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올 희년은 인간과 지구를 위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꿈 안에서 다시 생각해야만 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회개”라는 말이 방향의 전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마침내 모든 것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우리의 발걸음이 새로운 목표들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렇게 절대 실망하지 않는 희망이 생겨납니다. 성경은 이에 관해 여러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
성경 구절이나 성인들의 저작물은 때로 우리를 놀라게 하다 못해 두려워하게까지 한다. 그런 내용은 우리를 치고 때린다. 어떨 때는 정신을 못 차리게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살아계시고 (반드시) 일을 내시고야 마는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흔드시는(unsettled by the living and effective word of the risen Lord)” 것이다. 12월 3일에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년)의 편지 또한
교회의 역사는 노인의 경험과 젊은이들의 새로운 생각들이 어우러지는 지혜를 추구한다. ‘할배, 할아범’ 등으로 부르는 할아버지는 ‘크다’는 뜻의 ‘한’을 붙인 ‘한아비’라는 말에서 왔다. ‘할미, 한미, 할마니, 할멈, 할맘, 할매’로 불리는 할머니 역시 ‘크다’는 뜻의 ‘한’을 담았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버지, 어머니를 넘어 분명 그보다 더 ‘큰’ 분들이시다. 두 분을 함께 부를 때는 엄마·아빠, 할머니·할아버지 하듯이 엄마가 먼저이고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성경에는 형제와 자매들의 이야기가 많다. 카인과 아벨, 야곱과 에사우, 야곱의 아들들인 요셉의 열두 형제, 모세와 아론……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 비유 안에 등장시킨 큰아들과 작은아들,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 세 남매, 열두 제자 중의 형제들……그렇게 성경에는 서로를 질투하고 해치는 형제들, 친형제가 아니면서도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형제처럼 살아간 형제들이 많다. 형제자매들, 심지어 남매들까지도 각기 그 개인적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주간에 교회는 온 천하에 당신을 드러내신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신가를 밝혀주는 복음들을 듣는다. 그중 하루는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만난다. 복음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미 앞선 4장(35-43)에서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밤바다를 건너다가 거센 폭풍우를 만나 죽게 되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도움으로 살아난 이야기를 들었다. “물 위를 걸으시는 분”이 누구이실까? 거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고,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정신, 그리고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출산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탄생하신 것은 역사적으로 단 한 번이었으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까지 예수님은 거듭 태어나셔야만 한다. ‘예수님을 낳는다(giving birth to Jesus)’라고 하는 이 개념은 교회의 초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성 이레네우스St. Irenaeus는 인간이 “운반”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인간이
당신께서는 저희 육신이라는 연약하고 불안정한 이곳에 태어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루하루가 불러일으키는 안타까움과 갈증 안에 태어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황량한 곳에 태어나 저희 인간처럼 살기로, 항상 때늦은 시간의 무게만을 짊어진 채 살아가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단편적인 시간 속에 살기로 선택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저희가 살아가는 부질없는 재(灰)의 소용돌이, 불확실과 피곤한 딜레마의 흐름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당신께서 저희를 찾아오신다면 그것은 저희가
1년 열두 달 어느 달에나 성모님을 기리는 중요한 날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특별히 12월은 가톨릭교회에서 성모님을 기리는 신심으로 중요한 달이다.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에는 먼저 8일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고, 12일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자이신 과달루페의 성모님을 기리는 축일을 지내며, 이어서 16일부터는 성모님과 함께 9일 동안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린다. 성모님을 향한 교회의
*「자기비하(self-deprecation)는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belittling), 저평가(undervaluing), 경멸(disparaging)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비난(reprimanding)하는 행동, 혹은 과도하게 겸손한, (겸손 아닌 겸손의) 행동을 말한다.」(위키백과) *** 자신과 화목하지 못한 믿음이 있다. 그런 믿음의 소유자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 대치하려 한다. 이런 믿음에서 하느님은 부족한 자존감을 메꿔주는 이(로 전락하고 만다.) 자신을 보잘것없고 하찮다고 여기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사와 세상사 안에서 특별히 영적인 주요 원리를 드러내 주는 개념이나 말마디들은 언제나 쌍을 이룬다. 선과 악, 하느님과 인간, 평화와 전쟁, 사랑과 미움, 삶과 죽음, 선생과 제자, 영혼과 육체, 강과 약, 하늘과 땅, 섬김과 지배, 높음과 낮음, 천사와 악마, 권능과 무력함, 아름다움과 추함, 순응과 추구, 열정과 냉담, 친숙한 것과 뜻밖의 것, 살아야 할 것들과 피해야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