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만찬 성 목요일 ‘다’해(1코린 11,23-26)

“예수님께서는…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

통상 주님 만찬을 기리는 성 목요일 전례에서는 성체성사의 제정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나 예수님의 동작과 말씀은 없으나 성체성사의 본질을 밝혀주는 요한 복음사가의 의도를 존중하여 전통적으로 제4복음서의 대목을 듣는다. 성체성사의 제정에 관한 성경의 근거들은 마태 26,26-28 마르 14,22-24 루가 22,19-20 1코린 11,23-26 총 4부분이다. 공관복음서나 요한복음의 내용을 해설할 기회는 다른 때도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바오로 사도의 서간문(1코린 11,23-26)에 나오는 근거를 해설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해를 거듭해가면서 무궁무진한 성체성사의 깊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가난과 무지를 조금씩이라도 더 깨우쳐 간다. 주님의 사랑에 대한 앎이 조금이라도 더 깊어지도록, 그리고 그러한 앎이 우리의 일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현실이 되고 실천이 되도록 기도하면서 말씀을 듣는다. 오늘 전례의 2독서를 따라가면서 예수님의 성체성사의 제정을 살펴보겠지만, 23-32절 내용 전체를 일일이 분석하는 것보다는 몇 가지 주안점에 주목한다.

교회 모임을 가질 때에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1코린 11,18.20)라고 말을 시작한 바오로 사도는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1코린 11,23)라고 말한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날에 공동체 모임에서 지내는 “주님의 만찬”을 “주님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라 하면서 코린토 교회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전해 주었다고 확인한다. 바오로 사도는 하나의 행동, 하나의 몸짓을 주님 말씀으로 받았다고 한다. 성체성사는 교회가 준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성체성사 안에 담긴 충만한 신비로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항상 전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1. “잡히시던 날 밤에

이어서 바오로 사도는 주 예수님께서는 (배반당하시어) 잡히시(고 넘겨지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1코린 11,24) 한다. 그날 밤은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로부터 배반당한 밤, 인정을 받지 못한 밤, 버림을 받던 밤이었다. 공동체의 결속이 깨지던 그 비극적인 밤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체성사의 말씀과 동작을 전하신다. 성찬 기도문의 양식을 “잡히시던 날 밤에”라는 말에 따라서 ‘배반을 당하시던 밤에/버림을 받으시던 밤에/베드로가 자기의 주님을 부인하던 밤에…’ 하는 식으로 실감 나는 표현을 삽입해 볼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체성사라는 선물을 주신 앞뒤 상황이다. 언약과 계약의 선물인 그 성체성사의 선물이 처한 맥락은 분명 주님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모두에 의해서 처절하게 깨져버린 언약이요 망가져 버린 계약의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그 밤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교회 생활의 본질적인 기념과 기억으로서 성체성사의 동작과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하신다. 계약이 망가진 그 밤에 예수님께서는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ㄴ.25ㄴ) 하시며 당신 제자들과 당신의 계약을 거행하신다. 우리는 그 밤을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마지막 밤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는 배반과 부정, 버림을 온몸으로 받아내신 밤이라는 맥락 안에서 성체성사의 은총이 주어진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모든 복음서는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요 계약의 만찬을 하고자 하셨다고 전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이 식사를 계획하셨고, 식사 준비를 위해 제자를 파견하시기까지 하셨으며, 결정적인 때가 다가왔을 때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 22,15)라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셨다. 공관복음서는 모두 파스카 만찬이었다고 하는 데 반해서 제4복음서는 의미심장하게도 그 만찬이 파스카 만찬이었는지 여부조차도 명시하지 않는다. 요한 복음사가에게는 오직 그 만찬이 ‘계약의 만찬’이라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파스카 만찬인지 아닌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약”이 중요했다고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주님의 만찬은 거창하고 번잡한 식사 의례가 모두 생략되고 중대한 의미를 담은 빵의 예식과 포도주의 예식이라는 내용으로 단순하게 요약이 된다. 유다인의 식사에서 빵과 포도주는 본질적인 요소들인데, 주님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는 그 물질적인 내용을 초월하는 의미를 담는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먹고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먹고 마심이 기도와 전례, 무엇보다도 당신 계약을 거행하는 것이 되기를 바라신 것이다.

2.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떼어 주시며

그런 뜻으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εὐχαριστήσας, eucharistésas)’ 다음, 그것을 떼어(ἔκλασεν, éklasen)’ 주시며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라고 기억하여 기록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축복의 말씀을 전하면서 찬미 안에서, 축복 안에서, 감사 안에서 빵을 쪼개어 나누신다. 이 동작 안에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이 입장에서 별생각 없이 빵을 쪼갤 수도 있을 것이므로 우리가 충분히 묵상하지 못한 성체성사의 본질이 담겨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빵을 “떼어”에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님의 손에는 당신께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빵이며 하느님께 드려야 할 빵이 놓여 있다.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의 선물을 예수님께서 “떼어”, “(나눠) 주시고”, 마침내 이를 모두가 ‘공유’한다.

식사는 동물이 아닌 인간만이 하는 위대한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성찬에서 받고, 감사하고, 공유한다. 우리가 받는 빵은 공유를 위해 받는 것이고, 쪼개어져 식탁에 둘러앉은 모두가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모두가 ‘같은 빵’을 나누어 먹는 것(공동으로 나눔, sharing in common)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식탁의 공동체를 설립하시고, 모든 이가 같은 빵에 참여하면서 ‘친교’하고 ‘일치’하도록 하신다. ‘코이노니아’(바오로 사도의 용어이다, κοινωνία, koinonía=fellowship, partnership, communion by intimate participation)를 이루는 ‘코이노노이’(κοινωνοὶ, koinonoí=sharer, partner, companion)이다. 예수님 성찬의 식탁은 의롭다거나 의롭지 않다는 것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날 밤 그 식탁에는 감히 그 성찬에 합당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 하시면서 빵을 주신다. 음식을 먹어 생명을 유지하듯이 예수님의 이 빵을 먹으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유지한다. 예수님의 몸은 가능한 한 가장 현실적인 실체의 계시였다. 모두가 한 몸이 되기까지,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까지,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감히 가당치도 않지만, 그 지체가 되기까지 하는 바로 그 몸이다. 이것이 바로 심오하고도 실제적인 성체성사의 역동성이다. 이 성체성사 앞에서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염려 따위는 적절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여러 억측이나 오해를 지어낼 수 있으며 그리 똑똑하지 못한 처사임이 분명하다.

예수님의 말씀과 동작을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배반의 그 밤으로부터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날까지 반복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바로 그 성체성사의 영적인 역동성에 들어간다. 성체성사는 바로 이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당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당신의 몸을 쪼개고 떼어 나누는 주님의 식탁에 우리가 함께 앉는다. 우리는 당신의 공생활 내내 당신의 친구들과 함께 베타니아에서 늘 빵을 떼어 나누시는, 죄인들의 집에서 함께 식사하시며 빵을 떼어 나누시는, 당신께 다가왔으나 당신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던 이들과 함께 빵을 떼어 나누시는, 당신을 버리고 배반하고 부인하던 열두 사도와 함께 빵을 떼어 나누시는 주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진실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런저런 온갖 사람들, 죄 많은 사람과 함께 빵을 떼어 나누셨다는 사실이다.

3. “잔을 들어내 피로 맺는 새 계약

바오로 사도는 성체성사가 그리스도께서 죄 중에 있는 죄인들을 불러 그리스도 안에 일치를 이루도록 이루어진 성사라는 이 첫 번째 예식 부분을 기억한 후, 이어서 다음 두 번째 의식 부분을 상기시킨다.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5) 잔과 함께 주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빵을 떼어 나누는 삶으로서 코이노니아, 곧 공동체 생활을 더욱 깊이 심화하시는 말씀으로서 이러한 삶이 정확하게 예수님의 “피로 맺는 새 계약”이라는 사실을 밝히신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마태 26,27)에서 보듯이 예루살렘 전통을 따르는 마르코나 마태오, 그리고 안티오키아의 전통을 따르는 루카에 이르기까지(참조. 루카 22,20), 그리고 이제 이곳 바오로에 이르기까지 “계약의 피”라는 사실이 시종일관 분명하게 드러난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예레 31,31-32)라는 오래전 예언의 말씀처럼 이제 예수님께서 “그날…그때에” “새 계약”을 맺으신다. 이제 예수님께서 당신 손에 들고 계신 그 잔은 예수님의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위해서는 예수님의 피로 맺어지고 봉인된 결정적이고도 최종적인 바로 그 새로운 계약을 맺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들고 계신 그 잔은 예수님 말씀이 지닌 은총의 효력으로 예수님의 피가 담긴 새로운 계약, 새로운 계약인 예수님의 생명이 담긴 잔이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주님의 종’으로서 사명을 띠시고 “주님인 내가…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이사 42,6) 하는 말씀처럼 새롭고도 결정적이며 깨질 수 없이 영원한 계약을 이루시는 사명을 지시어 이제 뭇 “백성들을 위한 계약”이요 뭇 “민족들”을 위한 계약, “새 계약”을 이루신다. 빵을 떼어 나누신 말씀과 동작에 이어 잔을 드신 두 번째 예수님의 말씀과 동작에서는 이처럼 코이노니아가 곧 계약임이 드러난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오직 한 개의 잔이 있을 뿐이므로 그 하나의 잔을 돌려 마심으로써 우리는 오직 하나의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눕니다.’라고 말해 볼 수 있다. 피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잡아 바치던 동물의 피로 올리는 희생 제사가 아니라 당신 존재 자체를 희생 제물로 내어놓으신다. 예수님의 봉헌에는 동물의 제사로 드리는 의례가 없을지라도 당신의 생명, 당신의 존재를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해 바치는 봉헌이 있다. 그러나 주님의 피가 담긴 잔에서 주님의 죽음과 수난의 피만을 보면 안 된다.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의 생명 자체이다. 예수님의 피가 담긴 잔에는 예수님의 온 생명이 담겼고, 존재론적인 희생과 봉헌이 담겼으며, 섬김과 돌봄,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형제와 자매들을 “끝까지 사랑”(요한 13,1) 하신 그분의 온 사랑이 담겼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셨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많은 죄를 걱정하시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안에서 우리가 겪을 고통에 대해서 더 염려하셨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하면서도 사람들 안에서 사람들이 겪을 고통보다도 그 사람들이 지은 죄만 보기를 더 선호하는 우리 자신을 ‘기억하라’ 하신 것이다. 히브리서가 그리스도의 이 희생 제사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어떻게 읽었는지 잊으면 안 된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사람이 되실 때에)…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5-7 시편 40,7-9)라고 전하면서 마치 예수님의 기도문처럼 예수님의 봉헌을 알려준다.

생명 자체로 여겨지는 “피”로 봉헌된 예수님의 존재론적인 희생 제사요 봉헌이 온전하게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드려졌다. 빵을 떼어 나눔으로 드러난 코이노니아와 “잔”으로 드러난 새롭고도 결정적인 계약을 두고 히브리서는 절대로 훼손될 수 없고 풀릴 수 없는영원한 계약의 피”(히브 13,20)라고 말해준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이 “새로운 계약의 피”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마태 26,28),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마르 14,24),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루카 22,20) 하는 식으로 죄의 용서를 위한 피라는 사실을 밝혀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는 새로운 계약이 성립된 곳에 죄가 있을 수 없으며, 죄로써 하느님과 갈라지고 떨어지게 되는 분리보다도 이미 하느님과 강한 일치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우리 각자가 책임져야 하는 계약을 전제로 하는 친교이며 일치이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성사를 배반할 유다에게, 당신을 부인할 베드로에게, 또 어리석고 비겁하며 확신도 없는 제자들 모두에게 주셨다. 그들 역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처럼 예수님의 손님들이었다. 우리 각자는 내가 혹시 유다는 아닌지, 베드로는 아닌지, 또 예수님을 버린 제자 중 하나는 아닌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로마 7,4 1코린 10,16;12,27 에페 1,23;4,4.12 히브 10,10)을 알아보라고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몸”, 곧 그분의 몸과 피를 알아보게 되고 그분의 생명을 알아본다면 그 자리에는 단죄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 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7-29)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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