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일 ‘다’해(루카 6,27-38)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 by Maria Cavazzini Fortini

지난주 열두 사도와 함께 산에서 내려와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군중에게(참조. 루카 6,17) “평지”에서 참행복과 불행 선언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 다음의 예수님 말씀이 이어진다. 마태오복음 역시 오늘 복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지만, 루카의 기록은 약간 짧고 다른 음조를 띤다. 오늘 복음인 루카에서 전하는 내용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 안에 이미 자리를 잡은 내용과 비교하거나 논쟁하려는 성격보다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소위 그리스도인이 지녀야만 할 차별성이 강조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공동체로서 다른 많은 사람과 이방인들 가운데 살면서 어떻게 주변을 존중해야 하고 복음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1. “원수를 사랑하여라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루카 6,27)이다. 무엇인가 어떤 요청이나 명령, 기본적인 내용을 말씀하시려는 도입절이다. 이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하신다. 물론 이 말씀은 지난주에 들었던 ‘불행 선언’의 네 번째 불행(참조. 루카 6,22-23)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 ‘원수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참조. 레위 19,18 루카 10,27)을 극단적으로 확장하라는 초대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요구사항으로서 대단히 역설적이고 스캔들이 되기에 충분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복음을 주석하는 초기의 주석가들은 예수님의 이 명령을 두고 모든 인간적인 지혜나 윤리를 능가하는 새로운 말씀으로 해설했으며 이스라엘의 후손들까지도 이 말씀이 율법(토라)을 능가하는 말씀으로 인정했다.

이러한 배경 안에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과연 우리 인간이 나를 미워하고 해치려 들며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하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구약성경에서 옛 언약의 백성들이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적과 원수들, 악인과 거만한 자들, 죄인들에게(참조. 신명 7,1-6;25,19 시편 5,5-6;139,19-22 등등) 하느님께서 원수를 갚아 주시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죄인들을 가까이하지 말고 그들에 맞서 그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신데, 과연 미워하고 저주하며 학대하는 이들에게 잘해 주고 축복하며 심지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이 말씀에 대단히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당연히 가능’하고 또 가능해야만 할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진지하게 이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해 보아야 하고, 궁극에는 이와 같은 사랑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식별해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서조차도 우리를 비방하거나 뒤에서 험담하고 욕하며 고통을 주고 우리 인생을 힘들고 슬프게 하는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 것이 아주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로부터 내가 받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 직접이든 간접이든 복수하지는 않더라도 그 상대방을 향해 내 마음속에 사랑의 감정을 키워간다는 것이 어쩌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그런 경우 사랑의 감정을 키워가기는커녕 ‘다시는 보지 않겠다’라고 결심 아닌 결심을 하고 상황이나 사람을 회피하고 마는 것이 대부분이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고 명하신 예수님께서는 몸소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시면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끝까지” 사랑과 용서를 사셨다. 이 명령으로 은총으로만 가능한 이 사랑을 요구하신다. 이러한 기조를 담고 루카 복음사가는 자신의 두 번째 저서인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을 증언하며 돌에 맞아 처참하게 숨졌던 첫 번째 순교자 스테파노의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하는 외침을 기록한다.

“원수 사랑”이라는 이 명령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전통에서 벗어나 제자들의 행동을 혁신적으로 규정하신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 5,20) 하신 우리의 “의로움”이 여기에 담겼고,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1코린 1,18) 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여기에 담겼으며, 이것이 복음을 사는 이들의 괴로움이다. 여기 “사랑하다”라는 동사는 아가파오(ἀγαπάω, agapáo)로서 우리를 적대시하는 이에게 거침없이 다가가는 것이며,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는 이에게도 그의 선익을 바라는 것이고, 선을 행하는 것이며 나 자신처럼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2.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예수님께서는 2인칭 단수로 말씀하시면서 가정할 수 있는 몇 가지 표면적인 예를 들어 말씀을 이어가신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루카 6,29-30) 하신다. 때리거나 훔쳐 가는 사람에게 대적하지 말고,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손을 내미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주고, 설령 빼앗겼더라도 되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우리를 해치는 이에게 속수무책으로 그저 소극적인 태도로 항복하고 말라는 말씀만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성전 경비병 하나로부터 뺨을 맞으셨을 때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3) 하고 본을 보여주신 바가 있다.

「… 우리가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 때” 느끼는 ‘부당함’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떠올려 봅시다. 수난을 받으시는 동안, 대사제 앞에서 부당한 신문을 받으실 때, 어느 순간 성전 경비병 중 한 사람에게 뺨을 맞으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시나요? 그를 무례하게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경비병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3) 그분께서는 부당한 대우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십니다. 다른 뺨을 내민다는 것은 불의에 굴복하고 침묵으로 견디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질문을 통해 부당함을 표명하십니다하지만 분노 없이폭력 없이오히려 온화하게’ 표명하십니다논쟁을 촉발시키려 하지 않으시고, ‘분노를 가라앉히려’ 하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곧, 증오와 불의를 함께 꺼트리면서 죄 지은 형제를 회복시키려 하는 것입니다이는 쉬운 행동이 아니지만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고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이것이 바로 다른 뺨을 내미는 것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심은 당신께서 뺨을 맞으신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응답입니다다른 뺨을 내미는 것은 패자가 물러나는 게 아니라내면의 힘이 더 큰 사람의 행동입니다. 적이 가진 증오가 얼마나 불합리한지 드러내며적의 마음에 균열을 내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그래서 이런 태도곧 다른 뺨을 내미는 것은 계산된 행동이나 증오의 행동이 아니라 사랑의 행동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로부터 받는 과분하고 거저 받은 사랑은 모든 복수를 거부하고, 마음속에 당신과 비슷한 행동을 실천하는 방식을 낳습니다. 우리는 복수에 익숙합니다. “네가 나에게 이렇게 했으니, 나도 너에게 그렇게 하겠다”라거나 마음속에 이런 앙심을 품는 데 익숙합니다. 앙심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그 사람을 파멸시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삼종 기도 훈화, 2022년 2월 20일)」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라는 말씀으로 2인칭 복수를 사용하시면서 이른바 ‘황금률’을 설파하신다.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상호성”이라는 것이 권리나 그런 척하는 처세로서가 아니라 나의 바람이라는 잣대로 타인에게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긍정문이다. 예수님의 공생활이 있기 불과 얼마 전 라삐 힐렐은 『너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너의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내용을 두고 ‘가능한 모든 선을 이웃에게, 원수에게까지라도 행해야 한다’는 긍정문으로 바꾸고 계신다.

이렇게 해야만, 즉 호혜성을 떠나 다른 이를 사랑하고, 손익을 따지지 않고 선행을 하며, 이윤이나 보상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베푸는 삶을 살면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차별성’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삶의 행동 방식 안에서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이들은 죄인들과 악인들의인들과 불의한 이들믿는 이건 믿지 않는 이건누구를 막론하고 품어주시고 돌보신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상호성과 호혜성, 응답과 받아들임에만 제한하시지 않고, 거저 베풀어주시고 사랑하시며 모든 피조물을 보살피시는 분이시므로 그 하느님을 믿는 우리도 그분의 왕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 세상살이 여정 안에서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을 다시 한번 길게 설명(루카 6,32-35)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시고, 그에게(원수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루카 6,35)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몸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하늘에서 ‘큰 상’(μισθός, misthós, 보상)을 장차 받을 것이지만 이미 이 땅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그분의 아들과 딸이 된다는 사실은 어찌 볼 때 미친 짓이고 믿을 수 없는 일인 것도 같지만 이는 분명히 우리를 당신 자녀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약속이다. 구약에서 당신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라고 명령하신다.

완전”이라는 말은 ‘텔레이오이, τέλειοι, téleioi’이다. 인간이 궁극에 도달해야 하고 그리워하는 하느님의 “자비”이다. 호세아 예언자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호세 11,9 참조. 호세 11,8-9) 하고 노래한 대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 34,6) 그리스 철학에 의하면 완전함은 오직 신에게만 해당된다. 그러나 자비롭게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완전함에서 멀리 있지 않으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그리스도교는 가르친다.

3. “심판단죄용서주어라

복음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남을 단죄하지 마라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용서하여라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주어라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7-38)라며 댓구처럼 반복되는 구절들로 끝난다. 심판과 단죄를 하지 말라는 두 번의 부정문과 용서하고 주라는 두 번의 긍정문이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삶은 한없이 용서하시고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것을 주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매일의 일과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삶이고 동시에 해야 할 것을 하는 삶이다.

심판”과 “단죄”는 하느님의 몫이고 인간은 그 누구도 그분을 대신할 수 없다. 그렇지만 주의해야 한다. 사람들의 행실과 사실을 판단(이때 동사는 κρίνω, kríno, 판결·결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없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식별할 수 없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심판하고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사람은 그가 범하는 못된 행실을 훨씬 넘어서는 존재일 수 있고 우리는 누군가를 충분히 다 안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가 져야 하는 책임의 한계를 완전히 가늠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이신 성령의 빛으로 누군가의 행실과 사실을 파악하지만, 그 누군가라는 사람의 신비 앞에서 멈추고 그를 감히 심판하고 단죄하려 들지 않는다. 심판과 단죄의 주권자는 하느님이시니 겸손하게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드린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항상 나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다른 모든 죄인처럼 나 역시 가난하고 불쌍한 존재이며 하느님의 자비를 비는 존재임을 안다.

심판과 단죄가 하느님의 몫이라면 “용서”하고 “주는” 것은 제자의 몫이다. 우리 약한 인간들은 서로 “용서”하며 함께 산다. 이탈리아 말에서 ‘주다(기부하다)donare’라는 말이나 ‘용서하다perdonare’라는 말은 ‘선물dono’이라는 어근을 같이 담고 있다. ‘주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닮았고, 이것이 인간 상호 간의 인간다운 ‘선물’이다. ‘용서’는 ‘선물 중의 선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다’, ‘용서하다’, ‘선물’이라는 이 세 단어에는 모두 하느님이 담겨있다.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인간끼리의 인간적인 상호성과 호혜성을 부인하신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만 상호성과 호혜성을 기대할 수 있는 존재이다. 주는 것, 선물, 하느님의 행위가 다른 이들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심판 날에 심판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 속한 자가 되어 주님에게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받을 것이다. 오늘 내가 누군가에게 되어주는 되가 내일 내가 받는 넘치는 되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차별성’은 이처럼 소중하고 또 귀한 것이지만, 오직 주님의 은총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아멘!

One thought on “연중 제7주일 ‘다’해(루카 6,27-38)

  1. 지는 유… *원수*가 음써유~
    대신 유… *웬수*는 드글드글 거려유~!

    예수님께서 웬수를 사랑혀부라~~~ 했씸유.. 웬수도 사랑혔을꺼시구먼요 ?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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