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자慈’라는 글자를 풀어헤칠 때 글자의 윗부분을 ‘검을 현玄’이 두 개 겹쳐진 모습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풀 초艹=艸’와 ‘실 사絲’가 합쳐진 글자로 볼 것인지는 중요하다. 정답은 후자로서 ‘무성할/이 자玆’와 ‘마음 심心’이 결합한 글자가 ‘사랑 자慈’이고 그 뜻은 사뭇 깊다. ‘무성할/이 자玆’에는 인간의 의식주에서 가장 중요한 필수 기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실, 혹은 실타래요 그 실이 되기 위한 누에고치가 담겼다. 정리하면, 풀처럼 무성하고 누에고치처럼 사랑스러움을 품은 마음이 바로 ‘사랑 자慈’이다. 그 글자와 함께 ‘슬플 비悲’를 더해 ‘자비慈悲’라는 아름다운 말이 생겨난다. ‘슬플 비悲’는 ‘아닐 비非’를 담아 무엇인가가 마음대로 안 되거나 마음이 영 아니어서 슬픈 상황이다. ‘자비’에는 사랑과 연민이 함께 담겨서 인간을 보는 하느님의 마음이자 사람이 사람과 자연을 바라보는 마음이며, 나 밖에 있는 다른 것들이 더욱 사랑스러워지고 안쓰러운 상황에서 나아지도록 노력하는 마음이다. 사회나 공동체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자비라는 말 건너편에는 ‘정의正義’가 자리한다. 이 사회는 정의로 질서를 잡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그 정의에는 반드시 자비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용서와 포용, 너그러움, 인내, 관용을 그 속성으로 한다. 사실 ‘정의와 자비’는 고전적 주제 중 하나이다.
뉴스가 싫어진다. 뉴스만 틀면 끝 간 줄 모르고 치열하게 증오와 미움을 발산하면서 막말을 쏟아내는 양편, 보수도 아닌 보수이며 진보도 아닌 진보들, 네 편과 내 편 때문이다. 우리는 싸우면서도 재치 있는 유머로 싸우는 여유를 언제쯤 관전할 수 있을까? 나만의 정의나 집단적인 이기이며 제 밥그릇 챙기기가 아닌 공의公義의 실현을 위해, 진정 우리 미래인 젊은이들을 걱정하고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를 걱정하는 토론다운 토론을 언제쯤 할 수 있을까? 정의가 정의답고 자비가 자비다워져 정말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 인간의 얼굴을 띤 정의, 내가 지금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억울하지 않고 미소가 지어지는 세상,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럴 수 있겠다고 끄덕이는 세상에는 언제쯤 살 수 있을까? 이는 절대 오지 않을 세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일까?
큰 사회의 이야기는 작은 사회인 공동체 생활, 수도 생활에도 마찬가지이다. 수도 생활은 근본적으로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 비영리 집단이므로 정의의 실현을 추구하기보다는 자비와 포용을 추구하면서 천국을 앞당겨 함께 사는 삶이다. 수도자들은 납품 기일을 맞추어야 하는 시한이 없고, 마감 기일을 맞추어 이윤을 내지 않고도 끼니 굶지 않으며 적자赤字 없이 살아간다. 그런데도 공동체 안에서는 적어도 드러내놓고는 아니더라도 이런 모습이 정의롭지 않다고 목소리를 내는 형제들이 있고, 또 다른 형제들의 포용과 용서, 자비와 인내에 기대어 그저 기생寄生하듯 사는 형제들이 얄밉다고 투덜대는 형제들도 있다. 형제들 전체를 놓고 보면 셋 중 하나만 겨우 일하고, 다른 셋 중 하나는 얹혀서 살며, 다른 셋 중 하나는 그저 그냥 사는 게 수도 생활이라는 우스개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닐 듯싶기도 하다. 그래도 수도자들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평생, 화장실과 샤워기 딸린 독방 한 칸, 세 끼 밥시간이 보장되는 삶을 산다. 어찌 보면 지극히 정의롭지 않은 삶이면서도 지극히 정의로운 삶이 수도 생활이다.
집단과 개인, 전체와 부분, 공공公共과 프라이버시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있게 마련이고 이는 결국 정의와 자비의 문제이다. 정의와 자비는 사회라는 천을 엮어내는 구조이자 인간의 삶을 유지하게 하는 마땅한 원리이면서도 균형을 잡기가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며 절대 끝나지 않을 담론이다. 정의는 모든 윤리 질서의 기초이면서 동시에 적어도 그리스·라틴 계열의 사상과 문화적 전통 안에서는 타인과의 관계(iustitia est ad alterum)를 결정하는 뿌리이다. 그렇지만 법적인 관점에서만 정의가 다루어질 때, 이는 결국 ‘최고의 정의가 최고의 악(summum ius summa iniuria)’일 수도 있는 상황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법의 조문에 따라 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정의보다 그 법의 적용 대상이 된 사람의 본래 지향과 동기를 살펴 법 자체를 초월하는 정의(ἐπιείκεια, epieikeía, 너그러운 마음, 온유와 관용-사도 24,4 2코린 10,1)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이야기한다. 그래서 사면이니 탕감이니 하는 다양하고 정교한 법률적·사회적 보조 장치들이 있고, 사회 구성원들은 이를 사회적 합의로 수용한다. 시대와 역사를 막론하고 다양한 문화와 사회 안에서도 징벌이나 형벌이라는 제도의 해석과 함께 교정, 교화, 예방적 재교육, 배상, 정상 참작 등등의 시스템이 항상 존재한 것은 그 이유이다.
사람들이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라고 말하고, 나아가 ‘정의 없는 자비는 붕괴이고, 자비 없는 정의는 잔혹하다’라는 말도 하지만, 2001년의 끔찍한 9·11 테러 이후에 맞은 2002년 세계 평화의 날(1월 1일) 메시지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어조로 『정의 없는 평화가 없고, 용서 없는 정의가 없다(No Peace Without Justice, No Justice Without Forgiveness)』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교는 “정의의 결과는 평화가 되고(Opus iustitiae pax, 평화가 되는 정의) 정의의 성과는 영원히 평온과 신뢰가 되리라.”(이사 32,17)라는 예언으로부터 항상 이를 강조해왔다. 그러나 교황님께서는 ‘평화가 되는 정의’만이 아니라 ‘용서의 정의’라는 말씀으로 성경의 메시지를 새롭고 넓게 확장하신다.
결코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용서와 정의라는 두 가지 미덕의 관계를 명확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교황님께서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여정에서 정의의 길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이고 법적인 제도로 표현되면서 인간의 얼굴이 담긴 ‘용서의 정치’를 희망한다. ‘법적인 제도’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정의에 관한 법률 조항이 용서를 고려한 입법이 되어야만 함을 뜻한다. 이러한 정의는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자비’라고 부르는 미덕으로서,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불쌍한 이들을 위한 마음’이 담긴 정의를 말한다.(mercy>misericordia;cuore per i miseri=heart for the poor) 민족 간이나 종족 간의 관계에서(개인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용서가 정치적 관행이나 사회적 구성 요소의 일부가 되어야 하고, 이러한 내용이 법률이나 법적 제도 안에 권리로 규정되고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징벌적, 보복적인 법률이나 정의, 교정이나 재교육과 같은 정의에 관한 전반이 재고되어야 함을 뜻한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모두 정의와 자비에 관한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인간적인 삶을 통해서 정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온전한 신뢰를 드려 그분을 우리 인간에게 말씀해주고자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될 심판의 날을 두고 사람들에게 요구했던 정의라는 주제로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선구자요 당신의 스승인 세례자 요한을 완성하고 예언서들과 율법서를 완성한다. 정의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 하시며 용서로 공생활을 마감하신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하면서 이를 증언해 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말씀을 두고 많은 이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부르짖던 정의가 위선적이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만, 이 구절은 하느님의 말씀과 율법에 의해(자비慈悲로) 온전히 이루어지는 정의에 관한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신 몸소 입법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떤 법조문의 규범적 차원에 머무르시지 않고 보다 근본적이고 심오한 차원의 정의를 요구하신다.
복음의 증언은 소위 합법이라고 하는 모든 정의를 뛰어넘는 예수님의 자비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온통 자비와 정의의 관계에 관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제목과도 같은 ‘죄와 벌’의 관계를 끊어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 제목은 어떤 면에서 교회가 설파하고 강조해 온 오랜 원리를 잘 표현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라는 교회의 정의에는 끝도 없는 용서가 전제되어야 하고, 인간관계에도 자비와 용서는 항상 함께 가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시는 하느님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정의는 무상이고 우리의 응답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앞서 온다. 하느님의 정의는 말 그대로 공짜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우리가 받을만한 존재인지 아닌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정의는 우리를 앞서 온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어”(1요한 4,10)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시지도 않고 당신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1요한 4,19)이다. 하느님의 정의는 포도원에 파견된 일꾼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에서처럼 능력주의가 아니다. 포도밭에 일한 사람들은 같은 시간 동안 일을 하지 않았어도 모두 같은 임금을 받는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처음에 주인의 비유라기보다 일꾼의 비유로 먼저 다가오며 말도 안 되는 주인의 처사로 읽힌다.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이 따르지만 맨 먼저 이른 아침에 온 일꾼이 나일 때는 한 시간만 일하는 사람이 같은 보수를 받는 것에 주인의 처사가 정의롭지 않아서 억울하며, 일의 양에 비해 돈을 더 받는 이들이 얄밉다. 이럴 때는 내가 새벽부터 일터에 나온 건실한 A급 일꾼인데, 어쩌다가 내가 속한 집단은 모두 한 시간만 일하는 C급 일꾼이냐고 자조 섞인 푸념으로 비아냥거린다. 많은 이들은 먼 훗날에야 이 비유가 착하고 선하신 주인의 이야기인 것을 깨우친다.(20221004 *이미지-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