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요한 8,11)

갈등과 폭력이 들끓는 세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요한복음 8장 2-11절에는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전해진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소란이 일었다. 한 무리가 분노에 들끓어 한 여인을 끌고 왔다. 그녀는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이었다. 그들은 그녀를 예수님 앞에 내던지며 외쳤다. “모세는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녀는 이미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한 인간이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루카복음의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루카 18,9-14)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본질을 가르치신다.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기도 같지만 ‘기도가 아닌 기도’, 그리고 ‘참다운 기도’가 무엇인지 성찰하게 된다. ① 말이 많은 기도: 입술만 바쁘다. 이는 하느님을 설득하려는 시도일 수 있으며, 많은 경우 자기 확신을 되뇌는 독백이 되어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에게 드리는 기도이다. 주님께서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7) 하셨다.

이상한 주인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6.37)」 복음은 준비하는 종들, 기다리는 종들, 깨어 있는 종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복음에는 뜻밖의 반전이 있다. 집에 돌아온 주인이 오히려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종들을 시중드는 놀라운 장면이 등장한다. 우리가 모시는 주인은 밖에서 돌아와 문을

앎·지식

“앎·지식”은 교육, 학습, 경험 등을 통해 얻은 무엇인가에 관한 앎이다. 그런데 지식에는 실제로 알지 못하면서도 알고 있는 듯 착각하거나 ‘~척’하는 건너편의 지식, 남에게 팔아 돈을 벌기 위한 지식, 누군가를 조종하거나 통제하기 위해 무기가 되는 지식 등이 있다.(*참고. 김건중, 지식답지 않은 지식, 경향신문, 2006년 9월 15일) 이들은 성경의 언어로 “사이비 지식의 속된 망언과 반론들”(1티모 6,20; ψευδωνύμου

고통

고통은 두 가지 얼굴로 다가온다. 하나는 몸을 찢는 외상의 고통, 다른 하나는 마음을 가르는 내상의 고통이다. 몸의 고통은 눈으로 볼 수 있다. 깁스에 싸인 다리, 붕대에 감긴 손, 그 상처는 시간의 손길을 통해 서서히 아물어간다. 사람은 그 고통을 받아들이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위안을 붙든다. 그러나 마음의 고통은 다르다. 보이지 않기에 더 깊고, 말해지지 않기에 더

고통 중에서도 감사할 이유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은 감사하는 존재다. 우리는 누리는 생명에 감사하고, 창조의 신비를 볼 수 있는 눈에 감사하며, 관계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에 감사한다. 어려움과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감사한다. 그리스도인이 항상 감사하는 이유는, 단지 고난이 지나가고 좋은 일이 생기며 더 나은 시기가 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느님께서 좋으신 분이시며, 사랑 그 자체이시기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죄罪

(Homo incurvatus in se)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죄”의 본질은 하느님을 향해 열린 존재여야 마땅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로 굽어지고 휘어져 자아중심적으로 왜곡되어 있는 상태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본성이 진정한 자아가 아닌, 하느님 계시는 곳이 아닌,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 곧 자기 중심, 내향적 폐쇄, 자기 갇힘 상태로 설정되어있는 것으로 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죄 이해를 바탕으로

노년의 문턱에서

*옆의 이미지는 ChatGPT에게 “지혜로운 노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 하나를 달라.”고 요청하여 얻은 이미지이다. 내가 한국말로 묻고 있고, 나를 한국인으로 알고 있을 텐데 왜 서양 사람의 이미지로 주었느냐고 따졌더니, 「제가 처음 이미지를 만들 때 사용한 기본 프롬프트(묘사)가 ‘지혜로운 노년’을 특정 인종을 지정하지 않고 요청받았기 때문에, 이미지 생성 모델이 학습 과정에서 흔히 등장하는 **서양인(백인 노인)**의 대표적인

십자가

그리스도교를 그저 바라만 보거나 그리스도교에 관하여 탁상공론이나 벌이려고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언제나 불편한 스캔들이요 “걸림돌이며 어리석음”(참조. 1코린 1,23)이고, 십자가를 둘러싼 비유와 표징들 역시 그러하다. 그리스도인에게조차 바오로가 코린토 1서 1장 17절에서 고발한 것처럼 “십자가를 헛되게 하려는” 유혹은 되풀이된다. 비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와 십자가를 둘러싼 논리가 비인간적이거나, 고통을 그릇되게 해석하려는 잘못된 시도로 비칠 뿐이다. 언제나 그래왔다. 더구나

복음 선포가 이루어진 세 가지 길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는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표징과 이적의 힘으로, 하느님 영의 힘으로 이루어졌습니다.”(로마 15,18ㄴ-19ㄱ)라고 말하면서 이방인을 복음의 길에 들어서도록 인도하는 일, 곧 복음 선포가 이루어진 세 가지 길을 밝힌다. 해당 구절은 신약성경의 언어로 “λόγῳ καὶ ἔργῳ, ἐν δυνάμει σημείων καὶ τεράτων, ἐν δυνάμει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logo kai ergo, en dunamei semeion kai teraton, en duname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