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의 부상負傷

Accident of a fisherman(They still say fish is expensive) by Joaquin Sorolla, 1894년, 프라도 미술관

소위 ‘빛의 거장(master of light)’이라고 알려지는 스페인 화가 호아킨 소롤라 이 바티스타Joaquín Sorolla y Bastida(1863~1923년)는 발렌시아 출신으로 지중해의 태양을 놀랍도록 포착해낸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지중해 해변의 장면을 색상과 빛으로 채우면서 생명력이 넘쳐나는 서민들의 삶을 세세하게 그린다. 지중해 해변의 또 다른 스페인 건축가인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는 지중해의 태양 각이 자연과 자연의 요소들을 완벽하게 보여주기에 최적이라고 말한다. 가우디는 지중해 해변에서 자란 사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더 잘 볼 수 있는 반면 유럽 북쪽 기후의 어두운 빛과 무거운 기후의 빛은 추상화나 추상화 비슷한 작품에 훨씬 더 적합하다고 말한다. 아마도 소롤라 역시 이에 동의할 것이다.

<어부의 부상負傷(그림의 원제목은 영어로 ‘어부의 사고事故, Accident of a fisherman’이지만 여기서는 ‘사고’를 ‘부상’으로 옮겼음)>이라는 작품, 일명 ‘사람들은 여전히 생선이 비싸다고 말한다(They still say fish is expensive)’라는 작품은 호아킨 소롤라의 1894년 작품으로서 현재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품은 조그만 어선 내부를 보여준다. 비좁은 공간에서 평온하면서도 체념한 듯한 표정을 띤 두 명의 어부가 부상을 입어 바닥에 쓰러진 동료를 보살피고 있다. 한 사람은 동료를 부축하며 다른 한 명은 벌거벗은 동료의 피가 흐르는 상처를 눌러 피가 멈추도록 애를 쓰고 있다. 이 그림은 금세 소롤라가 고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어부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들의 삶에 관한 회화적 기록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사회의 전체적인 경제 구조에 관한 신랄한 고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9세기 격변하는 유럽의 사회 전반이 그러했듯이 스페인 역시 이 시기에 일련의 급진적인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국가 경제의 근대화라는 목표 아래 자유주의 개혁이 몰아치면서 교회나 지방 자치 단체, 종교 단체나 장인들의 조합과도 같은 전통적인 조직이 공동으로 소유하던 모든 토지가 국가에 몰수되었다. 이러한 개혁은 농업경제를 산업화된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하기 위한 것으로서, 소위 비생산적인 토지를 시장의 힘에 내맡겨 생산성을 높이자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몰수된 토지는 결과적으로 부유한 지주들의 손에 넘어갔고, 공동으로 소유하던 토지의 자원에 의존하던 서민들은 대부분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도시로 이주하거나 신세계로 이주해야만 했다. 그렇게 도시 이주민이 양산되었고,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이 해체되면서 자유주의 질서에 적합한 개인주의가 자리를 잡았으며,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파괴되면서 그 자리에 외래 자본이 들어섰다.

시장市場이 선에 무관심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정의에도 무관심해지게 마련이다.

이러한 경제 개혁의 이론적 토대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유명한 저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사상가였던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저녁 식사는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장 사장, 빵 가게 주인의 호의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이윤 추구에서 빚어진다. 우리는 그들의 (훈훈한) 인간미가 아니라 이기심을 이야기해야만 하고,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을 아주 단순한 각도에서 읽게 되면 모든 경제적 거래 활동이 탐욕과 이기심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스미스가 말하고자 한 것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말했던 것은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오히려 훨씬 더 부정적인 내용이 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제기했던 문제는 소위 시장이라는 것이 그 시장 참여자들의 배려(benevolence, 라틴어의 원뜻인 ‘선을 향한 의지to will the good’)나 인간미와는 전혀 상관없이 작동한다는 점이었다. 그에 따를 때 시장은 선에 무관심하다. 스미스는 사람들이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시장은 시장의 원리에 내맡겨 놓을 때 사람들이 이기적이든지 그렇지 않든지에 상관없이 알아서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논리로서 시장에서의 이윤 추구가 행성 이동에서 보는 중력과도 같은 것이라고 비유한다. 다시 말하자면 간섭하지 않을 때 가장 잘 작동하게 되는 메커니즘의 엔진과도 같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를 세속적으로 패러디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의 작동에 의해서 시장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동기와는 상관없이 모두에게 가장 최적의 선善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시장이 선에 무관심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정의에도 무관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정의는 내가 얻어야 할 이익과는 무관하게 누구나 각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몫을 뜻하는 상대방을 향한 덕목이다. 스미스의 시장 원리에는 굳이 정의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 시장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것 자체가 원래부터 조작적이어서 나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범위 안에서만 상대방의 이익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세의 소위 ‘정당한 가격(just price)’이라는 개념 자체가 경제적 담론에서 제외된다. ‘정당한(정의로운) 가격’ 대신 수요와 공급이라는 상반된 힘의 균형에 의해 형성되는 ‘시장가(market price)’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스미스가 개인들의 상호 작용 사이에 분명히 어떤 질서가 등장할 것을 파악했다는 점에서는 평가받을 만하지만, 그러한 질서가 반드시 선할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은 오류였음이 틀림없다.

세기의 말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상황은 대다수 스페인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소롤라가 화가로서 명성을 쌓아가던 당시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를 기록하면서 종종 이에 항의하기도 하는 사회적 사실주의(social realism)라는 장르가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 글에서 주목하고 있는 이 그림 역시 그러한 장르에 속한다. 그림에서는 얼핏 보기에 강력한 지중해 태양 빛이 배 밑창까지 내리꽂히는 중에도 그림의 부제라고 할 수 있는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생선이 비싸!’라고 말한다(And They Still Say Fish Is Expensive!)”라는 내용을 밝혀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림의 제목과 내용은 소롤라의 친구인 비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즈Vicente Blasco Ibáñez의 소설 <플로르 데 마요(Flor de Mayo)>의 마지막 대목에서 따온 것인데, 광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결국 죽어 나간 어부의 아낙이 “이 일이 지나고 나면 사람들은 어시장으로 몰려갈 거야. 창녀들도 갈 거야. 그리고 당신들을 때려눕히려 덤벼들 거야. 그리고 여전히 생선값이 너무 비싸다고 말할 거야. 천박하고 싸구려인 것들이 50원이나 75원에도 비싸다고 말할 거야.”라고 넋두리하는 장면이다.

구매와 판매는 양 당사자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정의는 모든 교환에서 상호 상대방의 이익이 필수적이어야 함을 요구한다.

앞서 언급한 스미스의 시장 이론에 근거하여 무엇인가를 사고파는 거래에 따른다면 소롤라의 그림 제목은 의미가 없다. 어부들이 물고기값을 흥정하는 생선 구매자들에게 화를 낼 이유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것이 바로 시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시장은 시장대로 어떤 질서 아래 작동할 것이라는 스미스 식의 예측은 옳았으나 스미스가 생각한 대로 그 질서가 반드시 선에 입각해서 작동할 것이라는 예측이 엉뚱한 결말로 다가왔을 때 스미스에게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계몽주의적인 시각은 우리 인간이 우리 인식을 어떻게 왜곡하고 변형해 가는가를 보여준다. 상당한 파장을 몰고 온 스미스 식의 시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우리는 또 다른 지중해의 아들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4/5~1274년)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

성인의 「신학대전」 제2권 77번 물음에서 성인은 사고파는 매매에서 발생하는 속임수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정의’라는 덕을 논하는 장에서 펼쳐진다. 성인의 질문과 답은 소롤라의 제목 선택보다 더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예를 들어 1항에서 누군가가 어떤 물건의 값어치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판매한다면 이것이 합법적인가를 묻는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즉시 “그럼요. 할 수 있고 말고요! 그건 누구나 바라는 바이잖아요.”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아퀴나스는 이를 예상이라도 했었다는 듯이 “이는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것이고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면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 두 번째의 논증을 전개한다. “물건을 사는 이는 ‘나쁘다, 나쁘다!’ 하지만 돌아가서는 자랑한다.”(잠언 20,14) 하는 말처럼 사람들이 구매할 때는 값을 깎으려고 형편없거나 별로라고 얘기하면서도 막상 사고 나서는 좋은 값에 좋은 물건을 샀다고 뿌듯해하듯이 싼값에 사서 비싼 값에 팔고 싶어 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있는 성향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사악한 것이니 이러한 성향에 저항하고 이러한 성향을 극복하는 정의의 실현은 각 사람의 능력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인은 어떤 값진 책에 대해서 무지하여 형편없이 낮은 가격을 부르는 누군가에게 정당한 가격을 쳐 준 사람의 예를 든다. 정당하지 않은 큰 이득을 꾀하는 일반적인 욕망은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악에서 나온 것이며 이를 보아 많은 사람이 죄의 길을 걷고 있다고 결론 짓는다.

그런데, 이러한 ‘성향’이 아퀴나스 성인의 말씀처럼 과연 악으로부터 빚어진 것일까? 아퀴나스 성인은 분명하게 잘못된 속임수를 쓰려는 욕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싼값에 사서 최대한 비싼 값에 팔려고 하는 욕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악의적인 것은 거래에서 최대의 이득을 얻으려는 욕망이다. 아퀴나스 성인은 이에 관해 “구매와 판매는 양 당사자의 공동 이득을 위해 성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쪽 편에 있는 사람은 저쪽 편에 있는 사람의 소유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서로가 마찬가지이다.……공동의 이득을 위해 상호 성립된 거래라면 어느 한 편이 다른 한 편에 부담을 지워서는 안 되는 것이므로 그 어떤 것이라도 상호 간의 계약은 동등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구매와 판매는 양쪽의 선익을 위해 존재하고, 정의는 모든 거래에서 상대방의 이득이 필수적이어야 함을 요구한다.

스미스와 달리 아퀴나스 성인은 정의로운 경제 질서를 위해서 상대방의 선익을 바라는 배려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견지한다. 이러한 상호 배려가 빠진 경제 질서는 누군가에게 대단히 효율적이고 막대한 부를 창출할 수는 있지만, 본질에서 불공평한 것이다. 자기만의 이익을 도모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절대강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권력 투쟁만이 존재한다. 스미스 식의 현대 사회 경제 구조 안에서 강탈자는 자기 돈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까지 고려하여 값을 매길 수 있지만,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어부는 자기의 목숨값을 고려하여 생선값을 매길 수는 없다.

다시 한번 소롤라의 그림으로 돌아가 그 그림을 보게 되면, 이제는 강한 지중해의 햇빛으로 눈이 밝아져 조금 전에 보았던 식으로 그 그림을 볼 수 없게 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겉으로 보기에 평온한 장면에서 의로운 분노가 치민다. 그리고 그림의 제목이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 목소리로 들린다: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기 밀도 내다 팔자.’ 주님께서 야곱의 자만을 두고 맹세하셨다. ‘나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아모 8,4-7)

예언자의 음성은 스미스의 비뚤어진 경제관만이 아니라 그러한 시각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도 해당한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도 전혀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사도 바오르는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필리 2,3-4)라며 준엄하게 우리를 채근한다. 어디 그뿐이던가? 우리의 주님께서도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하셨다고 아퀴나스는 위에 거론한 논증에서 주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그런데도 무엇인가를 사려는 사람들은 제값에 사려 들지 않고 한 푼이라도 깎으려 든다. 물론 파는 이의 입장에서도 제값보다 더 비싼 가격에 팔려고 해서도 안 된다.

C.S.루이스Lewis는 1953년 성 죠반니 칼라브리아St. Giovanni Calabria께 드리는 편지에서 유럽이 어떻게 타락해갔는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공산주의자들이 거짓 광고로 떠들어대는 정의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보살핌은 사실 우리가 벌써 오래전에 실현했었어야만 했던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 서양인들은 입술로만 그리스도를 전하고 행동으로는 맘몬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이 없는 이들보다도 더 죄가 큽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이를 행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더 큰 벌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는 회개와 기도뿐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잘못을 저질러 왔습니다. 유럽의 역사, 파괴적인 전쟁의 연속, 탐욕, 그리스도인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박해, 사치와 허영, 게걸스러움, 교만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읽어가면서 가히 성령의 흔적을 찾아볼 수나 있겠습니까?”

소롤라의 그림은 교회의 사회 교리만큼이나 웅변적인 사회 비판이며 그 이상이다. 회개의 촉구이다.(*그림-구글, 바탕이 된 글: https://www.wordonfire.org/articles/sorollas-painting-a-call-to-repen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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