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글과 그림 출처 –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230825000660[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2023.08.26 11:52
“웃기고 있군.”
전시장을 찾은 문화 비평가 루이 보셀이 입술을 깨물었다. 예술이 이렇게 추락해도 될 일인가 싶었다. 그는 웬 푸르죽죽한 그림을 보고 있었다. 일단 여성 초상화인 건 확실했다. 그 부분 말고는 모든 게 의문 투성이였다. 보라색이 곁들여진 머리, 녹색이 죽 그어진 얼굴, 노란색이 한껏 칠해진 목…. 무엇 하나 제대로 칠해진 게 없어보였다. 보셀은 화를 억눌렀다. 이걸 작품이랍시고 봐야 하는 상황이 치욕스러웠다. 이 그림은 짐승이 남긴 흔적 같았다. 주둥이에 붓을 문 야생 동물이 대충 스케치한 캔버스에서 날뛴 듯했다. 어디보자, 앙리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 대체 무엇이 모자고 무엇이 여인이란 말인가. 보셀은 실소를 참지 못했다. 더 웃긴 건, 이 그림 주변에도 이 따위의 비슷한 초상화나 풍경화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보셀은 필사적으로 눈 둘 곳을 찾았다. 그가 발견한 건 전시장 한가운데 있는 르네상스 양식의 조각상이었다. 보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짐승의 할큄 같은 그림들 한가운데 있는 조각상이라…. 보셀은 혼잣말을 했다. “도나텔로(르네상스 조각가)가 야수에게 둘러싸인 꼴이군.”
이날만 그런 게 아니었다.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은 거듭 수모를 겪었다.
사실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가장 먼저 화를 낸 이는 그의 아내 아멜리 파레르였다. 열심히 치장하고 모델로 섰다. 기껏 그렇게 해줬더니 나를 본따 그렸다는 게 웬 녹색 사마귀 같은 여인이었다. 캔버스를 받아든 파레르의 감상평은 간결했다. “…내가 이렇게(이따위로) 생겼어요?” 또 다른 비평가들 또한 마티스의 그림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었다. “이게 짐승들의 흔적이 아니면 무엇인가.” 색도 모르고, 칠도 모르는 풋내기의 장난이 도가 지나치다는 말이었다. 이 밖에도 “미술에 대한 모독”, “사람이 그린 게 아닌 것 만큼은 확실하다”는 식의 조롱이 이어졌다.
“지금껏 내가 본 것 중 가장 형편 없는 물감 얼룩일세.”
미국 출신의 예술품 수집가 겸 평론가 레오 스타인도 비난 행렬에 함께 했다. 그런데… 어디에 홀린 건가, 열병에 걸린 건가. 스타인은 이 그림을 본 후부터 묘한 미열에 시달렸다. 거슬리게 아프거나 불편한 건 아니었다. 외려 술을 살짝 걸친 듯 약간의 들뜸을 이어졌다. 이 기분은 뭐지? 스타인은 문제의 그림 앞에 다시 섰다. 그림을 볼수록 들뜸의 감정도 커졌다. 스타인은 인정해야 했다.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문장을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 작품, 계속 보니 신선하고 좋은데?’였다. 스타인은 끝내 이 그림을 사버렸다. 고삐 풀린 물감이 짐승처럼 날뛰는 그림, 자유분방하게 뛰어노는 원색의 색채 탓에 본인도 “형편없다”고 혹평한 이 작품을 돈을 주고 구매한 것이다. 이제 모든 수집가와 평론가에게 조롱 받을 게 뻔했다. 스타인 스스로도 자기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들고가는 이 그림이 훗날 어떤 전설의 시작이 되는지도 당연히 알지 못했다.
“그림이 팔리긴 팔렸네요.”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누군가가 씩 웃었다. 동그란 안경을 쓴 채 맞춤 정장까지 차려입은 사내였다. 차분한 어투, 기품있는 자세에서 교양이 묻어나는 예술가였다. 야수의 외모에 괴상한 광기(狂氣)를 지녔을 것으로 예상되던 그 사람, 마티스였다. 이런 ‘반전’ 모습에 그를 본 사람 중 상당수가 “직접 만나보니 야수가 아니었어!”라며 떠들고 다녔다고 한다.
입원실서 송두리째 바뀐 인생
앙리 마티스는 1869년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 카토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꽤 성공한 곡물상이었다. 아버지는 아들도 이 일을 이어받길 바랐다. 마티스는 사업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가 택한 건 공부였다. 특히 법학에 매달렸다. 성과는 있었다. 18살에 파리로 넘어간 그는 곧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고향으로 돌아와선 법률사무소 조수로 바로 취직도 했다. 무난한 삶이었다. 이대로만 가도 결코 문제될 일 없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마티스는 그 조용한 여정에 싫증을 느끼고 말았다. 뒤늦게 사춘기가 온 양 모든 일이 따분해졌다. 서류는 만날 쌓이고, 분쟁은 끝이 없었다. 그는 종종 장난감 총을 갖고 놀았다. 사무실 창가에서 콩알탄을 쏴 행인을 맞히는 식의 짓궂은 장난도 했다. 어제 같은 오늘은 한없이 이어질 듯했다. 그런 마티스에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1889년의 한 가을 날, 마티스는 참을 수 없는 복통을 느꼈다.
의사는 충수염 탓이라고 했다. 당시로는 사망률이 꽤 높은 병이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됐지만, 그는 거의 중환자 취급을 받으며 침대에 머물러야 했다. 입원실에 갇힌 마티스는 지루함에 답답함까지 밀려오는 이 시간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일도 못하고, 당연히 장난감 총을 갖고 돌아다니지도 못했다. 마티스는 누워서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가 옆자리 환자가 풍경화를 그리는 걸 우연히 볼 수 있었다. 저건 좀 재밌어보인다? 깊이 잠들었던 호기심이 슬금슬금 눈을 떴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다. 시간은 넘쳐흘렀다. 그래서 바로 부탁했다. “어머니. 그림 도구 좀 사다주세요.“
화구를 든 마티스가 흥얼거렸다.
마티스는 시험 삼아 석판화를 한 점 베껴봤다. 재미로 풍경화도 몇 점 그려봤다. 마티스는 빈 캔버스 위에 자기가 창조한 세계를 감상했다. 속이 막 뜨거웠다. 평생 느껴본 적 없는 성취감이 들불처럼 번졌다. “그간 나는 매사에 시큰둥했다. 남들이 나에게 뭘 권하든 ‘나랑은 상관 없다‘며 한 귀로 흘렸다. 하지만 물감 통을 손에 든 그 순간, 나는 이게 내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마티스는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이제 마티스의 꿈은 화가였다. 그는 2년간의 병원 생활을 마친 후 법률사무소에 복직했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콩밭에 있었다. “아버지. 전 그림을 그려야겠어요.” 마티스는 선언했다. 기반 닦인 사업도 팽개치고, 보장된 법조인의 길도 포기하고, 그러고서 한다는 게 고작 불안정한 화가…?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나 끝내 자식을 이기지 못했다. 회화의 기초도 모르는 화가 지망생은 파리로 돌아왔다. 그가 스물 두 살때였다.
“클래식한 화풍만 그리거라. 그렇지 않으면 지원금을 바로 끊어버릴테니.”
마티스는 아버지의 조건을 되뇌었다. 고전의 틀 밖을 벗어나지 않는 모범생과 놀라는 말이었다. 빛을 그린다니, 영혼을 그린다니 하는 이상한 녀석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얘기였다. 세상에서 지루함을 가장 싫어하게 된 마티스가 그 말을 지킬 리 없었다.
스승의 가르침 “개성있는 그림을 그려라”
마티스는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국립미술학교)에 두 차례 낙방한 끝에 겨우 입학했다.
마티스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학생들과 나란히 앉아 붓을 쥐었다. 실력은 성실히 쌓였다. 다만 그 뿐이었다. 마티스는 여전히 갈증을 느꼈다. 고전 작품을 곧이곧대로 따라 그릴 정도의 수준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이 즈음 마티스의 별명은 ‘의사’였다. 동그란 안경에 턱수염을 빽빽하게 기르고선 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데서 나온 말이었다. 수업만 갖고선 만족할 수 없던 마티스는 틈만 나면 루브르 박물관에 갔다. 곳곳 숨어있는 옛 거장들의 명작을 살펴봤다. 이를 보면서 교실에선 얻을 수 없는 영감을 얻고, 천재들의 통찰력도 익히고 싶었다. 에콜 데 보자르의 미술과 교수인 귀스타브 모로가 그런 마티스를 눈여겨 봤다. 어느 날 모로는 마티스를 불렀다. 모로는 그에게 개성있는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전통의 틀에서 벗어나는 건 잘못이 아니라고 다독였다. 늦깎이 화가 지망생이 너무나도 듣고 싶은 조언이었다. “자네는 그림을 단순화할 걸세.” 안목 있는 모로는 마티스의 습작 몇 점을 보곤 의미심장한 예언을 했다.
마티스는 초조했다.
마티스는 모로의 지도하에 옛 화풍과 더불어 파리 미술계에 번진 인상주의까지 공부했다. 그런 그에게 빈센트 반 고흐와 폴 세잔은 회화의 미래 같았다. 보고 느낀대로 물감을 덕지덕지 찍어바른 반 고흐의 그림은 혁신적이었다. 대상의 재현(再現) 따위 가볍게 무시한 세잔의 작품은 혁명적이었다. 대놓고 원색을 흩뿌린 폴 고갱의 그림, 눈부시게 화사한 조르주 쇠라의 작품 또한 눈물겹게 참신했다. 나는 이들과 비교해서 나은 게 있는가. 하나도 없었다. 충격받은 마티스는 이들의 그림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세잔과 고갱의 그림을 손에 쥐기 위해 빚까지 졌다.
“내 그림에도 이토록 깊은 감동을 주는 아름다움이 스며들면 좋을 것을.”
마티스는 집 거실에 걸어둔 세잔의 그림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가 특히 존경한 이는 세잔이었다. ‘가까이에서 보이는 건 크게, 멀리서 보이는 건 작게.’ 세잔은 수백년간 신성시된 원근법을 대놓고 파괴한 첫 화가였다. 그런가 하면 세잔은 위에서 본 사과, 옆에서 본 사과, 밑에서 본 사과를 한 캔버스에 때려박았다. 봄에 본 생 빅투아르산, 가을에 본 생 빅투아르산, 햇빛 쨍쨍한 날 생 빅투아르산, 비가 쏟아지는 생 빅투아르산을 또 한 캔버스에 집어넣었다. 그런 식으로 회화 세계 속 인간의 규칙과 자연의 법칙을 모조리 무시한 최초의 예술가였다. 고전미술의 파멸자면서, 현대미술의 구원자였던 것이다. 마티스는 늘 새로운 걸 갈망했던 세잔의 정신을 따르기로 했다. 세잔 또한 지루함을 죽기보다 싫어했을 인간이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 시절 모든 ‘깨어있는’ 화가들의 멘토였던 카미유 피사로가 싱숭생숭한 마티스의 마음에 결정타를 가했다. “젊은 친구. 그대가 관찰하고 느낀 바를 그리시게.” 마티스는 야수가 될 채비를 마쳤다.
1905년, 마티스는 소금향이 짙은 남프랑스 콜리우르로 갔다.
지중해와 맞닿은 작은 동네였다. 좁은 골목길을 몇 개 지나면 짙푸른 해변을 원없이 볼 수 있는 마을이었다. 마티스는 내리쬐는 태양, 철썩대는 파도, 흔들리는 나뭇잎을 한참동안 살펴봤다. 서로가 뿜어대는 선명한 원색의 아름다움에 한껏 취했다. “파랑, 노랑, 빨강이 가장 아름다운 색이었다. 이처럼 감각의 저변을 뒤흔들 수 있는 색을 써야했다.” 콜리우르만큼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은 없다던 마티스가 이 마을에서 느낀 것이었다. 마티스는 물감을 잔뜩 짰다. 아내 파레르를 앉혔다. 스케치를 했다. 원색의 강렬함을 그대로 살려 색을 칠했다. 그렇게 해 탄생한 그림이 ‘모자를 쓴 여인’이었다.
니스의 햇살, 들짐승을 잠재우다
“도나텔로가 야수에게 둘러싸인 꼴이군.”
보셀은 1905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미술 전시회 ‘살롱 도톤’에서 이 그림을 봤다. 그의 말은 순도 백퍼센트의 조롱이었다. 마티스는 그 비아냥이 싫지 않았다. 기성화단에 충격을 안겼다는 점에서 외려 만족스러웠다. 이제 마티스는 야수파의 창시자로 우뚝 섰다. 앙드레 드랭, 모리스 드 블라맹크 등이 든든한 동료였다. 야수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색채였다. 야수파는 캔버스의 주인공을 색으로 내세웠다. 화가의 의도, 나아가 화가의 정신을 색에 기대 표현하고자 했다. 그간 중요하게 여긴 대상의 형태와 구도 따위를 뒤로 밀어내는 파격 행보였다. 야수파는 대상에 대해 ‘마음의 눈’이 보고 느끼는 대로 색을 칠했다. 물감은 그날 기분, 그날 감정에 따라 달라졌다. 대상이 갖고 있는 고유의 색은 전혀 신경 쓸 게 아니었다. 이를테면 잘 익은 사과를 더는 빨간색으로 두지 않았다. 푸른 하늘, 떨어지는 은행잎을 더는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그리기를 거부했다. 본능에 충실한, 규칙과 규율은 물어뜯는 듯한 이런 행보를 보면 정말 야수의 움직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결과는? 마티스의 그림 ‘모자를 쓴 여인’처럼 원색의 잔치였다. 한 번 본 사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다채로움의 항연이었다. 대상에 갇혀있던 색채는 야수파의 송곳니에 물어뜯겨 해방을 맞이했다. 가까운 미래, 파블로 피카소의 입체파는 추상회화의 제멋대로인 형태에 영향을 준다. 마티스의 야수파는 추상회화의 자유분방한 색채에 영감을 안겨준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마티스의 입지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문제의 그림이 팔리긴 했지만, 그게 성공을 뜻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 말대로 클래식한 화풍에나 매달려야 할까.’ 수년째 잘 풀리지 않는 마티스에게 한 남성이 다가왔다. 그의 이름은 세르게이 슈추킨이었다. 러시아 출신의 돈 많은 남작이었다. “지금 대중과 미술 애호가는 당신에게 반대할 것이야. 하지만 미술의 미래는 당신에게 달려있어.” 비쩍 말라 갈비뼈를 내보이는 야수에게 건넨 응원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엄청난 안목이었다(슈추킨은 당시 무명의 피카소 그림도 40여점이나 구매했다). 마티스는 슈추킨의 후원을 받기 시작했다. “내 모스크바 저택에 둘 그림을 그려주시오. 돈은 걱정하지 마시게.” 1909년, 마티스가 이 말을 듣고 그린 게 ‘춤’이었다. 알몸의 다섯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이들이 누구인지, 몇 살인지, 성별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보인다. 그저 푸른색 하늘 아래, 녹색 대지 위에서 붉은색 몸을 드러낼 뿐이다(춤 II). 색채는 극도로 단순했다. 그런데도 이 안에선 원시적인 힘이 요동친다. 활어처럼 생명력이 펄떡인다. “색은 세 개만 써도 충분한 걸. (…) 내가 추구하는 유일한 이상(理想)은 조화였어.” 자기 그림을 보고 스스로 내린 평가였다. 슈추킨은 마티스의 그림을 30점 이상 사들였다. 그렇게 해 마티스가 자기 꿈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곳은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도시였다.
1917년, 마티스는 니스 땅을 밟았다. 원래는 크리스마스 휴가나 보낼 생각이었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고질적 기관지염이나 잠재울 요량이었다. 마티스는 이곳에 오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 동네를 사무치게 사랑하게 되리라는 점을. 마티스에게 니스는 색채의 보고(寶庫)였다. 햇빛은 샛노랗고, 노을은 새빨갰다. 짙은 남색의 별과 달이 넘실댔고, 옅은 에메랄드빛 물결이 출렁였다. “…이 도시의 첫인상은 어이가 없고, 숨막히게 매혹적이었다. 매일 아침 창문으로 스며드는 황홀한 빛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것이라곤 (나조차)믿지 못했다.” 훗날 마티스는 니스로 온 첫 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니스 시절’ 마티스의 대표작은 ‘열린 창문을 등지고 앉아있는 여인‘이었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 푸른 하늘과 바다, 우아한 여인…. 마티스가 아름답게 본 모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간의 야성은 어디로 갔는가. 그림은 여전히 강렬하지만, 무척 밝고 따뜻해 보인다. 사실 마티스는 이런 그림을 더 잘 그리는 화가였다. 알고보면 초식동물의 온기를 육식동물의 살기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 사나운 들짐승은 니스의 따뜻한 날씨 아래 유(柔)한 순둥이로 변해갔다.
이제 마티스의 별명은 ‘니스의 예술가’였다.
파리와 니스를 오간 마티스는 1926년께 니스에 아예 살림을 차렸다. 이후 거의 니스에서 살았다. 마티스는 지중해 풍경, 열린 창문, 여성 누드화 등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미술계도 그런 마티스에게 차츰 물들었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이름값을 높여갔다.
그에게는 뮤즈, 그녀에게는 비극
마티스에게도 뮤즈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뮤즈는, 누군가에게는 크나큰 비극이었다. 다름 아닌 아내 파레르에게.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1894년부터 시작한다. 당시 마티스는 카미유 조블로라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둘 사이에선 딸 마르게리트가 태어났다. 그 시절 마티스는 여러모로 불안했다. 확실한 고전 화풍에 의문을 갖고, 불확실한 미래 화풍에 희망을 걸던 시기였다. 1897년, 조블로는 그런 무명의 화가 곁에서 떠났다. 그리고 그 해, 마티스는 생기 넘치는 한 여인과 만났다. 파레르였다. “파레르.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하오. 하지만 나는 그런 당신보다 그림을 더 사랑할 것이오.” 마티스는 선언하듯 말했다. 파레르는 그런 것 상관없다며 이 남자의 손을 꽉 잡았다. 둘은 곧 결혼했다. 1899년에 첫째 아들 장이 생겼고, 그 다음 해 둘째 아들 피에르가 태어났다. 파레르는 마티스가 그림에 몰두할 수 있도록 헌신했다. 그의 돈벌이가 시원찮을 때는 모자 가게를 열고 뒷바라지를 했다. 모델이 없을 때는 직접 이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파레르는 어느덧 병에 걸린 허약한 여인이 되고 말았다.
1930년대 초, 병석에 누워있던 파레르가 니스에서 작업 중인 마티스를 보기 위해 힘겹게 찾아갔다.
그런데 마티스 옆에 한 여인이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20대 여성이었다. 이름은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였다.
리디아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광풍에서 부모를 잃고 프랑스로 온 이주민이었다.
그녀의 꿈은 의사였다. 그러니 일단 돈을 벌어야 했다. 어쩌다 보니 마티스의 비서가 된 것이었다. 리디아의 일은 마티스의 일정 정리, 모델과의 약속 조율, 그림을 팔아주는 딜러들과의 조건 협상, 작품의 기록과 뒷정리 등이었다. 리디아는 두뇌회전이 빠르고, 손도 꼼꼼했다. 마티스는 일에 몰두하는 리디아를 ‘얼음 공주’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표했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호감을 보였다. 모델 제안이었다. 리디아는 처음에는 거절했다. 하지만 마티스의 모델이 된 후부터는 열심히 포즈를 취했고, 더 나은 자세를 연구하는 학구적인 면을 보였다.
마티스는 그런 리디아에게 점점 호감이 생겼다.
마티스는 단지 조수였던 리디아를 놓고 90점 넘는 유화를 그렸다. 드로잉, 스케치를 더하면 작품 수는 훨씬 더 많아진다. 파레르는 그런 마티스를 보고 기가 찼다. 마티스는 끝까지 아니라고 했지만, 둘은 동침(同寢)하는 사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리디아를 자르세요.” 파레르는 입술을 떨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떠날테니.” “여보, 제발….” 마티스는 리디아와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해고는 부당한 일이라며 거부했다. 그렇다면 파레르가 할 결정은 하나였다. 나보다 미술을 더 사랑하겠다고 한 건 받아들일 수 있어. 하지만…. 1939년, 마티스와 파레르는 이혼했다. 마티스의 나이 일흔 살 때였다. 미술계 거장 대우를 받을 때였다.
이빨 다 빠져도…야수는 야수였다
마티스는 리디아와 다시 만났지만, 예전 같은 생활은 하지 못했다.
1941년, 마티스는 십이지장암과 폐색전증에 걸려 몸져누웠다. 리디아의 보살핌을 받았지만, 그는 곧 죽을 사람 같았다. 마티스는 무력함과 지루함의 늪에 또 빠졌다. 의사에게 제발 그림을 조금만 더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크게 잘못될 수도 있을 뻔한 수술을 다행히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하지만 의사는 살아 돌아온 마티스에게 거듭 당부했다. “물감 성분이 선생의 건강을 해칠 수 있어요. 그러니 앞으로 유화를 그리지 마세요.” 마티스는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했다. 어차피 합병증 탓에 침대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관절염이 심해 붓질도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마티스는 예술을 관두지 않았다. 처음에는 손에 붓을 묶어봤다. 그 다음에는 가볍고 움직임이 덜한 연필을 꺼내봤다. 결국 마티스가 손에 든 건 가위였다. 다른 손에 쥔 건 색종이였다. 마티스가 삶의 전환점을 맞은 건 또 병실 안에서였다.
마티스는 가위로 색종이를 잘랐다.
조각을 캔버스에 다닥다닥 붙였다. 마티스는 이제 이런 방식으로 예술활동을 했다. 그렇게 해 만든 게 ‘이카루스‘였다. 미노타우로스를 가둔 미궁(迷宮) 제작자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루스는 원치 않게 외려 미궁에 갇히고 만다. 이들은 새들이 흘린 깃털을 모은다. 곳곳에 맺힌 벌집에서 얻은 밀랍으로 깃털을 엮는다. “강한 열은 밀랍을 녹일 수 있다. 절대로 높이 날지 말거라.” 다이달로스의 말을 끝으로 둘은 각자 날개를 펼쳐 미궁에서 탈출한다. 들뜬 이카루스는 아버지의 말을 잊고 만다. 더 넓은 세상을 보겠다며 마구 날아오른다. 과욕이었다. 밀랍이 녹으면서 날개가 망가졌다. 결국 그는 추락한다. 곧 죽을 처지였다. 마티스의 작품은 딱 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검은색은 이카루스, 가슴의 빨간 점은 이카루스의 심장이다. 파란색은 하늘, 노란색은 깃털로 보인다. 그런데, 추락하는 이카루스는 외려 즐겁게 춤을 추는 듯하다. 죽음의 공포가 느껴지지 않는다. 마티스는 자신을 이 이카루스에 빗댄걸까. 늙음과 질병, 침대와 휠체어에 파묻힌 채 추락하는 그가 좌절 말고 새로운 희망을 본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가위는 연필보다 훨씬 감각적이군.” 가위를 쥔 마티스의 말이었다. 사신을 기다리는 지루한 삶 대신, 가위와 색종이를 들고 새 여정에 나선 그였기에 그 설렘을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이카루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사한 공군 조종사를 의미한다고도 한다.
송곳니는 빠졌지만 야수는 야수였다.
마티스는 끝내 사냥을 포기하지 않는 야수처럼 예술에 매달렸다. 그의 손길이 닿은 최후의 걸작은 방스에 있는 로자리오 성당이었다. 화가가 건축을? 환자가 이런 대형 프로젝트를? 사연은 이랬다. 암 수술을 받은 마티스는 야간에 자신을 돌봐 줄 간호사를 채용했다. 그녀의 이름은 모니크 부르주아였다. 늙고 병든 마티스는 손녀뻘의 부르주아가 진땀을 빼는 걸 고맙고도 미안하게 봤다. 1946년, 부르주아가 도미니크 수녀원의 자크 마리 수녀가 된 후에도 둘은 ‘사랑스러운 우정’을 이어갔다. “마티스 선생님. 저희가 예배당을 새로 지을까 해요. 혹시 설계를 맡아주실 수 있겠어요?” 마티스는 부르주아, 그러니까 마리 수녀의 부탁을 흔쾌히 승낙했다. 그 또한 마지막 기념비적 작품을 만들고 싶은 터였다. 마티스는 3년간 유화와 조각, 종이 오려붙이기,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 등을 하며 그의 전부를 실으려고 했다. 사제복과 제사용품까지 평생의 예술혼을 실으려고 했다. 찬란한 햇빛을 두른 로자리오 성당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보석 같았다. 짙은 파란색과 녹색, 밝은 노란색이 넘실대는 스테인드글라스에서는 보석 가루가 쏟아지는 듯했다. “이 작품은 내가 평생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한 삶의 결과야. 나의 걸작품이야.” 마티스의 말이었다.
1954년 11월3일, 마티스는 죽었다. 향년 85세였다.
죽기 전날 마티스는 리디아를 앉혀두고 마지막 초상화를 그렸다. 싱그러운 20대 초반에 처음 만난 리디아도 어느새 40대 중반이었다. 늙은 야수는 변함없이 아름다운 삶의 한 장면을 보고 웃었고, 이젠 돌아올 수 없는 삶의 한 순간을 보고 울었다.
한때는 ‘분노의 짐승’이란 오해 아닌 오해도 받은 마티스가 사람들에게 그림으로 전하고 싶은 건 생의 기쁨이었다.
“나는 내 그림에 봄날의 밝은 즐거움을 담으려고 했다.” 마티스의 이 말이 그의 모든 회화를 설명한다. 삶이 단조로워 괴로운 그대여, 내 그림을 보는 동안 만큼은 강렬한 생의 요동을 느껴보시게. 이런 마음이었다. 그렇기에 말년의 마티스가 남긴 일기는 가슴을 절절하게 한다. “내가 이렇게 간절하고 절실하게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으면 한다.” 그대는 그림에서 펄펄 뛰는 심장만을 느끼시라. 그런 다음, 다시 용기를 내 삶과 마주하길 바란다는 마음으로 꾹꾹 눌러 쓴 글이 아닐까.
〈참고 자료〉
앙리 마티스, 포르마 에서스, 마로니에북스 / 앙리 마티스, 캐럴라인 랜츠너, 알에이치코리아 / 발칙한 현대미술사, 윌 곰퍼츠, 알에이치코리아 / 앙리 마티스, 신의 집을 짓다, 가비노 김, 미진사
아! 저 자랑하고 싶어요.
프랑스 니스에서 마티스 미술관에 가서
그의 작품 전부 보고 왔어요.
야수파의 기법을 좋아한 전
그의 그림 색채에 푹 빠졌고
장수 화가 마티스의 그림을
볼 때면 전 어깨가 들썩입니다. 자랑 끝.
기억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