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든 짧든 인생을 돌아보면, 내가 위기의 순간에 두려움이나 불만이 아닌 든든한 믿음으로 대처하게 해준 동행, 별로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꼭 필요했기에 내 인생에 끼어든 동행,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함께 기도하고 가르치면서 날이 갈수록 나를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해준 동행, 내 인생의 모든 잠재적 가능성을 충만하게 열 수 있도록 부추겨준 동행, 성령께서 닿지 않으시는 곳이 없고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듯이 그렇게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내게 와 닿아 나에게 힘을 주는 동행, 얼핏 순간의 짧은 한마디 말로도 내가 기도할 수 있게 해준 동행,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준 동행들이 있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도 그 여정 자체가 ‘동행’이요 ‘동반’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든 관계 자체가 모두 ‘동행’이요 ‘동반’이다. 인연이든 악연이든, 부부간이든, 부모와 자식이든, 이웃과 친구들이든, 동행 아닌 것이 없다. 많은 성인聖人들과 성현聖賢들도 조물주나 하느님과의 ‘동행’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형태로든 영적인 혈연으로까지 불릴 만큼 대단하고 놀라운 누군가와의 ‘동행’과 ‘동반’의 삶을 살았다. 이들에게 동행’과 ‘동반’은 『하나의 제도이며 환경』이자 인생의 학교였다.(성 요한 바오로 2세, ‘전 세계의 젊은이들에게Parati Semper[Dilecti Amici]’, 1985) 인간들은 이렇게 어떤 형태로든 ‘동행’과 ‘동반’을 산다.
내가 누군가의 동행과 동반으로 지금 여기까지 왔고, 그래서 내가 다시 한번 누군가를 동행하고 동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누구도 동행할 수 없다. 그런 의미로 누군가를 동행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먼저 나를 동행해주도록 자신을 내맡기고 청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마디 자체로 ‘동행’이나 ‘동반’은 누군가와 함께 어떤 목적지에 같은 지향으로 가 닿는 과정을 뜻한다. 곧 이는 ‘내적인 관계’가 미리 내포된 개념이다. 누군가의 옆에서 함께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장애들을 피하면서 같은 길을 가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누군가가 앞서서도 안 되고 누군가가 뒤따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함께 가는 길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들만의 고유한 길이다.
‘동행’이라 할 때는 일반적으로 어깨동무를 하고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앞으로 전진하는 것과 같은 직선적인 개념이 연상된다. 그러나 인생이 꼭 그렇게 앞으로나 뒤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볼 때 전후좌우前後左右 종횡무진縱橫無盡을 연상할 수 있는 ‘춤추는 동행’이라는 개념이 훨씬 더 역동적인 개념이랄 수 있다. 굳이 저 끝에 있어 가 닿아야 하는 어떤 목표점을 상정하지 않고도 누군가와 함께 흥에 겨워 춤을 추듯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한 판을 어우러지는 것 자체가 목표점이요 도달점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춤추는 동행’은 훨씬 풍요로운 개념이고 역동적인 개념이다. ‘춤추는 동행’은 같이 춤을 추는 사람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그의 호흡을 느끼고 적당한 공간을 확보한 상태에서 서로의 발자취를 존중할 때만 우아하고 아름다운 춤이 된다.(2016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