 몸과 행동으로 보여주시며 아드님에게 순종하는 분으로서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듯이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고 말하였다.”(요한 2,5) 무엇보다도 성모님께서는 당신 역시 들음과 순종의 “제자”임을 보여주시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는 자세로 일꾼들에게 요청하신다. 성모님은 자기 자신의 의도를 일절 남기지 않는다. 참으로 믿음의 여인이었고 들음의 여인이었으며 순명의 여인이었고 제자 중의 첫 번째 제자로서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육감이 빠른 여성의 본능을 지니신 여인이셨고, 어머니의 마음으로 모든 이의 필요를 살피시는 분이셨으며, 사람들의 필요를 예수님께 전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하신 분이셨고, 예수님의 때가 되지 않았어도 예수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예수님께 간청하여 그 열매를 얻어내시는 분이셨으며, 예수님의 첫 번째 표징으로부터 마지막 표징까지 예수님을 동행하셨던 분이다. “어머니”는 아들과 연결되어 완성된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지만, 오로지 십자가 위에서 피로 이루어질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완성하실 표징을 예고하시고자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두세 동이들(요한 2,6)에 물독에 물을 채워라(요한 2,7) 하시고, 이어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요한 2,8) 하고 일꾼들에게 이르신다. 일상의 범상함이 범상치 않음으로, 물이 술로, 인간의 때가 하느님의 때로 바뀐다. 파국으로 끝날뻔한 잔치가 엄청난 풍요로움과 기쁨의 잔치로 전환된다. 일꾼들이 곧바로 순종하며 “물독마다 (물을) 가득 채운다.” “여섯”이라는 숫자는 충만과 완성을 뜻하는 일곱을 향하는 불완전한 숫자임이 분명하다. 하느님께서는 여섯째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다.(창세 1,31) 일곱 번째 항아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사랑으로 채워질 것이다.(참조. 요한 19,31)

교회의 교부들에 따르면 구약의 구원 계획을 상징하는 물이 예수님의 현존 아래 신약 메시아 시대의 ‘새로운 계약의 음료’가 된다.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포텐, πόθεν, póthen>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 순명하며) 물을 퍼 간 일꾼들은 (메시아의 음료가 예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요한 2,9) 하는 구절도 매우 상징적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에파네로센, ἐφανέρωσεν, ephanérosen>.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카나의 표징은 실로 예수님과 당신의 교회 사이에 이루어질 어린양의 혼인과 계약을 위해 대단히 깊은 의미가 담겼다.

600리터가 넘는 많은 물이 잔치의 풍성한 포도주가 된다. 양과 질 모두에서 그 어떤 포도주와도 비교할 수 없고 결코 다함이 없을 예수님 사랑의 선물인 포도주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카나의 포도주를 아직도 마신다. 바로 예수님의 식탁에서 우리가 순종하고 믿는 그분과의 만남을 거행하면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몸인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간에 이루어지는 혼인을 거행하고 축하하면서 카나의 포도주를 아직도 우리는 마신다. 혼인 안에서 “둘이 한 몸”(창세 2,24 마르 10,7.8 마태 19,5.6 에페 5,31)이 되는 것처럼 성체성사 안에서 믿는 이들은 주님이시며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신부인 교회에 온전히 당신을 내어주시는 그분의 몸과 하나가 된다.

혼인이라는 메타포가 그렇게도 강력하면서 무한한 내용을 함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육화의 신비에 관한 진리를 잘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혼인 안에서는 두 몸이 하나의 몸이 되고 포도주의 흥겨움 안에서 사랑의 노래로 일치와 소통이 이루어진다. 우리 인간의 언어는 대단히 제한적이다.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현실을 묘사하려 할 때 특히 더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인간적이고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인 현실, 먹고 마시고, 포도주를 마시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속한다는 사랑의 거행을 위해 몸들이 만나는 것과 같은 현실에 의존하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카나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는다. 없는 신랑과 신부를 찾으라고 그 혼인 잔치에 초대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시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동체가 만나는 자리에 초대를 받는 것이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 서둘러 가야만 한다. 그 초대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 간다. 믿음의 눈으로 보려고 간다. 믿어야 할 말씀을 들으러 간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실행에 옮기려고 간다. 하느님 나라의 포도주를 맛보려고 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만져보려고 간다.

“내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은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5와 병행구) 하신 분께서 하느님 나라의 새 포도주를 우리와 함께 마시기 위해 기다리심을 느낄 것이다. 이미 그분께서 이 땅에서 드신 포도주가 있고, 우리에게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남겨주신 포도주가 있지만, 그분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사 65,17;66,22 2베드 3,13 묵시 21,1)에서 우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드실 것이다. 아멘!

***

「…표징은 하느님의 사랑을 계시해 주는 실마리입니다. 표징은 기적을 일으키는 행동의 힘이 아니라, 그 기적에 담긴 사랑에 주목하게 해줍니다. 표징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쳐 줍니다. 항상 우리 가까이 있고, 온유한 사랑과 자비로 넘쳐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첫 번째 표징은 신랑 신부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 곤경에 처했을 때 일어납니다. 혼인 잔치는 한창인데 필수적인 요소, 곧 포도주가 떨어져 초대받은 손님들의 비난과 불만으로 기쁨이 사그라질 위기에 봉착합니다. 물만으로 어떻게 혼인 잔치를 진행할 수 있을지 상상해 봅시다! 끔찍한 일입니다! 그 신랑과 신부에게 얼마나 곤란한 상황이었겠습니까!

성모님께서는 문제를 알아차리고 예수님께 조심스레 알리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거의 아무도 모르게, 드러나지 않게 개입하십니다. 모든 일이 ‘뒤에서’ 은밀하게 진행됩니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말씀하시고 그 물은 포도주가 됩니다. 옆에 계시면서 주도면밀하게 행동하시는 것, 이것이 하느님께서 행동하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를 깨닫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혼인 잔치가 훨씬 더 아름답게 변한 것을 보았습니다. 아울러 제자들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조용하게 봉사하시는 예수님의 행동 ‘방식’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를 도우시되, 드러나지 않게 도와주십니다. 좋은 포도주가 나온 것에 대한 찬사는 신랑에게 돌아갑니다.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일꾼들은 알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씨앗이 제자들 안에서 자라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이,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 안에 계심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첫 번째 표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생한 특별한 치유나 기적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소박하고 구체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행동, 곧 가정의 일상에서였다고 생각할 때 이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 첫 번째 표징을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으며’ 신중하고도 조용하게 일어난 기적이라고도 생각해 봅시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고 일으켜 세우실 준비가 되어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표징”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도 그분의 사랑에 사로잡혀 그분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22년 1월 16일 삼종기도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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