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쫓으신 사건(마태 21,12-17)이 있었던 뒤에,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 바리사이, 사두가이 등 소위 기득권층이나 지도자들과 논쟁이 벌어진다. 이러한 논쟁 끝에 “예수님께 감히 묻는 사람이 더 이상 없었다.”(마태 22,46) 그렇지만, 이러한 논쟁은 예수님께 수난과 죽음을 향한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때 벌어진 논란은, ① 예수님의 권한(21,21-46) ② 세금-주민세의 납부(22,15-22) ③ 부활 여부(22,34-40) ④ 가장 큰 계명(22,34-40) ⑤ 메시아는 누구의 자손인가?(22,41-46) 하는 문제들이었다. 이와 같은 소위 5대 논쟁 중 오늘 복음은 그 4번째에 해당한다.
1.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른바 ‘부활 논쟁’에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사악한 자들은 무리를 지어 덤비는 습성이 있다. 그들 가운데 율법 전문가인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다시 한번 시험하려고 물었다.(참조. 마태 22,34-35)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시비를 걸거나 올가미를 씌우려는 ‘질문’ 아닌 질문이다. “어찌하여 민족들이 술렁거리며 겨레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거슬러 세상의 임금들이 들고 일어나며 군주들이 함께 음모를 꾸미는구나.”(시편 2,1-2)라는 시편 말씀 그대로이다.
율법 교사의 질문은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하는 것이었는데, 이 질문은 당시 소위 배웠고 말하기 좋아하는 라삐들의 전통에서 자주 논의되던 소재였다. 그들에게는 이미 10계명(탈출 20,1-17 신명 5,6-21)이라는 계명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또한 613개의 계명이(‘~을 해야 한다’라는 식의 248개의 긍정 계명과 ‘~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식의 365개의 부정 계명들로 이루어진) 있었으니, 이를 전제하고 묻는 셈이다. 올바른 질문이라면 이렇게 많은 계명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을 묻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식이어야 했을 것이다.
2.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에 대해 율법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어렸을 적부터 매일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과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에 두 번 소리 높여 기도하는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라는 신명기의 기도문을 이용하여 답을 주신다. 이 기도문은 히브리 사람들의 전통 안에서 유일무이하신 하느님을 선포하고, 그분을 들어야 한다는 믿음, 그러한 깨우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온 마음과 온 생애와 온 정신을 다 하여 그분을 찬미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 기도문에는 하느님 앞에서 들어서 믿고, 믿어서 알며, 알아서 사랑한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과 역동성이 담겼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이 계명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내가 사용하고 있는 인간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할 수 없는 하느님, 현존이 모호한 하느님을 과연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우리 각자가 “자기가 믿음 안에 살고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 따져 보십시오. 스스로 시험해 보십시오.”(2코린 13,5) 하고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대로, 그리고 요한 사도께서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5-16) 하신 대로, 우리 자신이 “믿음 안에 살고 있는지”, 또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지” 진지하게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실체를 향한 우리 사랑의 의지인바, 자칫하면 우리가 스스로 지어낸 우상이거나 인간적인 투사일 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이라 부르며 ‘우리 식대로 만들어낸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는 허상일 수도 있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정말 “따져”볼 수나 있는 것일까? 우리가 하느님이라 부르는 분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에 따른 체험이나 욕망을 개발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런 이유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오직 ‘들음’에서만 시작한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일상 기도의 첫 말을 “들어라!”라는 말로 시작한다. 하느님을 들으며,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새로이 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지어낸 하느님 상을 거부하고,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당신 얼굴을 가린 ‘베일을 거두어주심’(계시, revelation<re-veil, 베일을 거두다)으로 당신을 보여주시는 참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된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 저의 하느님, 이 몸 피신하는 저의 바위, 저의 방패, 제 구원의 뿔, 저의 성채이십니다.”(시편 18,2-3)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편 63,2) 등등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그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어떻게 노래하였는지 잘 안다. 사랑을 노래하는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러한 표현이 실제로 우리의 사랑을 정말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이 살아계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이유이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는 굶주림이 없는 사랑, 사랑하고 싶다는 바람만이 있는 사랑의 가능성은 없다.
시편 작가는 거듭 “주님은 저의 몫이시니 저는 당신 말씀을 지키기로 약속하였습니다.…저는 당신의 것, 저를 구하소서. 당신 규정을 찾습니다.…보소서, 저는 당신 규정을 사랑합니다.”(시편 119,57.94.154)라고 노래한다. 마치 이 말씀들을 기억하고 되풀이하듯이 요한 복음사가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4,23;15,10)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준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곧 한계가 없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에 미쳐 열정적인 앎에 들어서는 것이지만, 들은 대로 살아서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 감히 그 사랑을 받기에는 가당치도 않은 우리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랑이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킨 결과로 응답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16)이라는 말씀처럼 “사랑(아가페αγάπη)”이신 분을 관상하면서 얻어지는 사랑이다.
3.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므로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서 직접 파생되는 명령이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문화에서, 하느님을 믿지 않고 그분을 모르는 문화 안에서조차도 이웃 사랑은 보편적인 규범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계명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가르침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마태 22,37-39) 하신다. 여기에서 보면 이웃 사랑의 계명을 하느님 사랑이라는 첫째 계명 바로 옆에 두시고 거의 동격으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은 이웃 사랑으로 행동한다. 그 이웃은 우리 인생살이 안에서 우리가 만나 내가 “이웃이 되어주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다. 예수께서는 ‘누가 이웃인가?’라는 질문 앞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누가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말씀으로 이웃의 개념을 바꾸신다. 누구라도 ‘내가 되어준’, ‘내가 되어주어야 할’ 이웃이 나의 이웃이다.(참조. 사마리아인의 비유, 루카 10,29-37) 이웃 사랑은 이론이 아니고, 인류애와 같은 보편적인 사랑만도 아니다. 내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서 매번 슬기롭고 창의적으로 진실하게 표현하는 사랑이다.
이미 동서고금을 통해 보편적인 지혜로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 7,12) 하는 황금률은 우리 각자에게 이웃을 사랑하되 그 사랑의 길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실수’에 대한 책임까지도 포함하는 사랑을 말한다. 사랑의 길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실수는 아마도 사랑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죄일 것이다. 아예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는 사랑해서 아프더라도 사랑해야 한다.
공관복음 모두가 전하고 있는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에 마태오만이 특이하게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마태 22,40)라는 구절을 덧붙인다. 마태오는 내용상 같은 문장을 앞서 언급한 황금률을 전하는 대목에서도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라는 말로 똑같이 덧붙이고 있다. 그 대신 마르코는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라는 말을 붙인다. 다시 말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로마 13,8) “사랑은 율법의 완성”(로마 13,10),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갈라 5,14),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야고 2,8) 등에서 보듯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모든 율법의 종합이자 요약이며 최우선으로 기록하면서도, 굳이 나누어 얘기할 때 하느님 사랑까지 충분히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지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계명을 첫째, 둘째, 해가면서 굳이 둘로 나누어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리 인간이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은 하나일 뿐이며, 그런 의미로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일 뿐이다. 이를 두고 요한 사도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게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라고 표현해 준다. 이를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눈에 보이는 형제를 들을 줄 모르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들을 수 없다’라는 말이며, ‘눈에 보이는 형제에게서 믿음을 얻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으로부터도 믿음을 얻지 못한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사랑과 하느님 사랑의 두 계명을 한 십자가에서 살아내셨다. 그래서 이는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 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2대 서원’이라 하며, 예수님 달리신 십자가의 가로축과 세로축이고,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이다.
우리는 이 복음을 수도 없이 잘 들어서 잘 알고 잘 이해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옛 히브리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의 능력에 관하여 매일 무릎 꿇고 점검해야만 하는 사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해야 한다”라는 이 표현에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 모든 삶의 이유와 의미가 담겨있다. 이를 두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께서는 『하느님 사랑은 순서로 보아 모든 가르침의 첫째이며, 이웃 사랑은 가르침 실천의 첫째입니다.…이웃을 보는 당신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하십시오.(요한복음 해설, 17.8)』라고 한다. 이웃을 사랑하다 보면 하느님을 보는 눈이 맑아진다.
예수님께서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마태 22,40)하고 율법 교사에게 하신 말씀을 두고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다른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온 율법과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종합이고 요약이지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로마 1,17 갈라 3,11 히브 10,38 하바 2,4)이라는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다. 믿음이 있는 곳은 사랑을 거스르는 곳이 절대 아니다. 이와 같은 논조로 라삐 심라즈Simlaj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해준다.
『시나이 산에서 613개의 계명이 선포되었는데, 이는 1년 열두 달 매일 날 수에 맞추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경계하는 365개의 부정 명령과 인간 몸의 구조적 숫자에 맞추어 248개의 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긍정 명령이었다.…그리고 다윗이 와서 이 계명들을 시편 15편에 기록된 것처럼 11개로 압축하였다.…그리고 이사야 예언자가 와서는 이를 이사 33,15-16에 기록된 대로 다시 6개로 줄였다.…그리고 미카 예언자가 와서는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 6,8)라고 기록하며 3개의 계명으로 줄였다.…그리고 또 다른 이사야가 와서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이사 56,1)라며 2개의 계명으로 줄였다.…그리고 마지막에 하바쿡 예언자가 와서는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 2,4) 하며 한 개로 줄였다.(바빌로니아의 탈무드, 마콧Makkot. 22a)』
우리는 요한복음이 전해주는 바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곧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15,12) 하신 하나의 계명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하여라’ 하시면서 나에게서 받았으니 나에게 내어놓을 것을 내어놓고 책임지라는 식의 사랑이 아니라, 당신을 떠나 그저 번져가고 퍼져가는 사랑을 요구하셨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어 당신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다른 이를 주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유다인들이 ‘율법’을 가졌다면,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율법을 요약하신 바로 그 ‘사랑’을 가졌다. 아멘!
사랑!
이웃의 실수까지도 사랑하라.
실천!
“이웃을 사랑하다 보면 하느님을 보는 눈이 맑아진다.” 묵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