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세례 축일 ‘다’해(루카 3,15-16.21-22)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루카 3,21) 14-15세기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주일, 연중 제1주일

오늘 끝 기도로 성탄시기를 끝낸다. 지난주 공현 대축일로 실질적인 성탄시기를 마감한 교회는 바로 사순시기로 넘어가지 않고 부활절이 언제 올 것인가를 계산하여 연중시기를 지낸다. 그래서 연중 제1주일이면서 동시에 공현 대축일 다음 주일로서 주님의 세례 축일을 지낸다. 이는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신다는 의미를 담는데, 본격적인 연중시기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성령 강림 대축일 후에 지속된다.

예수님의 세례 축일은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펼치던 요르단강에서 예수님께서 물속에 잠기신 날, 장성한 예수님으로서 첫 번째 모습을 보는 날, 예수님께서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시는 첫째 장면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복음서는 저마다 이 사건을 각자의 관점과 필치로 기억하며 기술한다. 우리는 오늘 ‘다’해의 복음인 루카복음을 따라서 그 특징적인 면을 살피려고 시도할 것이다.

1.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을 두고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하였다.”(루카 3,15) 그러나 요한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루카 3,16) 한다. 세례자 요한은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을 강조하고 물이 아닌 세례, 곧 “성령과 불의 세례”, 자기가 오히려 세례를 받아야 할 분을 외친다. 추정하건대,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며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가신다. 루카복음은 이 장면을 오늘 복음의 첫 구절에서 “백성은…” 하고, 18절에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하면서 유달리 “백성”을 강조한다.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해야 하는 유다의 ‘많은 사람’, 곧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루카 1,17)을 강조하고자 하는 표현이다.

“백성”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익명의 군중 속 한 사람으로서, 남녀가 뒤섞인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라고 하는 이들로부터 자신을 특별히 구별하고자 하지 않으시면서 그들과 하나가 되시어 세례자 요한에게 나아가시고 자신을 물속에 잠그라고 하신다. “백성과 함께 그들 안에서 그들과 하나가 되신다. 분명 평범하고 보통 사람들이었으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 그 “백성”은 이제로부터 하느님께서 ‘영원히 당신 백성으로 삼으실 새로운 백성’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신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경탄하게 할 수 있는 어떤 말씀이나 설교, 혹은 어떤 기적이나 이적이 없이 예수님께서는 인간 중의 인간으로서, 지극히 인간성을 띠신 분으로서,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신 분으로서, 하느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인간이라는 형제자매들과 완전한 연대를 이루시는 분으로서 등장하신다.

루카는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일로 예수님의 개인적인 체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묘사하려 한다. 루카는 우선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루카 3,21)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에 초대교회가 죄 없으신 분이 죄 많은 이들과 함께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여 당황하였던 흔적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인이 아니신 분이 죄인들 틈에 끼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는 겸손하신 하느님의 모습으로 다가오신다. 조물주이신 분이 피조물이 되시고,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신 일 자체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겸손’의 신비이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은 이처럼 인간의 생각을 넘어 극단적인아래로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어지는 “기도를 하시는데…”에서 루카는 다른 복음들과 달리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기도”하셨고, 그 기도에 대한 하늘의 응답, 곧 하느님 아버지의 현존과 다스림이 임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루카 복음사가에 의할 때 예수님의 공생활 중 첫 번째 행동은 “기도”였고, 십자가 위에서 공생활을 마감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행동 역시 “기도”였다.(참조. 루카 23,46)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2022년 1월 9일 주님 세례 축일 삼종기도 훈화에서 “기도하면 하늘이 열립니다. 생명에 산소를 주고, 환난 중에도 숨을 쉬게 합니다. 기도하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동안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초대한다. “기도는 과연 무엇일까? 기도는 무엇보다도 침묵이고, 자기 내면에 하느님의 성령이 임하실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개인적으로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그리스도인의 기도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말도 아니고, 어떤 정해진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며, 애덕 실천도 아니고, 바로 침묵이다. 하느님과 성령의 말씀을 받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 후 첫 번째 당신 제자들 공동체에게도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사도 1,4) 하셨고 이에 따라 제자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사도 2,1) 성령께서 오시기를 기도하며 성령께서 임하실 자리와 공간을 만들며 기다렸다.(참조. 사도 2,1-12) 루카는 이런 까닭으로 예수님께서 기도와 그 기도가 잘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하셨을 때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하셨다고 기록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성령을 모시는 서곡이며 기도의 성취는 성령의 은총이다.

2. “성령께서그분 위에 내리시고너는 내 아들

다시 예수님의 세례 장면으로 돌아와 보자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을 물에 잠기게 하라 하고 말씀하시지만, “기도하시면서” 당신 존재 자체가 온통 성령께서 거하실 자리로 준비하신 것이며, 마침내 예수님 안에 거하실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신다.”(루카 3,22) 성령은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하는 대로 천지 창조의 순간에 온 천지에 머물고 있었던 바로 그 하느님의 영이다. 땅에 임하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 곧 셰키나, שכינה, Shekinah의 표징이다. 하느님의 영, 성령이 내리시기 위해 하늘이 열리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하는 말씀, 예수님만을 두고 하는 말씀이 울려 퍼진다. 바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려 주는 하늘의 소리이다. “하늘이 열리며”라고 한다. 죄 없으신 분이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죄인들 가운데 서실 때 하늘이 열린다.

비둘기”라는 상징에 관해서 만족할만한 설명이 제시되지는 못하지만, 교부들은 노아의 방주로 돌아온 비둘기(창세 8,8-12)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를 즐겨 인용한다. 어떤 학자들은 유다인들의 전통에 따라 비둘기를 이스라엘과 동일시하거나 이 세상에 내려오는 하느님의 사랑(아가 2,14;5,2)을 가리킨다고 이해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세상 창조 때에 심연의 물 위를 감도신 성령을(창세 1,2) 비둘기 모양으로 연상했던 또 다른 유다인들의 전통을 따라서 복음서의 이 비둘기가 예수님의 세례 때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를 상기시킨다고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동정 마리아의 태중 위를 선회하던 성령이라 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신원을 분명히 밝혀주기 위해 루카복음은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 하는 말씀을 인용한다. 그렇지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하였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미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알고 계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원을 계시하시는 내용을 넘어 메시아로서 당신의 사명을 공적으로 시작하시는 예수님을 두고 일종의 즉위 선언(활동 개시 선언)과도 같은 내용이 된다. 다른 복음사가들도 대동소이하게 전하는 내용(참조. 마르 1,11 마태 3,17)이지만, 이는 시편 말씀과는 약간 다르다. 시편 말씀에 더하여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이사 42,1) 하면서 “주님의 종”을 두고 하시는 예언의 말씀과도 다소 차이를 보인다.

복음들이 굳이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기록한 것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하였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오심을마음에 들어하시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하겠다. 이와 같은 하늘의 소리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때에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라는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의 선택받은 종이심을 선포하고 수난과 죽음을 향한 여정에 나아가셔야만 하는 그분의 말을 들으라는 확인이 된다.

복음의 장면에서 그 누구도 이 하늘의 소리를 듣지 않았고, 성령이 예수님 위에 내리시는 것을 보지 못한다. 조금 후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시어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루카 4,18 이사 61,1-2) 하고 몸소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권위 있게 선포하실 것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관한 계시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예언자로서, 주님의 종으로서, 당신의 부르심과 사명을 정확하게, 그리고 온전히 이루실 것이다.

3.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쯤에 활동을 시작

루카는 오늘 복음에 바로 이어지는 구절로서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쯤에 활동을 시작하셨는데(루카 3,23)라는 구절을 기록한다. 이는 여러 해 동안 예수님의 숨겨진 시기를 짐작하고 추측해보게 한다.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던 해…”(루카 2,42), ‘바르 미츠바Bar mitzvah’(히브리어 בַּר מִצְוָה), 곧 예수님이 종교적으로 성인이 되었다고 인정하는 예식이 있을 때로부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던 “서른 살쯤”의 계시가 있기까지 예수님께서 평범하게 지내셨을지라도 어떻게 지내셨을까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불명확하다. 그렇다고 해서 환상과 상상으로 그 시기를 재구성하고 예수님 가족 내에서의 활동이나 노동자(목수)로서의 예수님, 나자렛의 예수님 운운하며 ‘영성적’인 차원을 개발하려 해보았자 별 소용이 없는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드님으로서 기다릴 줄 아셨고, 설령 특별한 소임이나 역할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하느님의 오늘’을 사는 법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우리는 그 기간에 예수님께서 사람이나 가족에게보다도(참조. 루카 2,49 사도 5,29) 무엇보다 하느님께 순종하신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생명 안에 『결코 나뉠 수 없는 동반자(체사레아의 성 바실리오, 329/330~379년)』이신 성령을 모시기 위해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셨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예술을 이루셨으며, 성경 말씀을 열심히 듣고 또 들어 성령에 순응하고 순종하고자 하셨으며, 선지자요 라삐인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셨고, 이 과정에서 당신의 사명과 소명을 식별하셨다. 이렇게 “서른 살쯤”에 이르신 예수님께서는 성인으로서 이제 당신의 때가 왔음을 아셨다. “헤로데 영주”가 당신 스승인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참조. 루카 3,19-20)을 아셨을 때가 바로 그때였다. 그때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질 때였으며, 복음을 선포할 때였고,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사도 10,37-38) 하는 바로 그 일들이 일어날 때였다.

요르단 강물에 잠기는 세례로 시작된 예수님의 이 여정은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목까지 물이 들어찼습니다. 깊은 수렁 속에 빠져 발 디딜 데가 없습니다. 물속 깊은 곳으로 빠져 물살이 저를 짓칩니다.”(시편 69,2-3) 하고 외치시며 물과 피를 쏟으실 십자가 위에까지 이어질 여정이다. 죄인들 틈에 끼어 조용히 시작된 예수님의 이 여정은 평생 죄인들 사이에 사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끔찍한 두 죄인인 강도들 사이에 들어 올려지기까지(참조. 루카 22,37;23,33 이사 53,12) 계속될 여정이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의로움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수많은 사람도 가여워하실 것이지만, 죄인들 사이에서 숨을 거두시면서까지 한 죄인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하고 약속하시고자 한 주님의 여정이다. 숨을 거두시자마자 예수님께서는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 하는 하늘의 소리, 아버지의 목소리,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시는 음성,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일으키시는 성령의 음성을 다시 한번 들으실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여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의 첫머리에서 “그리스도 예수님…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마 1,1.3-4)라고 서술한다.

예수님의 세례 축일은 성탄 시기의 마지막 공현Epiphany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베들레헴에서 목자들과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고, 이방인의 땅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에게 유다인의 왕으로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으며, 당신의 공생활 서두에 세례를 받으시며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이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 보이셨다. 이제 다음 주부터 교회는 루카복음에 따라 부활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그분의 뒤를 따라가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루카 9,31)을 어떻게 이루어가셨는가에 관한 긴 여정에 오를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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