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둔하고 지친 말을 나아가게 하려면 채찍질이 필요하다
「칠극」 제7권은 ‘책태’(策怠)이다. 게으름 또는 나태함을 근면으로 채찍질하라는 처방을 담고 있다. 앞의 죄악들과 달리 게으름은 그 결과가 남보다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비중을 낮추어 칠죄종의 맨 마지막에 위치시킨 듯하다.
게으름은 둔한 말이 지치기까지 해서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와 같다. 최창은 「소서」(小序)에서 그림자만 채찍질해도 단숨에 천 리를 내딛는 훌륭한 말이 있다면 채찍질이 필요 없겠지만, 절룩이거나 피곤하여 지친 말이라면 엉뚱한 길로 가거나 사람과 물건을 다치게 할 수 있으므로 채찍질로 끊임없이 경각심을 주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런 정도로 칠죄종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했던지, 판토하는 게으름을 단순한 나태만 아니라, 저하고 싶은 대로 행하면서 할 수 없다고 핑계 대기, 음탕한 욕심, 게걸스레 먹기, 도둑질, 질투, 희롱하는 말, 함부로 비웃기, 못된 음모, 헐뜯고 비방하기 등의 행동 모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했다.
또 제7권 설명에 드러나는 주요한 특징은, 앞선 제6권까지와 달리 성경 인용 빈도를 급격히 늘려 직접적으로 천주의 가르침으로 설파한 점이다. 신앙서의 성격을 가급적 드러내지 않으려고 성경 인용을 자제해 온 태도를 바꿔, 성경에 바탕을 둔 하느님의 가르침을 반복적으로 강조해서 신앙인이 가져야 할 바른 태도를 제시했다. 지금까지의 가르침을 모두 신앙 행위의 지향 가치로 귀결시켜, 이 책이 단순한 수신서가 아닌 신앙 서적임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7권은 전체 책을 마무리하는 일종의 전략적 배치에 해당한다.
이 게으른 자들아 보물같은 시간을 낭비하느냐
제7권은 성경을 인용하고 이를 풀이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예를 들면 이렇다. “게으른 자들아! 너희의 잠은 언제 그치며, 누운 것은 언제 일 나려느냐? 잠깐 눕고 잠깐 자는 사이에 가난은 문득 우체부처럼 닥치고, 궁핍은 마치 무기를 갖춘 군사처럼 너에게 미칠 것이다”(「칠극」, 538쪽).
이는 잠언 6,9-11 중국 독자에게 맞춰 상당히 윤색한 형태다. 책에 적힌 성경 구절을 원래의 구절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당시 선교사들이 성경을 현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쓴 전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속된 일에는 부지런하고 민첩하면서 천주의 일에는 한없이 게으르다. 명예와 이익을 얻는 일과 편안함과 즐거움을 얻는 일에는 더없이 열심이면서 천주를 섬기는 일에는 작은 수고도 마다하고, 다른 일이 생기면 그 일부터 처리한다. “산 사람의 지극한 보배로 시간만큼 귀한 것이 없다. 사물은 모두 나의 물건이 될 수 없지만, 시간만은 실로 나의 물건이 된다. 게으름은 능히 나의 시간을 빼앗아가니, 어찌 작은 일이나 가벼운 해로움이라고 하겠는가?”
그러고는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에페 5,16)를 증명으로 덧댄다. 사람들은 의롭지도 않고 마음의 덕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 일에 시간을 헛되이 써 버리니, 이는 마귀에게 자신의 시간을 주어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판토하는 다시 “시간은 한번 지나면 돌이킬 수가 없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은 구할 수가 없어, 오직 눈앞의 이 짧은 순간을 얻을 뿐이니 너무 적지 않은가? 하물며 물건 중에 시간처럼 빨리 지나고 금방 가버리는 것은 없다. 이미 지나간 일백 년은 한 시간과 맞먹는다. 장차 올 시간이 앞에 있을 때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장 길지만, 지나가 버려 뒤에 있으면 반드시 너무 짧았다고 생각할 것이다.”라는 풀이를 덧붙였다.
옛 현인 중 하나는 매번 정해진 시간에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바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천주께서 내게 살날을 정해 주셨는데, 이제 다시 한 시간이 지나 버렸다.”
있지도 않은 적을 만들어 해를 입는다
게으른 자들은 길을 가도 끝까지 가지 않는다. 씨를 뿌리기만 하고 거둘 줄 모른다. 싸우더라도 굳이 이기려 들지 않고, 애를 써 놓고는 완성할 뜻이 없다. 그 반대의 행동도 한다. 포승줄 없이 묶으려 들고, 걸쇠도 없는데 빗장을 건다. 평탄한 길을 가시밭길로 여기고, 헛된 두려움으로 스스로 움츠러든다. 쫓기지 않는데 달아나, 있지도 않은 적에게 해를 입고 만다.
한가함은 게으름과 나태의 짝이고 모든 악의 어미이며, 삿된 마귀와 더러운 욕망의 표적이 된다고도 했다. 이 때문에 예로니모 성인은 충고한다. “삿된 마귀가 왔을 때 항상 네가 일하는 것과 만나게 하여라.” 속담에서는 “사람이 하는 일이 없으면 나쁜 짓 하는 것을 배운다. 그래서 한가한 사람은 악한 사람과 한가지다.”라고 경고했다. 게으름의 폐해가 일을 그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나태에서 악행으로 발전하는 경로를 탐을 말한 것이다.
왜 그런가? “병도 오래 끌면 고치기가 어렵고, 악도 오래되면 쫓아내기가 어렵다. 죄에 빠진 것이 깊을수록 천주의 도우심은 더욱 끊어진다. 선을 행함이 더딜수록 의심과 장애는 점점 많아진다. 죄악이 마음에 흘러들면 상 해치는 것이 있게 된다. 마음의 힘은 나날 지고, 마음의 밝음은 날로 어둡게 된다. 즉시 행할 수 있는 일인데도 한가할 때를 기다리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다는 명백한 증좌이다.”
젊어서는 에돌아 삐뚠 길을 가다가다 늙은 뒤 선을 생각하고, 세상에서 쓸모없어지고서야 덕을 따르려 한다면, 맑고 아름다운 것을 가지고 세상을 받들고 마귀를 섬기다가 그 남은 찌꺼기를 가지고 천주를 섬기는 격이 되고 만다. 이를 경계하여 “한 번 가는데 일천 리, 한 번 돌아오는데 일천 리이다.”라는 속담을 인용했다.
또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덕을 짓고 자기를 이기는 것에…보응의 대가가 없다고 잘못 말한다. 이 때문에 게으름과 거친 것에 빠져서, 덕을 짓고 자기를 이기는 괴로움과 수고로움을 참아 받는 것을 미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본다.”
고생해 봤자 아무 보람도 없다는 말로 구실을 대어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하려는 어리석음을 나무란 말이다. 그러고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는 말씀을 끌어왔다.
돼지만 꽥꽥대는 이유
누군가 물었다. “말과 소와 양 같은 경우는 끌고 가면 따라가지만, 돼지만은 그렇지 않고 더구나 크게 슬픈 소리를 질러 대는 것은 어째서인가?”
판토하의 대답은 이렇다. “말은 장차 나를 타려는구나 하고, 소는 나를 밭 갈게 하려는구나 하며, 양은 내 털을 깎으려는 모양이군 한다. 모두 쓰이는 바가 있기 때문에 해를 입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유독 돼지만은 종일 배불리 먹고 편안히 놀기만 해서, 탈 수도 없고, 밭 갈게 할 수도 없으며, 입을 만한 털도 없는데 끌고 가니, 장차 나를 죽이려는구나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몹시 슬퍼하며, 붙잡기만 하면 성을 내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돼지가 제 게으름을 자책하고 죽어서 고기를 내어줄 때만 쓸모 있는 자신의 끝을 알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세네카는 제자에게 세상 변고에 대한 헛된 두려움을 버릴 것을 권하며 다시 이렇게 보탠다. “우리는 가까운 일에 대해서는 대비할 줄 모르고 오직 먼 일에 대해서만 망령되이 염려한다. 일이 생기기 전에 하는 염려는 천주께서 사람에게 주신 큰 은혜건만, 사람들은 스스로 바꿔서 큰 해가 되게 만든다. 새나 짐승은 위험이 닥치기 전에 피할 줄 알고, 그것도 피해서 도움이 될 때 피한다. 우리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에 함께 얽매여 있다. 염려가 지나친 나머지 자주 복을 가지고 해로움을 불러들인다.”
당장 눈앞의 일을 놓아두고 먼 일만 걱정하는 것도 게으름의 영역이다. 제7권의 게으름을 단순히 빈둥거리는 상태만을 뜻하는 소극적 개념으로 쓰지 않고, 모든 악의 출발점으로 파악한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정민, 경향잡지, 2023년 9월호, 제115권, 통권 18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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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태策怠
『…<도덕경>에서는 “천릿길도 발아래에서 시작한다.”(도덕경道德經 64장)고 했다. 가만 앉아 있는데 저절로 오는 것은 없다. 정말 그림자만 채찍질해도 단숨에 천 리를 가는 좋은 말이 있을까? 그렇다면 번거롭게 채찍질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절룩이는 말이거나 피곤해 지친 말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짐을 진 채 올라타거나 훔쳐서 모는 경우라면 어떨까? 물풀을 따라가고 벼를 밟거나 사람과 물건을 다치게 한다면 어찌하나?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는 즉각 채찍을 잡아 시간에 맞춰 아프게 채찍질을 하더라도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語曰: “千里之行, 始於足下.” 未有坐而至焉者, 果有良馬鞭影, 一息千里者乎? 卽不煩策可矣. 如其蹇乎, 疲乎? 負乘而竊御乎? 逐水草蹈禾稼而傷人物乎? 似此類者, 卽操箠而時刻痛策之, 咄咄何傷哉?(책태소서策怠小序, 강동江東 최창찬崔淐撰)』
『나태라는 악은 무엇과 비슷하던가? 怠惡知何似
노둔한 말 주인 은혜 등짐과 같네. 駑駘負主恩
몸 있어도 길러줌을 편안히 여겨 有驅安豢養
고마워 높이 오름 바랄 뜻 없네. 無志望賽騰
(어산漁山 오력吳歷, * 1632~1718년, 마카오의 중국인 신부, <칠극시> 중에서, 명明나라-1368~1644년- 말 청나라 초의 4왕[왕감⋅왕시민⋅왕원기⋅왕휘]⋅운격 등과 함께 오파吳派-중국 명나라의 회화 유파. 북종화계의 절파에 대하여, 남종화계 화가를 말한다-의 정통을 이은 ‘사왕오운四王吳惲’의 한 사람으로 ‘청초 6대가淸初六大家’로 불리었다.)』
7.1 게으름이란 무엇인가? 덕행을 싫어하고 근심하는 것이다. 여러 욕망을 멋대로 행하면서,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댄다. 선은 변함없는 굳셈이 없으니, 모름지기 틈만 나면 한가롭게 노닐며 잠을 많이 자는 것이 모두 그 갈래다. 음탕한 욕심, 게걸스레 먹는 것, 도둑질하는것, 질투하는 것, 희롱하는 말 함부로 막 웃기, 못된 음모, 헐뜯고 비방하기 등 여러 가지 마음이 모두 그 부류다. (怠者何? 德行之厭憂也. 恣諸欲, 自誘不能, 善無恒毅, 須暇閑遊多寐, 皆其支也. 淫慾, 饗餐, 盜竊, 妬嫉, 戱言, 浪笑, 惡謀, 訓非諸情, 皆其流矣.)
7.2 …“날이 이미 밝았는데, 너는 아직도 잠자리에 있구나. 해로 하여금 말을 할 수 있게 한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제는 내가 너보다 힘들고 피로했다. 이제 나는 일하는데 너는 쉰단 말이냐, 부끄럽지도 않은가?’”(성 아오스딩) (…“日已興, 爾尙寢寐. 使日能言, 必曰: ‘昨者我勞疲於爾也. 今我作, 爾息耶, 不愧歟?’”-聖 亞吾斯丁)
7.3 …사물은 진실로 느닷없이 지극함에 이르는 경우란 없다. 무릇 천주께서는 큰일이나 훌륭한 공적을 갑작스레 이루려 하시지 않고, 반드시 어려움을 잇따르게 하신다. 일을 이루는 것이 어려울수록 사람들은 이를 더욱 소중하게 보고, 이를 더욱 조심해서 지킨다. 서둘러 이룬 것은 좋지 않고, 좋은 것은 반드시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클수록 더 오래 새끼를 품고, 성장도 더욱 더디다. 큰일을 이루는 사람은 작다고 해서 우습게 여기지 않고, 편안함을 이루는 사람은 위험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 (…夫物固未有忽然底極者. 凡大事嘉績, 天主不欲忽成之, 必繼之艱難. 事成彌艱, 人視之彌重, 守之彌謹矣. 亟成者弗良, 良者必弗成也. 獸逾大, 孕逾久, 成長逾遲. 致大者, 蔑弗小, 致安者, 蔑弗危.)
…게으른 사람이라 하여 어찌 큰 공적을 세우고 큰 아름다움을 이루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그 욕심은 똑같지만 이를 하려고는 하지 않으면서, 장차 가지 않고 도달하고, 싸우지 않고 이기며, 씻지 않은 채 깨끗해지고, 만들지 않고 이루며, 구하지 않은 채 얻으려고만 드니 어찌 능히 성취하겠는가? 덕을 행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적과 원수를 만나고, 박해와 시련을 만난다.… (…怠者, 豈不願竪丕績, 成大美? 第并其欲, 且不欲之, 將不行而至, 不鬪而勝, 不滌而浄, 不造而成, 不求而得, 豈能就哉? 欲行德者, 必遇敵讐, 必遭窘難.…)
7.5 …개미의 무리가 서로를 도움은 어짊과 사랑을 실천으로 행하여 빈말이 아님을 보여준다. 쉴 새 없이 왕래하는 것은 언제나 강인해 작업을 쉬지 않음을 보여준다. (…群蟻相助, 示其實行仁愛, 非虛言也. 往來不絶, 示其恒毅, 作業不息也.…)
곡식의 싹을 뜯어먹어 싹이 터서 썩지 않게 하는 것은 미리 위험의 기미를 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도 자신을 극복하고 사욕을 없애 덩굴 뻗어나가지 않게 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흐린 날에는 곡식을 감춰두니, 이로움이 없을 때는 덕과 아름다움을 거둬 간직해서 잃어버리거나 무너지는 것을 피해야 함을 보여준다. 갠 날에 볕을 쬐어주는 것은, 유익할 때는 그 선한 덕을 밝게 드러내서, 이를 통해 뭇사람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천주를 찬양하고 섬기게 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몸소 짐을 지고 길 위에 있는 것은, 그들이 사랑하고 근심하여 힘들어 지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함께 거두고 함께 쓰는 것은, 그들이 공적으로 공유해서 탐욕스럽지도 인색하지도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미의 행실은 이처럼 온전하고 아름답다.… (囓穀之芽, 俾不萌生朽壞, 示能豫絶險機. 訓人克己去私, 無滋蔓也. 陰時匿穀, 示無益之時, 斂藏德美, 以避失墮也. 晴時矖曝, 示有益時, 顯明其善德, 用以觀化衆人, 令讚事天主也. 身負道在, 示其慈愍, 不辭勞罷也. 共收共用, 示其公共, 不食不吝也. 蟻行若此全美矣.…)
우리는 쓸 만한 본성의 영혼이 있고, 기댈 만한 천주의 묵묵한 인도가 있다. 듣고 따를 만한 앞선 성현의 가르침과 실천이 있고, 두려워할 만한 지옥의 영원한 재앙이 있으며, 바랄 만한 천당의 영원한 보답이 있다. 하지만 무너지듯 스로를 폐하고서, 그저 앉아 지금 세상에서 덕을 쌓고 공을 세울 기회를 놓치고는, 장차 올 근심은 생각지도 않는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잠깐의 아무것도 아닌 수고로 죽은 뒤의 영원한 고통을 면하려 하지 않으니, 너무 어리석지 않은가! (我儕有本性之靈可用, 有天主之默牖可據, 有先聖賢訓箴實行可聽從, 有地獄之永殃可畏, 有天堂之永報可望. 而頹然自廢, 坐失今世積德立功之機, 不思將來之患, 不欲當目下暫時之微勞, 以免身後永世之苦, 不甚愚哉!)
7.6 …바다를 건너가는 배는 아홉은 가라앉고 하나만 뜨는데도, 저 아홉이라는 것이 두려워 가로막을 만한 것이 못 되고, 이 하나라는 것은 돌아보아 유혹하여 움직이게 하기에 충분하다. 큰 수고로움을 가지고 작은 즐거움을 이루고, 작은 즐거움을 가지고 또 자주 영원한 고통을 불러들인다. 오랫동안 온 힘을 다 쏟아서 재물을 모아 얻고는 갑자기 죽어버리니, 마침내 잠시도 이를 누리지 못한다. (…度海之舟, 九沈一浮, 彼九者不足懼沮之, 此一者顧足誘動之. 以大勞致微樂, 以微樂又屢致永年之苦. 殫竭既久, 得聚財. 忽死, 遂不獲蹔享之.)
우리는 작은 수고로 영원한 즐거움을 이룰 수 있다. 하나를 써서 만을 얻고, 힘은 조금 드는데 공은 크며, 잠깐의 수고로 영원히 누리는데도 오히려 여기에 힘쓰는 데 게으르다. 저 장사꾼은 죽음에 나아가면서도 부지런하고 또 즐겁건만, 나는 목숨에 나아가는데도 게으르고 싫증을 낸다. 저들은 손해에 부지런하고 나는 이익에 게으르니, 너무 부끄럽지 않은가! (我儕以微勞, 能致永年之樂, 費一而得萬, 力微功鉅, 勞暫亨永, 尙懶營之. 彼就死而勤且樂, 我就命而怠且厭. 彼勤於損, 我怠於益, 不甚羞歟!)
7.10 (시간) 산 사람의 지극한 보배로 시간만큼 귀한 것이 없다. 사물은 모두 나의 물건이 될 수 없지만, 시간만은 실로 나의 물건이 된다. 게으름은 능히 나의 시간을 빼앗아가니, 어찌 작은 일이나 가벼운 해로움이라고 하겠는가? 성경에 말했다. “내 아들아, 너의 시간을 잔혹한 원수에게 주지 마라.”(참조. “이 시대는 악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에페 5,16) 시간을 헛되이 써버리는 사람이, 의롭지도 않고 마음의 덕에 보탬도 되지 않는 일에다 시간을 쓰니 그 시간을 모두 사람의 원수인 사악한 마귀에게 줘버린다는 말이다. 시간이 무거운 보배가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물건이 드물어 귀하기 때문이다.… (生人至寶, 無貴于時. 凡物皆不可爲我物, 獨時實爲我物也. 怠能奪我時, 豈細故淺害哉? 經云:“我子爾時勿付之酷仇.” 謂空費其時者, 用之非義無益心德之事, 皆以其時, 付予人仇之邪魔也. 夫時爲重寶者, 何故? 物少爲貴.…)
…재물에 인색한 것은 소인의 잘못이고, 시간에 인색한 것은 군자의 덕이다. (…嗇財小人之罪, 嗇時君子之德也.)
7.12 …게으른 사람은 지금 세상과 뒷세상의 목숨을 함께 잃고 만다. (…怠人者, 今世與後世之命并失焉.)
7.13 …게으른 사람은…포승줄 없이 묶으려 들고, 걸쇠도 없는데 빗장을 건다.… (…怠者,…無縄而拘之, 無鐍而扄之.…)
7.14 게으른 사람의 마음은 몹시 나뉘어 있다. 그래서 그 바람과 생각과 사업은 항구하게 한결같을 수가 없다. 마음을 다스리는 데 조금 힘들다 생각되면 이를 버려,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놀며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비유하자면, 바다 위 배에서 뱃사공이 잠들어 키를 잃어버리는 통에 바람에 따라 움직여가서 한시도 편안할 수 없는 것과 같다. (夫怠者之心, 甚分, 故其願慮事業, 不能恒久如一也. 覺御心有微勞, 則遺之, 隨欲肆游無顧焉․ 譬如海舟, 舟師寐而失舵, 隨風行動, 無刻可同.)
…“뜻 같은 일이든 뜻 같지 않은 일이든, 모두 불평스러운 마음으로 하게 되면 마음을 경박하게 하는 깃발일 뿐이다.”(세네카) (…“凡如意不如意事, 皆以不平心遇之, 則輕心之旗耳.”-色搦加)
종일 한 가지 일만 하고 평생 한 가지 방면에만 힘쓰는 사람은 참으로 지혜롭다. 특별히 한 가지에 힘쓰면서 멈추는 자는 더욱 아름답다. 큰 지혜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를 능히 하겠는가? (終日一額, 生平一面者, 正智也. 特務一而止者, 甚美矣. 非大智, 疇能之?)
…안정된 자는 옮겨가지 않고, 금방 쌓았다가 금세 허무는 자는 갑자기 네모진 것을 고쳐 둥글게 만들고 둥근 것을 고쳐 네모나게 만든다. 게으름과 나태가 선에 대해서는 야물지 못하다는 분명한 증거다.… (…安者不移, 倏積倏毁者, 倏改方爲圓, 改圓爲方者, 明徵怠惰不固於善也.…)
…날마다 방향을 바꾸는 것은 바로 삿된 마귀의 계략이니 마음의 항상됨과 굳셈, 덕행의 유익함을 빼앗아 갈 뿐이다. 군자는 선택에 신중해야 하고, 선택해서 얻었거든 붙잡기에 힘써서 이를 굳세고 항상되게 지켜야 한다. 부지런히 수양하는 선비라면 어찌 다만 하 가지 일에 마음을 정하고 또한 마땅히 한 곳에 몸을 고정시키지 않겠는가? 몸을 한 곳에 고정하지 못한다면, 마음을 한 가지 생각과 한가지 바람에 고정시키기가 어려울 것이다. (…日易方, 正邪魔之計, 奪心之恒毅, 及德行之益耳. 君子愼擇, 擇而得, 務据固恒守之. 勤修之士, 豈惟定心於一業, 亦宜定身於一所也? 身不定於一所, 心難定於一念一願矣.)
게으른 사람은 기운을 떨쳐서 자신을 극복해 마음의 안정을 이룰 수가 없다. 그래서 처지를 바꿔 마음의 안정을 구하는 것은, 바로 몸에 병이 난 사람이 장소를 바꿔가며 낫기를 구하려다 병만 더 도지는 것과 같을 뿐이다. 너희가 편안함을 구한다면 마음을 바꿔야지, 어째서 장소를 바꾸려 드는가? 여러 장소를 직접 끌고 다녀도 바꿀 장소가 끝내 있으니,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怠者, 不能奮然克己, 以致心安. 而易處求心安, 正猶身疾者, 易處而求愈, 祗益疾耳. 爾求安, 在易心, 豈在易所? 諸所自携, 易所終在, 何益哉?)
…사는 곳에서 마음이 편안함에 대해 감사하지 않는다면, 어찌 능히 너희의 즐거움을 이룰 수 있겠는가? 방향대로 가서 마음의 책임을 없애려 해도, 마음의 책임은 쉽게 흔들리고 더욱 무거워진다. 비유하자면, 배 가운데 둔 물건이 고정되어 있으면 문제가 되더라도 약간 기울고 말지만, 일정함이 없는 것은 쌓인 채로 굴러다니다가 물에 가라앉게 되는 것과 같다.… (…非謝心所居而安焉, 豈能致爾樂邪? 行方以消心任, 而心任以摇易更重也, 臂舟中物定在者, 爲累微傾倚, 無常者, 展轉積聚, 使垂沈焉.…)
7.15 이미 있을 곳을 정했거든, 마땅히 또 혼자 살아가는 것을 차분히 익혀야 한다.… (既定身所, 又宜謐肄獨居.…)
7.17 한가함은 게으름과 나태의 가까운 짝이고 모든 악의 어미여서 삿된 마귀와 삿된 유혹, 더러운 욕망의 표적이다. 새는 날면서 살아가고 사람은 일하면서 살아간다. 조물주가 새에게 두 날개를 달아주고 사람에게 두 손을 붙여준 것은 똑같다. 주살 쏘는 사람이 나는 새를 어찌 바라겠는가? 깃들어야만 활을 당겨 이를 쏜다. 물이 끓으면 파리는 떠나가고, 따뜻하거나 차면 달려든다. 흐르는 물에는 좋은 고기가 살고, 고인 물에는 개구리와 뱀이 산다. 집이 넓으면 더러워지기 쉽고, 술잔에 좋은 술이 채워지면 나쁜 것이 능히 들어오지 못한다. 만물은 다 그렇다. (夫閑暇, 怠惰之密侶, 諸惡之母也. 邪魔邪感穢欲之鵠也. 鳥生以飛, 人生以勞. 造物之主, 烏傅之兩翼, 人傳之兩手, 一也. 飛鳥, 弋人何慕焉? 棲乃援弓射之矣. 水沸, 蠅去之, 温且寒, 則就之. 流水生嘉魚, 遼水生蛙蛇. 室曠易汚, 罇充於美液, 惡者莫能入之. 萬物盡然.)
…사람이 하는 일이 없으면 나쁜 짓 하는 것을 배운다. 그래서 한가한 사람은 악한 사람과 한가지다.… (…人無所造, 則學造惡. 故閑人人惡人一也.…)
7.18 게으른 자는 한가한 것을 좋아하면서도 한가로움을 못 견뎌 한다. 그래서 한가로워 즐겁고, 다시 한가로워서 근심스럽다. 즐거워하고 또 근심하다가가는 마침내 온갖 욕망에 휩쓸리고 만다.…“게으른 자는 손으로 작업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종일 욕망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눈은 헛일을 살피려 들고, 입은 먹고 마시는 것을 욕심낸다. 혀는 많은 말을 좋아하고, 귀는 헐뜯고 비방할 대상을 찾고, 몸은 음탕한 욕망을 사랑한다.”(참조. 잠언 21,25-26) (怠者好閑, 又不耐閑, 故以閑爲樂, 復以閑爲憂. 既樂且憂, 遂蕩於萬欲.…“怠者手不欲作業, 故終日戀欲. 目欲視虛事, 口饕食飮, 舌好多言, 耳貪讒誹, 體戀淫慾矣.”)
7.20 사람이 직업을 선택할 때 모름지기 살펴야 할 것이 세 가지.…① 선(善)…② 유익함(有益)…③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不奪心)…
…“홀로 있을 때 한가한 사람은 능히 천주를 알 수가 있다.”(성 아우구스티노) 게으르다는 의미의 한가함이 아니라 고요하다는 의미의 한가함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의 힘을 쪼갤수록 더 작아지고 더 전일함이 없게 됨을 안다. 그래서 언제나 바깥일을 줄여서라도 안의 일을 더 하려고 꾀한다. (…“獨暇者, 能識天主.”-聖 亞吾斯. 非懈怠之暇也, 靜謐之暇也. 智者知心力愈析愈微愈無專, 故恒圖減外業, 以增內業.)
…“나는 혼자 있을 때 가장 고독하지 않다.”(성 베르나르도) 무슨 말인가? 혼자 지내면 바깥일이 없어서 착한 생각과 도에 대한 바람이 더욱 가까워지고 더욱 순수해진다. 내 마음이 항상 천주와 함께 있으니, 어찌 고독하겠는가? (…“我獨居時, 乃最不獨.”(聖 百爾納) 何也? 獨居則寂於外務, 善慮道願, 益密益純. 我心恒偕天主, 距獨乎?)
7.21 삿된 유혹은 ① 갑자기 찾아와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이때 대적하면 없애기가 몹시 쉽고 공덕도 더욱 늘어난다. 그다음은 ② 조금 마음을 기울여 즐기기는 해도 따르지는 않는 것이다. 이때는 큰 죄가 되지는 않지만, 과실이 됨을 면치 못한다. 그다음은 ③ 기뻐하며 따르는 것이니, 큰 죄가 된다. (夫邪感焠至, 扣我心門. 此時敵之, 其去甚易, 更增功德. 次則稍向樂之, 未從也. 此時未成大罪, 不免爲過失矣. 次則喜而從之, 乃成大罪焉.)
부지런한 사람은 마음 지키는 것을 몹시 급하게 여겨서 삿된 유혹이 문에 이르면 문득 문을 닫아걸어 맞아들이지 않고, 이것에 힘껏 대적한다. 삿된 욕망은 불똥과 같아서, 우연히 한차례 일어났을 때 바로 완전히 꺼서 불이 치솟게 하지 않아야 한다. 이 때문에 나의 이 마음이 도리어 삿된 생각과 삿된 욕망에서 깨끗해진다. 게으른 사람은 마음의 문을 지키지 않아서, 문이 항상 열려 있다. 삿된 유혹이 한차례 문득 들어오면 그 위험을 깨달아 그제야 대적하지만 너무 늦었다. 수고로움은 배나 되지만 이기고 지는 것은 기필하지 못한다.… (勤者甚急於守心, 邪感至門, 輙閉不待, 輙力敵之. 邪欲如標, 偶爾一發, 輙撲滅之, 不及于熾. 故我此心, 反浄於邪慮邪欲也. 怠者不守心門, 心門恒闢. 邪感一至輒入, 覺其險, 乃始敵之, 甚遲矣. 勞苦既倍, 勝負莫必.…)
7.23 …‘내일’이라는 한 마디는 바로 귀신과 마귀의 말이다. 너희가 악을 아직 고치지 않았고 선을 미처 행하지 않았다면, 그 즉시 일을 시작해야 성공하기가 매우 쉽고, 훗날을 기다리면 더 어렵게 된다. 왜 그런가? 한가지 죄의 무거움이 반드시 다른 죄에 마음을 기울이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 할 수 없는데, 내일 어찌 잘하겠는가? (…明日一言, 正鬼魔之言也. 爾有惡未改, 有善未行, 立時肇業, 成功甚易, 須後更難也. 何者? 一罪之重, 必垂心於他罪, 今日不能, 明日安能?)
…마음의 힘은 나날이 쇠약해지고, 마음의 밝음은 날로 어두워진다. 마음의 욕심은 날로 방자해지고, 마음의 기억은 나날이 둔해질 것이다.… (…心力日衰, 心明日昧, 心欲日恣, 心記日鈍.…)
7.26 …살아서 죄악을 심어놓고 죽을 때 고요함과 위로를 거두기란 지극히 어렵다. 살아서 세속의 즐거움을 멋대로 누리고서 죽은 뒤에 안락을 거두는 이치란 절대 없다. 살아서 천주를 잊었으니 죽을 때 천주께서도 문득 나를 잊으실 것이고, 살았을 때 천주를 소홀히 대했으니 죽을 때 천주께서도 반드시 소홀히 여기실 것이다.… (…生種罪惡, 死時收靜慰, 至難矣. 生恣世樂, 死後收安樂, 必無之理也. 生忘天主, 死天主便忘己. 生時簡忽天主, 死時天主必簡忽之.…)
7.28 지금 세상 사람들은 세속 일에는 몹시 부지런하지만, 선한 덕에는 매우 게으르다. 그 까닭은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① 마음에 공경하여 따를 만한 주인이 없어서고, 하나는 ② 실천할 만한 도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는 ③ 두려워할 만한 벌과 마땅한 상이 없어서다. (今世人甚動於俗事, 甚怠於善德, 其故有三, 一則心無主可敬從, 一無道可履蹈, 一無罰可畏, 無賞可望也.…)
…사람의 마음에 주인이 없다면, 하늘에 축이 없고 배에 키가 없는 것과 같아서, 나아가고 물러남에 법도가 없고 행동이 뒤죽박죽 어지러워 기분이 없어진다. 그래서 참된 주인을 알지 못하는 것은 바로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 (人心無主, 如天無樞, 舟無舵, 進退無道, 行動淆亂, 無準焉. 故不識眞主, 正爲諸惡之根原也.)
…물건에 진짜와 가짜가 있을 경우 뜻을 다해 진짜를 찾으면서, 도에는 더구나 삿되고 바름이 있는데 어째서 뜻을 다해 바름을 찾지 않는단 말인가?… (…物有眞贋, 盡意求眞, 道更有邪正, 何不盡意求正焉?…)
7.31 …천당은 바로 뭇사람의 본향이고 영원한 생명의 장소요, 천사와 성현의 지경이 된다. 사람이 이곳에 올라가면 능히 천주의 본체를 뵐 수 있고, 선에 고정되어 해를 받지 않을 수 있다. 무릇 사람이 마음으로 소원하는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이곳에서 얻는다.… (…天堂正爲衆人之本鄕, 永命之所, 天神及聖賢之境界. 人昇之, 能見天主之本體, 定於善, 不能受害. 凡人心所願美好, 悉得於此所.…)
7.37 …정신이라는 것은 한 몸의 으뜸가는 주인이다. 그 작용에는 명오明悟와 애욕愛欲이 있으니, 이 두 가지 능력이 실로 정신의 손과 발이 된다. 명오란 사물의 이치를 살피고 일의 타당성을 판단하며 선악의 단서를 구별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나아가고 피할 바를 알아 즐겁고 기쁘게 본받아 움직여서 참다운 이치를 구하게끔 하는 것이다.… (…夫靈神者, 一身之宗主. 其作用則有明悟愛欲, 此二能者, 實爲神靈之手足也. 明悟者, 審物理, 辨事宜, 別善惡之端, 使人知所趨避, 欣樂效動, 以求實理.…)
애욕이란 사랑하고 미워하고 바라고 소망하며 기뻐하고 노하는 것이다. 이미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다면 조용히 즐기면서 이를 누리니, 산이 우뚝 솟아서 다시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정신의 손이라고 일컫는데, 단단히 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애욕이라는 것은 본래 아름답고 순조로움을 향하게 마련이다. 이미 이를 얻고 나면 마침내 편안한 즐거움이 생겨나니, 얻은 것이 클수록 즐거움 또한 깊어진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작용은 언제나 명오의 뒤에 있다. 명오가 아름답고 순조롭다고 여긴 것을 가지고, 애욕은 마침내 마음에 두고 좋아하여 이를 얻으려고 한다. 만약 더럽거나 비루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바로 더 미워하고 싫어해서 이를 빨리 피하려 들 것이다. 이 두 가지 능력이 만족되고 두 가지 바람이 채워진 상태에서, 여기에 더해 끝없이 이어지게 한다면, 정신이 얻으려는 것을 온전히 얻게 되어 길한 복이 어찌 완전히 채워지지 않겠는가? (愛欲者, 愛惡冀望喜怒也. 既獲所欲獲, 則安靜慰樂享受之, 如山屹峙, 不復移易. 故稱神靈之手, 据固之謂也. 愛欲者本向于美好順便. 既獲之, 遂生慰樂, 所獲彌大, 樂亦彌深, 愛惡之用, 恒居明悟之後. 明悟者, 以爲美好順便, 愛欲者, 遂眷戀慕悅, 幾欲獲之. 如以爲穢惡鄙陋, 即增疾厭惡, 趨欲避之. 二能既滿, 二願既足, 加之綿亘不已, 則靈神所欲得者, 既全得矣, 吉福豈不完滿乎?)
7.39 …만약 (부활한) 영혼이 천주의 끝없는 능력과 성품을 직접 보아 모두 깨닫게 된다면, 다시는 의심하거나 가로막힘이 없을 것이다. 선이 크게 정해지면 다시 바뀜 없이 고요한 하늘에서 살게 된다. (…若靈心親見天主無窮能性, 悉得洞曉, 無復疑碍. 大定於善, 無復更易, 寓於靜天.)
고요한 하늘의 경계는 높고 가파르고 성대하고 화려해서, 진실로 세상 임금의 보배와 노리개, 멋진 궁궐과 누대로는 만에 하나도 비슷하다 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천사와 만세의 성현이 서로 벗이 되고 서로 형제가 되어, 서로를 돌보고 서로 사랑함이 마치 한 몸과 같아, 옳고 그름을 함께하고 사랑과 미움을 공유한다. 사람이 바라는 바는 오직 천주께서 원하시는 바여서, 분수 밖의 바람은 스스로 다시 용납하지 않고 스스로 다시 일으키지도 않는다. 크고 작은 바람을 이루지 못할 것이 없고, 하고자 하는 것이 있을 경우 천주의 전능하심에 힘입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이는 그 부가 편안하기에 충분함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천당에 사는 사람은 모두 천주께서 몹시 사랑하는 아들이요 천사가 사모하는 벗이니, 존귀하고 영예롭기가 또 누가 더 크겠는가? (靜天之境, 高峻盛麗, 固非世主珍寶玩好, 瓊宮瑤臺, 所可仿佛其萬一. 與天 神及萬世之聖神, 相爲伴侶, 相爲昆弟, 相視相愛, 如一身心, 共是共非, 共愛共惡. 人所願, 惟天主所願, 分外之願, 自不復容, 自不復起. 凡巨細願, 無或不遂, 有所欲爲, 賴天主之全能, 無不能爲. 此其富足安逸, 尙矣. 居天堂者, 皆是天主鍾愛之子, 天神契慕之交, 尊與榮, 又孰大焉?)
7.40 어떤 이가 말했다. “사람은 육신이 죽어서 관에 들어가고 무덤에 들어가면 썩어버려 알지 못할 텐데, 어찌 능히 또 이 같은 복을 받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피와 살로 된 몸뚱이는 이제 비록 금방 썩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나, 또한 다시 살아날 날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래의 영혼과 더불어 함께 천당에 올라가서 즐거움과 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천주께서 친히 말씀하셨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고, 마땅히 급히 참되게 믿어야만 합니다. 이론으로 논한다고 하더라도 또한 확실한 이치와 근거가 있습니다.” (曰: “凡人形軀既死, 入棺入墓, 腐朽無知, 安能又受若此之福耶?” 曰: “血肉之軀, 今雖速朽, 歸復於土, 亦有日復生, 而與本神靈俱升於天堂, 受慶福也. 此則天主親言, 不必他論, 遽當實信. 即以理論之, 亦有確然義據.”)
…온갖 종류의 선행과 갖은 갈래의 악행은 정신과 육신이 함께 짓지 않음이 없으니, 상을 주어 칭찬하고 벌을 주어 깎는 것을 마땅히 함께 받게 됩니다. 그래서 육신은 반드시 때가 되면 다시 태어나 정신과 더불어 결합해서 온전한 사람이 되고, 그런 뒤에 혹 밝은 하늘에 올라가 선을 행복과 영화를 입거나, 혹 지옥에 떨어져서 악을 행한 재앙과 꾸지람을 받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凡種種善行, 種種惡行, 莫非靈神肉身, 所共造作, 褒貶賞罰, 宜與受之. 故知肉身必有時復生, 而與靈神合爲全人, 然後惑升明天, 蒙爲善之福榮, 或墮地獄, 受行惡之殃咎也.…)
…불은 사람을 태워 재가 되게 할 수 있고, 흙은 사람을 삭혀 먼지가 되게 할 수 있지만, 어찌 조물주가 재와 먼지를 다시 원래의 몸이 되게끔 변화시킬 수 없겠는가? (…夫火能焚人, 使爲灰, 土能蝕人, 使爲塵, 豈造物者不能以灰塵復變爲原身耶?)
7.42 …천주께서 또 큰 능력과 큰 덕으로 윤색하여 꾸며주시니,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네 가지 있다. 하나는 ‘무손’ 즉 손상함이 없으니, 일체의 질병과 물과 불, 칼날과 톱 같은 사람을 해치는 물건들이 이를 상하게 할 수 없고, 여섯 가지 욕망과 일곱 가지 본능이 절대로 가까이 오지 못한다. 이 때문에 다시 죽을 수가 없다. 하나는 ‘영광’ 즉 빛이 밝음이니, 쏘는 빛의 밝게 빛남은 태양으로도 짝지을 수가 없다. (…天主又以大能大德潤餙之, 其最大者有四. 一曰無損, 謂一切病患, 水火刃鋸, 損人之物, 不能傷之, 六欲七情, 絶無所攖. 是故不能復死. 一曰明光, 所發光明照耀, 日不能儷.)
(부활한 육체) 하나는 ‘신속神速’ 즉 너무도 빠른 것이다. 육신이 다시 살아나도 지금의 무겁고 탁한 몸이 아니어서, 날개 없이도 날고 가지 않았는데 이른다. 영혼과 정신이 하고자 하는 바는 위와 아래, 멀고 가까운 것 할 것 없이 육신도 따라 이르러서 잠깐 기다리지 않는다. 하나는 ‘신투神透’ 즉 정신으로 통과하는 것이다. 어떤 단단한 사물도 모두 통과해서 도달할 수 있어, 걸리고 막히는 것이 없다. 산을 뚫고 바위에 들어가는 등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一曰神速, 肉身復生, 非若今時濁之體, 無翼而飛, 不行而至. 靈神所欲, 無論上下遐邇, 肉身隨至, 不待瞬息, 一曰神透, 一切堅實之物, 悉能透達, 無有滯礙, 穿山人石, 無之不可. 聖經所記, 大槩如此, 其他天主所惠聖神之能德恩施, 莫可數計.)
7.44 지옥과 천당 같은 것은 정반대다. 천당은 고요한 아홉 겹의 하늘 위에 놓여 있어서 가장 맑고도 환하다. 지옥은 땅속 가장 낮은 곳에 있어서 가장 더럽고 어둡다.… (若地獄與天堂, 正相反也. 天堂安於靜天九重天之上, 最爲清朗. 地獄置於地中最下之處, 最汚暗也.…)
지옥의 괴로움은 종류가 많아도, 총괄하면 두 가지로 돌아간다. 하나는 ① 느끼는 괴로움을 말하고, 하나는 ② 잃어버리는 괴로움을 말한다. 느끼는 괴로움이란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목마름, 더러운 냄새와 캄캄한 어둠, 근심과 번민 등 고통을 안겨줄 수 있는 일체의 형벌이니, 이런 종류의 괴로움은 지옥에 두루 갖춰져 있고 너무도 크다. 무릇 세간에서 말하는 괴로움이라는 것은 이 고통에 견주면 모두 고통이라 할 것이 못 된다. 이는 바로 그림으로 그린 물건과 진짜 물건의 차이와 같다. 이 때문에 천주께서 자주 사람들에게 잠깐이라도 지옥의 고통을 살펴보게 하여, 그 사람이 이후에 세상의 큰 괴로움을 만나더라도 몹시 기쁘게 이를 참아 견뎌 괴롭다고 말하지 않게 하시는 것이다. (地獄之苦, 及甚盛義怒刑罰, 亦用呈其無量之能, 即甚大甚備, 可想知已, 地獄之苦多種, 總歸於二, 一謂覺苦, 一謂失苦. 覺苦者, 寒火饑渴, 臭穢暗冥憂懣, 與凡一切能致痛楚之刑, 此類之苦, 地獄甚備甚大. 凡世間所謂苦者, 以是苦視之, 悉不爲苦, 正如畫物與眞物也. 是以天主屢使人暫視地獄之苦, 其人後遇世之大苦, 甚樂忍之, 不謂苦矣.)
7.45 잃어버리는 고통이란 천주와 천당의 여러 상서로움과 복을 잃어, 그것을 영원히 다시 얻지 못하는 슬픔과 근심을 말한다. 느끼는 괴로움과 잃어버리는 괴로움 두 가지가 모두 크지만, 잃어버리는 괴로움이 더욱 크다.… (失苦者, 則失天主及天堂諸慶福, 永不復得之悲憂也. 兩苦並大, 失苦更深.…)
7.46 …살아 있다는 것은 움직이면서 스스로 즐거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샘물의 근원이 끊이지 않아 밤낮 쉬지 않는 것을 활수活水라 합니다. 땅을 파서 물을 대면 다시 바뀌거나 옮겨가지 않으니 사수死水, 즉 죽은 물이라 합니다. 성령은 하늘나라에 있고, 무릇 하고자 하는 바를 하지 못함이 없으며, 크고 작은 욕심을 반드시 이루지 못함이 없습니다. 이처럼 한도 없이 세월을 헤아리지 않는 것을 일러 상생常生, 즉 언제나 살아 있다고 하지요. 만약 어질지 않은 사람이 지옥에 들어가면, 온갖 고통 가운데 속박되어 조금도 돌아 움직일 수가 없고, 스스로 고통을 지고서 간절하게 숨이 끊어지기만을 구해도 그마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원하고 바라는 것이 비록 사소하나 하나도 이룰 수가 없고 영원히 이와 같으니, 비록 육신이 있다 하나 없앨 수 없는 것이 실로 상사常死, 즉 영원한 죽음이 됩니다. 어찌 영원히 산 것이 되겠습니까? (…生者, 動而自適之謂也. 原泉混混, 不舍晝夜, 謂之活水, 掘地而注, 更無改移, 謂死水矣. 聖神既在天域, 凡所欲爲, 無弗能爲, 大小之欲, 無不必遂, 如是無量, 不計歲月, 謂之常生. 若不仁之人, 既入地獄, 束縛於萬苦之中, 曾無轉動, 自負痛楚, 懇求滅息, 又不可得. 願欲雖微, 無一能遂, 永永如是, 雖有形質, 不能滅亡, 實爲常死, 曷爲常生耶?)
7.47 “내가 게으른 사람의 땅을 지나왔는데, 가시덤불로 가득하였다.”(잠언 24,30-31 “내가 지나가다가 게으름뱅이의 밭과 생각 없는 사람의 포도원을 보니, 가시덤불이 우거지고 엉겅퀴가 덮이고 돌담이 무너져 있었다.”)…너희는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끊어진 것이 다시 싹트고, 물러났던 것이 되돌아오며, 꺼졌던 것이 다시 불붙고, 굽었던 것이 다시 펴지며, 깨끗하던 것이 다시 더러워지고, 잠들었던 것이 다시 깨어나니, 한결같이 뽑아낼 뿐 어찌 만족하겠는가? 반드시 항상 뽑아주어야 한다.… (“我經怠人之地, 荆棘充滿之.”…爾勿自欺, 絶者復芽, 退者復返, 滅者復熾, 曲者復伸, 浄者復汚, 寐者復醒, 一拔而已, 豈足乎? 必須恒拔矣.…)
7.48 세간에서 말하는 경사스러운 복은 부귀와 안락, 재지才智와 도덕 할 것 없이 반드시 사람이 직접 구해 찾아야만 비로소 이를 얻을 수 있다. 스스로 능히 남에게서 구해 찾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때문에 반드시 부지런히 애를 써야 이것이 내게로 온다. 게으른 자는 힘든 것을 싫어해서 부지런함을 피하므로, 행하는 바가 이미 경사스러운 복을 얻을 원인을 잃고 마니, 무슨 수로 여러 기쁘고 복된 일을 얻을 수 있겠는가? (夫世間所謂慶福, 無論富貴安樂, 才智道德, 必須人自求索, 乃始得之, 無有自能求索人者也. 故必由勤勞致之, 息者憎勞避勤, 已失所爲得慶福之因, 何由得諸慶福邪?)
비유하자면 이렇다. 어떤 성에 다만 문이 두 개 있는데, 저쪽은 여러 가지 복이 들어오고 이쪽은 여러 종류의 재앙이 들어온다고 하자. 네가 언제나 저쪽은 닫아두고 이쪽은 열어두어서 온 성이 온통 재앙으로 가득 차게 한다면, 그 모습이 마치 지옥과 같아져서 유감스럽고 피하고 싶은 곳이 되지 않겠는가? 게으른 자는 여가를 좋아한다. 이것은 여러 사특한 생각과 잘못된 행위가 들어오는 문을 여는 것이다. 부지런함을 증오하고 수고로움을 미워하는 것은 여러 가지 경사스러운 복이 통해 들어오는 문을 닫아거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재앙과 화가 모두 이를 따르고, 여러 경사스러운 복은 이를 온통 피한다. (臂之一城, 特有二門, 彼爲諸福所入, 此爲諸禍所入. 汝恒閉彼闢此, 不令滿城皆禍災, 狀若地獄, 爲可恨可避之處乎? 怠者好暇, 是闢諸邪念回行所由入之門也. 憎勤惡勞, 是闔諸慶福所由入之門, 故諸災禍悉隨之, 諸慶福悉避之.)
7.50 (루카 15,7)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어째서 그런가? 저 죄인은 스스로 죄인 됨을 인정했으므로 통회에 절박하고 고치는 것에 다급해서, 부지런하고 민첩하게 선을 행하여 앞선 허물을 속죄하려 한다. 그래서 천주께서 가장 중히 여기신다. 선한 사람은 혹 스스로 선하다고 하면서 큰 잘못을 범하지는 않더라도정진함에 있어서는 다급하지 않으니, 비록 선하다고는 해도 천주께서 보시기에는 오히려 가볍다.… (…何故乎? 彼罪人自承爲罪人, 故切於痛悔, 急於俊改, 勤敏善行, 用贖前諐, 故天主最重之. 善者或自謂善, 未或大犯, 不急於精進, 雖善, 帝視之猶輕焉.…)
7.51 …(묵시 3,15-16) “나는…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 뜨거운 것은 덕에 부지런하고 민첩한 것을 말하고, 찬 것은 죄에 흘러 빠지는 것을 말한다. 미지근한 것은 악한 건 아니어도 또 선행에 부지런하지 않은 것이다.…미지근한 것에도 두 종류가 있다. 뜨거운 데서 찬 데로 향하는 것과 찬 데서 뜨거운 데로 향하는 것이니, 모두 미지근한 것을 거쳐야만 한다. 한번 지나간 뒤에는 더 뜨거워지지 않고 반드시 차게 되니, 미지근한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람이 날마다 마땅히 해야 할 선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이미 행했던 선이 반드시 나날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熱謂勤敏於德, 寒謂流溺於罪也. 溫者不爲惡, 又 不勤於善行.…溫者有二, 從熱向寒, 從寒向熱, 皆經於溫. 一過之後, 非向熱, 必向寒, 不久温也. 人不日進于, 所當爲之善, 即所已爲之善, 必且日消矣.)
7.53 …어떤 사람이 말했다. “짐승 중에 말과 소와 양 같은 경우는 끌고 가면 따라가지만, 돼지만은 그렇지 않고 더구나 크게 슬픈 소리를 질러대는 것은 어째서인가?” 내가 말했다. “말은 장차 나를 타려는구나 하고, 소는 나를 밭 갈게 하려는구나 하며, 양은 내 털을 깎으려는 모양이군 한다. 모두 쓰이는 바가 있기 때문에 해를 입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유독 돼지만은 종일 배불리 먹고 편안히 놀기만 해서, 탈 수도 없고 밭 갈게 할 수도 없으며 입을 만한 털도 없는데 끌고 가니, 장차 나를 죽이려는구나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몹시 슬퍼하며, 붙잡기만 하면 성을 내면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或曰: “凡獸如馬牛羊, 牽之則從, 豕獨否, 且大作悲聲, 何故?” 曰: “馬謂將我乘, 牛謂將我耕, 羊謂將剪我毳. 皆有所用之, 故不疑受害耳. 獨豕終日饜而游閑, 不可乘, 不可耕 無毳可衣, 而牽之, 不謂將我殺歟? 故甚悲, 抅怒欲脫矣.”…)
7.56 …용맹의 덕이란 무엇인가? 망령되이 위험에 나아가지 않고, 위험 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평온한 마음과 기쁜 낯빛으로 큰 모욕과 업신여김을 참아낸다. 목숨과 여러 가지 세상의 길한 복을 가볍게 보고, 천주를 섬기는 덕과 죽은 뒤의 영원한 일을 중히 여긴다. 세상의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고, 허물과 과실을 두려워할 만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용맹의 덕이다. (…勇德何也? 不妄就險, 不畏迯險, 以平心愉色, 忍大辱嫚, 輕忽身命及諸世之吉福, 而重事天主之德, 及身後永年之事. 不畏世禍, 而特以諐訧過失爲可畏者, 斯正勇德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