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걸핏하면 구글 박사님께 무엇이든 물어봐서 손쉽게 검색하고, 검색의 결과로 찾아진 링크들을 확인하느라 애쓰면서 살았다. 그런데도, 경험상 주어진 링크들이 불확실한 내용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한 번이라도 더 클릭하여 내가 본 내용에 권위를 조금이라도 더하고자 했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확인한 내용이 더 바르다는 결론이었다. 그런데, 이젠 검색이 필요 없고 클릭이 필요 없는 시대가 왔다. 인공지능, 소위 ChatGPT에 말을 걸면 그 녀석은 모든 것을 종합하여 그럴듯한 답으로 요약 정리해준다. 편리하면서도 암담하다.
교육에서 학습자의 ‘탐구’는 무엇이며 교육자의 ‘전달’은 무엇일까 싶어서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이고 배운다는 것은 무엇이며, 누가 누구에게, 어떤 관계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일까? 이러한 행위들이 대체 의미가 있고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장 프랑수아 리오타드Jean François Lyotard(1924~1998년)는 이미 “지식의 습득이 영혼의 형성이나 인격의 형성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지닌다는 고대의 원리가 더는 먹히지 않을 것이다.…지식은 판매나 소비를 위해서, 그리고 교환을 위해서 생산될 것이며 지식의 상품화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예언한 바 있다. 우리는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에 관하여 심각하고도 시급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래도 교육은 이제 꿈과 이상을 추구하는 길이 아니며, 내면의 삶을 가꾸거나 인간성을 형성하는 과정,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개인의 실용적인 능력이나 필요를 배양하는 수단 정도가 되어버린 것 같다.
가르침과 배움은 권위와 겸손의 ‘관계’이다. 가르침은 삶에 가해지는 ‘신호’와 ‘기호’의 행위이고, 특별히 전달과 제공의 역할 안에서 그 소명을 사는 이들은 누군가에게 상징이 되고, 현실과 삶의 해석에 관한 열쇠가 되며, 멀리 삶을 비추는 빛이 비쳐오는 지평선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된다. 유다인들의 지혜 전통에 따를 때 지혜는 인생을 살아내는 예술이다. 그러므로 “현인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라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한다.”(잠언 13,14) 하였고, “귀를 기울여 현인들의 말씀을 듣고 나의 지식에 마음을 쏟아라. 그것들을 가슴에 간직하고 다 말할 수 있게 준비를 갖추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잠언 22,17-18) 하였으며, “현인들의 말은 몰이 막대기와 같다.”(코헬 12,11) 하였다. 지혜는 누군가를 자극하고, 안내하며, 제안하고, 델피Delfi(델포이)의 신탁처럼 말하는 법이 없으면서도 숨지 않는 신神과 같이 소리치지 않으면서 침묵으로 말한다. 지혜는 삶에 의미와 방향성, 그리고 맛을 내는 몸짓이며, 모든 아름다움의 의미를 완성한다.
어떠한 한계가 주어지지 않은 것이 바로 지혜…. 그 한계가 없는 존재도 하느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더 열심히…